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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 ― 또 다른 모더니티의... / 우석균 2003-10-22 / 5697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 ― 또 다른 모더니티의 추구

우 석 균



     1960년대는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있어 그야말로 행복한 시대였다. 문학 내적 동인과 문학 외적 동인이 절묘하게 맞물려 국제화의 길을 개척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붐’이라고 불릴 정도로 폭발적으로 분출한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제3세계 문학의 전형으로 평가받았으며, 그후에도 메타픽션,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티, 탈식민주의 등등의 각종 논의에서 빠짐없이 언급되어 왔다. 이 모든 일이 1960대부터 시작된 변화는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문화적․사상적․문학적으로 라틴아메리카 내부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던 변화가 1960년대에 분출했을 따름이다. 본고는 특히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에는 서구와는 상이한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전통이 밑거름이 되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보르헤스처럼 주변부 모더니티에 속한 문인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을 당당히 주장하거나 마술적 사실주의처럼 마술적 세계관과 이성 패러다임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이 라틴아메리카 모더니티의 특징임을 포착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 양상과 그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국내에도 이를 다룬 글이 발표된 바 있다. 이런 논의들은 194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내적 역량이 축적되어 오던 중 1960년대 호의적인 외부 환경이 작용하면서 대분출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가장 큰 문학 외적인 요인은 1959년의 쿠바 혁명이었다. 쿠바 혁명은 냉전구도 하에서 미국 안마당으로 여겨지던 카리브 해에서 일어난 혁명이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 미국이 조종한 반혁명파의 침입을 격퇴하고, 미국인 재산에 대한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고, 경제적 봉쇄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 노선을 천명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난 사건이었다. 쿠바 혁명을 계기로 쿠바인들 뿐만 아니라 전체 라틴아메리카인들 사이에는 일종의 범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가 태동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유의 것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도 확산되었음은 물론 자긍심까지 심어주었다.

     쿠바 혁명은 또한 실질적으로도 라틴아메리카 문학 확산에 이바지했다. 1960년에 설립된 출판사 아메리카의 집(Casa de las Américas)은 라틴아메리카 주요 문학 작품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간행하여 대중화에 기여했으며, 시․소설․수필․단편소설․연극 등 5개 분야에 걸쳐 문학상을 신설하여 창작 붐을 조성했고, 『아메리카의 집』이라는 동명의 잡지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수준 높은 학술 토론의 장을 열었다.

     또한 쿠바 혁명은 국제적으로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트세대, 히피족, 비틀즈, 반전 운동, 68운동, 프라하의 봄으로 요약되는 저항 문화의 맥락에서 쿠바 혁명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 갈리마르를 위시한 여러 메이저 출판사가 라틴아메리카 문학 부서를 따로 둘 정도였으며, 프랑스어로 번역된 외국 소설에 수여하는 문학상에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여러 차례 선정되기도 했다. 또 미국에서도 라틴아메리카 문학 강좌가 대학에 생기고 작가를 초대해 강연회를 열고 작품을 번역하고 연구비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은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정치적 의미나 역사적․사회적 의식을 축소하여 제도권에 편입시킴으로써 쿠바 혁명을 퇴색시키려는 보이지 않는 문화 정책의 결과라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띤다. 그러나 이런 견해만으로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융성을 만족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히피족과 반전 운동 및 학생 운동의 주역들은 오히려 쿠바 혁명에 동조하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의 대쿠바 문화 정책의 존재 유무를 떠나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학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그 저변이 확대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서구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파리에서 간행된 문예지 『신천지』(Mundo Nuevo, 1966~1971)일 것이다. 우루과이의 비평가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Emir Rodríguez Monegal)이 주도한 《신천지》는 포드 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포드 재단이 주변부 지식인으로 하여금 ‘문화의 수도’ 파리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논하는 장을 열어주었으니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능히 짐작하게 해준다.

     스페인의 출판 정책도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했다. 1962년 세익스 바랄(Seix Barral) 출판사는 간이 도서관(Biblioteca Breve)상을 제정하였다. 쿠바 혁명에 대한 관심에 기인했다기보다 내전(1936~1939) 이후의 오랜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여 국제 사회로 복귀하려는 스페인의 국가적 목표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세익스 바랄 출판사는 내전 이후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에 잠식당한 스페인어권 출판 시장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첫 해 수상의 영예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페루)의 『도시와 개들』(La ciudad y los perros)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처음 제정된 상인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당선작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판매 부수를 기록하였다. 이에 힘입은 간이 도서관상은 라틴아메리카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주력했다.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스페인에서도 라틴아메리카 문학 저변이 확대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내부적으로도 문학의 저변이 두터워져 있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라틴아메리카는 20세기 상반기에 초기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1930, 4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경제부흥을 통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한 미국의 정책은 라틴아메리카의 초기 산업화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중산층이 늘어나고 도시화가 진행되고 근대적 삶의 양식이 확산되었다.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 같은 대중 매체도 확산되었으며 교육의 기회도 늘어났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독자층을 두텁게 만들었으며 전문 작가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질적으로 성숙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시의 영향이 컸다. 라틴아메리카 시는 이미 19세기말 니카라과의 시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를 필두로 하는 모데르니모스(Modernismo) 운동 때부터 고대 그리스, 스페인, 프랑스 등의 시 유산을 망라하며 국제화를 선도했다. 또한 1920년대 아방가르드 물결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특히 초현실주의는 많은 문인을 매혹시켰다. 그렇다고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이 단지 서구 사조를 직수입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페루)나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칠레)처럼 토착적 아방가르드 시인들도 배출하였다. 라틴아메리카 시가 국제적 문학 사조에 접하면서 문학을 계몽의 수단으로 여기던 태도나, 자연주의 기법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대자연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 지리학적 소설 혹은 문학을 고발의 도구로 여긴 사회주의 사실주의적 소설 등과는 달리 문학의 자율성에 눈을 떴다는 점도 소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점차 초현실주의 시학을 비롯한 아방가르드 기법을 작품에 도입하는 실험정신에 동참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이스, 카프카, 포크너, 헤밍웨이 등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으며, 소설을 도구가 아닌 미학으로 승화시켜나갔다.

     아르헨티나 소설은 이미 1940년대를 전후하여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점은 아르헨티나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주도한 보르헤스가 시 창작에서 단편으로 눈을 돌린 때였다. 보르헤스 주변은 그를 추종하는 환상문학가들로 붐볐으며 이런 토양 하에서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주역이며 프랑스 초현실주의보다 더 초현실적인 작품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ázar)가 배출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작가가 아니라 서구 작가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던 보르헤스야말로 사실은 라틴아메리카 소설 국제화의 초석을 닦은 것이다.

     아르헨티나 소설이 문학의 국제적 흐름에 재빨리 동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작용했다. 식민 시대 거의 내내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관계로 식민잔재가 그리 뿌리깊지 않았으며, 스페인인이 정착하기 이전에 수준 높은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던 곳도 아니라 토착 문화에 대한 집착도 별로 없었고, 19세기말부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여 스페인계보다 비스페인계가 더 많아서 코스모폴리티즘이 하나의 전통이 된 곳이 아르헨티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잔재의 뿌리가 깊고, 토착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코스모폴리티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설의 국제적 기법이 전파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령 각각 아프리카 문화와 마야 문명의 세계관을 작품 속에 담은 쿠바의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나 과테말라의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Miguel Angel Asturias)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았고, 고국에 돌아가 국제적인 문학 기법의 전파와 토착화에 매진했다. 그나마 카르펜티에르나 아스투리아스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아방가르드를 직접 접한 적이 있지만, 후안 룰포(Juan Rulfo)나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José María Arguedas) 같은 경우는 그런 자극도 없이 각각 멕시코 농촌과 안데스를 다루었으면서도 192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만연했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를 충분히 극복한 작품들을 썼다.


2. 또 다른 모더니티를 모색하는 전통의 확립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에는 이처럼 서구 문학기법을 차용해 낯설지 않은 작품으로 서구 독자에게 다가갔다는 점도 분명 크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하스(Luis Harss)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국제화시킨 주역들을 다룬 책을 간행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우리 작가들』(Los nuestros, 1966)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언뜻 보면 모순된 현상이지만 이는 서구 모더니티와 토착성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꽃핀 문학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라는 반증이다.

     국제적인 문학 기법에 그토록 목말라한 이유는 문학적 필요성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절실함이 작용했다. 그것은 문인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던, 서구 것이 곧 모던하다는 인식, 라틴아메리카에는 진정한 모더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구와 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었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은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파스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인은 오랫동안 현재는 라틴아메리카에 있지 않고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등이 사는 땅에 있다고 믿어왔다. 라틴아메리카인이 살고 있는 시간은 남들이 이미 살고 지나간 시간이므로 라틴아메리카에는 항상 서구의 과거라는 시간성만 존재하지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이며, 라틴아메리카는 모던하지 않다는 자괴감이다. 이런 인식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이 곧 모더니티 단계로 이행하는 첩경이었다.

     페루 시인 가말리엘 추라타(Gamaliel Churata)의 일화는 이런 인식의 전형이다. 추라타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인 티티카카 호수 연안 푸노에서 1920년대에 활동한 시인이다. 푸노는 티티카카 호수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해발 3,800m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로서는 외부 세계와의 문화적 접촉도 용이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정체된 소도시에 불과했다. 그런데 험준한 안데스 꼭대기의 이 오지에서도 슈펭글러와 프로이트 그리고 파리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논하고, 《티티카카 소식》(Boletín Titikaka, 1926~1930)이라는 아방가드르 잡지를 간행하는 동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라틴아메리카 대도시와 견주어보아도 이 모든 일이 별로 시간적 격차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푸노 일대를 휩쓴 경제 위기로 모두가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던 시기에 말이다. 이 동인 운동은 24세에 불과한 추라타가 1919년 푸노 시립 도서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싹을 틔웠다. 말이 시립 도서관이지 쓸만한 책, 특히 당대의 화두가 될만한 책은 거의 없는 현실 속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흐름을 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더니티에 대한 추라타의 열망은 이런 장애를 능히 극복하였다. 《티티카카 소식》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이 잡지는 34호까지 간행되기는 했지만 사실 호당 4~6페이지에 불과했으니 잡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더 두꺼운 잡지를 만들지 못한 것은 발간 비용 때문이 아니라 우편료 때문이었다. 잡지가 발간될 때마다 추라타가 가장 신경 써서 한 일은 여러 나라 대도시의 무수한 신문사와 잡지사에 발송하는 것이었으니 우편료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추라타의 목표는 잡지를 보내는 대신 외국 간행물을 받는 것이었다. 추라타의 기발한 생각 덕에 어느 날 갑자기 푸노 지식인들은 파리와 라틴아메리카 대도시에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를 돌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티티카카 소식》은 ‘과거’의 푸노로부터 ‘현재’의 메트로폴리스로 가는 타임머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추라타의 모더니티에 대한 열망은 19세기 아르헨티나의 사상가, 정치가, 문인인 도밍고 F. 사르미엔토(Domingo F. Sarmiento)의 실증주의적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사르미엔토는 ‘문명과 야만’(civilización y barbarie)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서구와 라틴아메리카를 조망하면서 오직 서구 문명의 이식을 통해서만 ‘야만적’인 라틴아메리카에 모더니티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추라타는 모더니티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토착성에 대한 열망도 커서 아방가르드를 인디헤니스모(indigensimo)와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토착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을 인디헤니스모는 당시 페루 상황으로는 주로 인디오의 인권 회복을 주창한 사상이자 또한 인디오 세계를 예술에 담아야한다는 토착성을 표방한 대표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같은 무렵 리마에서 활동하면서 페루 전역은 물론 이웃 국가들에게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공산주의자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가 표방한 것도 바로 “아방가르드적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 vanguardista)였다. 코르네호 폴라르는 아방가르드적 인디헤니스모를 주장한 마리아테기의 목표는 봉건적 식민잔재 청산을 위해 서구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토착적 요소와 결합시킴으로써 “또 다른 모더니티”(otra modernidad), 즉 페루에 알맞은 모더니티를 구현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페루 토양에 맞는 사회주의 정착을 주장한 마리아테기다운 생각이며, 차이에 대한 인식이 정신적 예속이나 열등감으로 귀결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더니티 구현을 위한 출발점으로 작동하게 된 예이다.

     가장 토착적 색채가 짙은 문학을 생산한다는 페루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서구적이라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유사한 문제 의식이 나타난다. 가령 1920년대 발표된 보르헤스의 초기 시는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아방가르드를 수입한 작가의 것으로 보기에는 놀라울 만큼 지역적 색채가 강하다. 파격적인 메타포를 중시하는 아방가르드 계열의 과격주의(ultraísmo) 기법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 변두리 지역 혹은 아르헨티나 역사나 자기 가문의 아르헨티나인으로서의 정통성 등을 노래한 시가 거의 대부분이다. 보르헤스의 의도는 크리오요주의(criollismo)와 아방가르드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크리오요주의는 크리오요(criollo)가 많은 아르헨티나의 토착주의로 이민자가 급증한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한 문학 사조이다. 이미 쇠락해가는 문학 사조임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크리오요주의에 아방가르드를 접목시켜 “크리오요 아방가르드”(“Una vanguardia criolla”)라는 아르헨티나 특유의 모더니티를 구현하고자 했다.

     또 다른 모더니티를 구현하고자 한 시도가 결코 1920년대에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상적으로는 서구와의 ‘차이’를 좁혀야할 간극이자 또 다른 모더니티 구현을 위한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보다 한발 더 나아가, ‘차이’가 있으니까 당연히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모더니티를 구현해야만 하며 이런 시도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시각이나 혹은 ‘차이’가 곧 라틴아메리카의 우월함의 표식이라는 시각이 이전부터 존재했다. 가령, 이미 19세기말에 호세 마르티와 호세 엔리케 로도는 실증주의에 기초한 서구 모더니티의 수입과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욕이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서 라틴아메리카가 지향해야할 모더니티를 제안한다. 쿠바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문인인 마르티는 1891년 「우리 아메리카」라는 에세이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토양에 맞는 교육과 문화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마르티는 라틴아메리카가 문명과 야만이 충돌하는 곳이라는 사르미엔토의 주장은 허구이며 ‘사이비 박식함’(falsa erudición)이 문명이라는 탈을 쓰고 토착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서구에서는 문명이더라도 라틴아메리카 토양에 맞지 않으면 사이비 박식함일 뿐이라는 마르티의 주장은 ‘차이’는 존중받아야한다는 견해를 거리낌없이 밝힌 것이다. 마르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구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드러낸다. 마르티는 사이비 박심함에 대한 대립항으로 ‘자연’이라는 범주를 설정하는데 이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모더니티가 물질 문명에 기초한 서구 모더니티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비슷한 시기 우루과이의 로도는 『아리엘』(1898)에서 서구가 ―특히 미국이― 천박한 물질 문명을 숭상하는 데 반해 라틴아메리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스페인, 라틴아메리카로 면면히 이어지는 라틴 문화의 정신적 가치를 예찬할 줄 아는 미덕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사르미엔토가 ‘야만’이라 칭한 것을 마르티가 ‘자연’이라는 범주로 전복시켰다면 로도는 ‘정신’이라는 범주를 이용해 똑같은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마르티와 로도가 자연이나 정신 같은 범주를 설정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또 다른 모더니티가 미학적 모더니티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이처럼 국제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구와는 상이한 모더니티를 모색하는 전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이한 모더니티에 대한 확고한 자긍심을 획득하거나 또 다른 모더니티를 추구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문학적으로 잘 포착했을 때 세계문학의 정전으로 인정받을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라틴아메리카 소설 패러다임 중에서도 보르헤스의 문학과 마술적 사실주의는 대표적 사례이다.


3. 보르헤스: 주변부적 모더니티의 특권

     보르헤스는 누구보다도 먼저 또 다른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담론을 소설로 형상화시켰다. 서구 모더니티와 토착성을 양립시키려던 초기의 크리오요 아방가르드에서 탈피해 전 세계의 철학, 신학, 문학, 전설 등을 넘나드는 『픽션들』(Ficciones, 1944)과 『알렙』(Aleph, 1949) 같은 단편집을 썼다. 철학이나 신학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나 삶의 경험이 아니라 독서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썼다는 점이 대단한 파격이었다. 또한 형식적인 면에서도 기존 소설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났다. 추리소설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고급’ 문학과 ‘통속’ 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또 마치 학술 논문을 쓰듯 상세한 각주를 다는 형식으로 장르를 파괴하는 동시에 허구적인 인물이나 가공의 책 그리고 허구적인 각주 등을 섞어 넣음으로써 사실과 허구의 경계마저 무너뜨린다. 단편 소설로 보기는 힘들지만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에서는 전 세계 악당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영웅전 쓰듯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고 있으며 『상상동물 이야기』(Manual de zoología fantástica, 1957)에서는 인간의 상상력이 자아낸 온갖 기괴한 동물을 열거한다.

     이렇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자유나 서구 철학과 신학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의 철학과 신학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할 권리를 보르헤스는 어떻게 주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주변부적 모더니티에 대한 열등감을 특권으로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가능해진 일이었다. 크리오요 아방가르드 시절의 보르헤스는 비록 서구 모더니티와 아르헨티나적 토착성을 양립시키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주변부적 모더니티에 대한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보르헤스는 매일 몇 시간씩 시내 산책을 할 정도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랑했으며 그의 초기 시를 두고 “아방가르드적 도시 크리오요주의”(criollismo urbano de vanguardia)라고 부를 정도로 도시 풍경을 주로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미 메트로폴리스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비대해진 부에노스아이레스이건만 보르헤스가 그리는 도시는 활력이나 속도감을 느낄 수 없고 심지어 인적조차 드물다. 어쩌다 현대 도시다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습을 그릴 때면 휘황찬란한 불빛이나 소음 등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반면 보르헤스가 선호하는 공간은 도시가 끝나고 팜파가 시작되는 접경 지역이다. 그 너머의 팜파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첫 시집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서문에서는 이 접경 지역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체이고 조국 그 자체라고까지 절대화시키고 있다. 즉 접경 지역을 단순한 하나의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아르헨티나인으로서 또 부에노스아이레스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존재론적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대 서구문학에 나타나는 접경 의식과 비교하면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걸리버 여행기』,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2만리』, 『모비딕』 같은 모험 소설이나 혹은 프론티어 정신으로 점철된 미국의 서부개척 소설은 접경에 자신의 존재를 설정하기보다는 접경 너머의 미지의 공간으로 뛰어든다. 이는 미지의 공간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미지의 땅을 개척하리라는 진취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서구가 세계 전역으로 팽창하기 시작했을 때 쓰여진 소설들이다. 반면, 보르헤스가 도시에서도 팜파에서도 자신의 존재적 공간을 설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앙드레 말로가 지적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하구라는 특성상 서구 모더니티가 유입되는 관문이 부에노스아이레스였고 나폴레옹 3세 때의 오스망 남작의 파리 도시계획을 모방해 도시를 정비할 정도로 모더니티에 대한 열망이 큰 곳이 부에노스아이레스였지만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리엘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의 대립, 과두 계층과 중산층 및 빈민층간의 갈등, 이민자와 크리오요간의 갈등, 근린 지역과의 불균등한 발전이 야기한 지역적 갈등 등으로 모더니티를 견인할 구심점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보르헤스가 형상화하고 있는 접경은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의 신기루 같은 모더니티에 만족할 수도 없고 또한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해 선뜻 팜파로 뛰어들지도 못하는 주변부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단편을 쓰기 시작한 무렵에 이미 보르헤스는 주변부적 모더니티 상황을 달리 인식하고 있었다. 우선 그의 단편에서 눈에 띄는 것은 크리오요 아방가르드 시와는 달리 지역적 색채에서 탈피했다는 점이다. 보르헤스 자신은 「아르헨티나 작가와 전통」이라는 수필을 통해 토착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토착성을 구현하는 방법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코란에 낙타가 나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코란과 아랍의 관련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적 색채를 굳이 가미하지 않더라도 아르헨티나 문학다운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처럼 크리오요 아방가르드의 한 축인 지역적 색채에 대한 인식을 과감하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보르헤스가 서구 모더니티와의 차이를 또 다른 모더니티 모색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탈피하면서 가능해졌다. 아르헨티나의 주변부적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비평가 사를로는 이에 대해 보르헤스가 변방(marginal)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특권을 행사했다는 말로 요약한다. 보르헤스가 서구 정전이라는 문학 전통의 무게에 억눌려 있지 않은 변방의 작가이기 때문에 장르, 소재, 기법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나아가 서구 이성 패러다임마저 허물어뜨리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보르헤스 자신도 그가 행사하는 특권에 대해서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유태인이나 아일랜드인을 예로 든다. 서구 문화에서 유태인이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든가 아일랜드인이 영국 문학과 철학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것은 선천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서구 전통의 주변부에 처한 그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진정한 아르헨티나 문학은 지역적 색채로 포장한 문학이 아니라 서구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마음대로 재구성할 수 있을 특권을 행사하는 전통을 수립하는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중심부/주변부의 관계는 전복된다. 주변부 문학은 중심부 문학에 예속되어 있는 문학이 아니라 오히려 우월한 문학이 된다.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중심부 문학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훨씬 창조적인 문학을 생산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주변부 모더니티도 보르헤스에 의해서 더 이상 왜곡된 모더니티나 아류 모더니티가 아니라 서구 모더니티를 마음대로 비판하고 종합하여 한 단계 더 성숙시킬 수 있을 가능성을 담지한 또 다른 모더니티로 탈바꿈한다.


4. 마술적 사실주의: 다시대적 이종혼형성(heterogeneidad multitemporal)

     ‘마술적 사실주의’는 원래 독일의 미술 평론가 프란츠 로가 1925년 후기 표현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라틴아메리카에 전파된 용어이다. 로는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겪은 독일 사회가 안정을 희구하면서 표현주의의 실험정신 대신 소박한 일상에서 어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회화가 등장했음을 주목하였고 이를 후기 표현주의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렀다. 로는 후기 표현주의처럼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권유했고 이 새로운 시각을 통해 사물의 마술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프란츠 로의 개념과는 다르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19세기말이래의 민족지학 연구의 유산과 비슷한 맥락을 띠고 있다. 일례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마술’은 원시 부족의 종교적 믿음이나 의식(儀式) 혹은 세계관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구의 이성적 세계관과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라틴아메리카 마술적 사실주의 역시 이성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을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곤살레스 에체바리아는 프란츠 로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라틴아메리카 마술적 사실주의를 각각 현상학적 마술적 사실주의와 존재론적 마술적 사실주의로 구분하였다. 곤살레스 에체바리아는 카르펜티에르의 경이로운 현실론을 염두에 두고 존재론적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범주를 설정하여 프란츠 로가 설정한 개념과의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카르펜티에르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1928년부터 1939년 사이 파리에 머물면서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1948년에 진정한 초현실주의 정신은 서구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만이 가능하다는 요지의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에 대하여」(De lo real maravilloso americano)라는 글을 쓴다. 주지하다시피 ‘경이로움’은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나오는 개념이다. 그런데 카르펜티에르는, 초현실주의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을 억지로 결합시키는 미술 작품을 남발하거나 괴기문학 전통 혹은 환상문학 전통을 재생산하는 데 그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이로움을 조장하는 데 반해, 라틴아메리카는 불가사의한 인물들, 변화무쌍하고 자유분방한 자연, 기상천외한 역사 등등으로 인해 현실 자체가 생생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카르펜티에르는 슈펭글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시적 사고방식의 특징인 비성찰성(irreflexividad)을 이성보다 우위에 둔 슈펭글러의 견해는 카르펜티에르에게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물론 슈펭글러가 19세기말이래 정신분석학, 아방가르드, 인류학 등등의 분야에서, 비합리성, 주술, 무의식 등을 천착하며 서구의 이성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던 문화적 맥락에 위치해 있음은 물론이다.

     ‘마술적 사실주의’가 비이성적 세계관을 지칭하는 ‘마술’과 문학에 있어 서구 이성 패러다임의 적자인 ‘사실주의’가 결합된 모순어법적 용어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주고 어느 쪽이 종인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또한 마술적 사실주의를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한 문학의 일종 혹은 이성 패러다임에 반발하는 서구 미학적 모더니티 전통의 일환으로 파악함으로써 마술적 사실주의를 보편적 문학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마술적 사실주의가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모더니티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가 이성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으로 마술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성과 마술을 확연히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경계는 희미하다 못해 때로는 이성과 마술의 구분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이 점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백년 동안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 1967)이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환상적인 작품이나 마술적인 작품이 아니라 지극히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일상 자체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처럼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성과 마술이 구분되지 않는 이런 현실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하였다. 불균등한 근대화로 인해 모더니티와 전통적 세계관이 혼재하고, 또한 시간적 편차를 두고 작동하기 시작한 정치적 모더니티, 경제적 모더니티, 미학적 모더니티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채 포개져온 역사가 라틴아메리카 모더니티의 조건인 것이다. 다시대적 이종혼형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라틴아메리카 모더니티의 이 역사적 조건이 이성과 마술의 경계가 모호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문학 정전을 탄생시켰다.

     프랑코 모레티는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콘도가 근대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을 그린 ‘불균등 복합 발전’에 관한 소설이라고 규정할 때, 아마도 그는 세계체제라는 전지구적인 하나의 모더니티 범주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상황을 진단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모레티는 모더니티와 전통이 만날 때의 불협화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한낱 얼음조차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을 정도로 고립된 삶을 살던 마콘도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서 예고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작품 속에서 전기, 기차, 피아노 등등으로 상징되는 모더니티가 도입되면서 전통적 삶의 양식과 갈등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마콘도는 이념 투쟁과 내전의 장으로 변한다. 그리고 미국 자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상징하는 바나나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시위가 참혹한 대학살로 종결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노조 지도부의 일원인 호세 아르카디오 2세는 몇천 명의 사람들이 학살되는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를 여론에 고발하려 하지만 아무도 시위와 대학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학살극이 벌어진 날부터 꼬박 4년 11개월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리면서 마콘도는 파멸의 시대로 접어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몇천 명의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학살되는 일이나 이에 대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4년 11개월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리는 일만큼이나 마술적인 일이라는 점이다.

     마콘도의 멸망으로 작품을 결말짓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여러 역사적 시간, 여러 모더니티의 혼재가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질곡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대적 이종혼형성의 폐해를 지적함으로써 역으로, 라틴아메리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 서구 패러다임을 직수입하는 일은 새로운 갈등만 야기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라틴아메리카만의 독특한 마술적 현실, 독특한 모더니티를 다루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당성과 유효성도 보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