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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라』, 삶과 죽음의 순환구조 / 김태중 2003-10-22 / 6494   

『아우라』, 삶과 죽음의 순환구조

김 태 중



I. 들어가는 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1962년에 발표한 『아우라』(Aura)는 발표 당시에는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La muerte de Artemio Cruz)에 가려 별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점차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구조로 인해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동시에 ‘환상적 괴기소설’로 분류되어왔다. 우리는 이 ‘환상적 괴기소설’이라는 조합어에서 두 가지의 사항을 축출해 낼 수 있다. ‘환상적’이라는 형용사와 ‘괴기소설’이라는 단어이다. 환상적이라고 함은 현실적 인과율에 적용 받지 않음을 의미하고 ‘괴기적’이라고 함은 한 개체의 해체와 통합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 원형적 이미지가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는 세계’로 제시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화 속에서는 반대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가능하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실현될 수 있다. 즉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인 꿈과 욕망이 실현되는 시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화적 세계는 양가적(ambivalente) 세계인 것이다. 죽음은 삶과 결합되고 순간은 영원과 조우한다.

     이러한 신화적 구조는 문학텍스트에서 반대적인 요소들간의 화해와 융합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이른바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고 지시하는 언어의 도구적 기능에 충실했던 19세기 리얼리즘시대에 신화세계는 병적인 세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언어는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외부의 현실과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체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즉 언어의 의미는 차이와 대비라는 역동적 구조에서 생산되며 이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언어의 순수한 내적 기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언어, 즉 문자로 쓰여지는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자 모방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소설은 언어로 구축된 의미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언어들의 자율적 체계에 따르는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의 모순이나 법칙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구속력을 가지게 되겠는가? 이제 소설은 더 큰 세계를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은 인간이 꿈꾸는 모든 영역을 담을 수 있는 의미체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화는 인간 욕망의 극대화를 추구하거나 그 행위의 모방이다. 『아우라』에서는 개인의 해체와 결합이 일어나며, 반대적인 요소들간의 결합이 일어난다. 이러한 반대적인 요소들의 결합은 상징을 통해 암시되고 있다. 요렌테 장군이 콘수엘로에 의해 시공간을 초월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은 텍스트가 독자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또 다른 텍스트로 부활되는 것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본고에서는 어떻게 신화구조가 텍스트 내에서 전개되고 있는가를 상징과 욕망의 구조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II. 신화적 시공간으로서 텍스트

     신화(mito)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인 미토스(mythos)에서 유래하였는데, 본래적 의미는 서술이나 플롯을 의미한다. 즉 신화가 이야기된 것이라는 것은 바로 신화의 작위(作爲)성을 말하는 것이며, 신화는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화는 언어로 구성된 의미의 세계인 것으로 인식 주체의 외부에 실재로 존재하는 세계를 지시하지 않을뿐더러 관심조차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현실의 법칙과 상관없는 텍스트내의 정합성(coherencia)만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는 미분화적(원초적)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신화는 현실에서는 화해될 수 없는 대립된 두 양극의 모순을 해소․극복하는 원형적 서술구조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점이 신화 내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고 또한 일어날 수 있게 되는 요인이다.

     이러한 신화의 세계는 현실을 지배하는 인과율과는 다른 ‘마술적’ 인과율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보르헤스는 「서사문학과 마술」(El arte narrativo y la magia)에서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인과율이라는 논지를 편다. 서사문학에서 인과율을 다루는 두 가지 형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리얼리즘의 인과율은 현실생활의 인과율을 모방한다. 즉 각 시대마다 ‘실재’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인과율이 결정된다. 리얼리즘의 인과율, 즉 플롯은 일상생활과 유사한 모델을 재현하는 것이다. 둘째, 모험소설의 인과율은 일상적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 마술적 인과율이다. 모험소설은 현실을 모사(模寫)하지 않으며 인위적이다. 그는 이같이 인과율을 자연적인 것과 마술적인 것으로 나누고 후자를 선호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은 마술적 인과율만이 가능하다. 현실의 인과율에 지배받는 ‘세속적 공간’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자아가 해체되는 과정을 겪는 펠리페(Felipe)에게는 분명히 악마적 공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식의 현실반영적 소설을 거부하는 푸엔테스가 마술적 인과율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이와 같이 『아우라』의 시공간은 마술적 인과율에 지배받고 있으며, 그 시공간은 세속적 공간이 아닌 신화적 시공간인 것이다. 『아우라』에서 시공간의 전이(轉移)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전이는 욕망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즉 『아우라』라는 텍스트는 의미의 연쇄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상징들과 그 상징들을 엮는 모순구조를 해소시켜 융화시키는 외적 신화구조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우라』의 시공간은 현실의 시공간과는 달리 순환적이다. 과거와 현재의 결합이라든가, 아우라의 허상(虛像)적 존재 등은 『아우라』의 시공간이 우리의 객관적 현실의 시공간과 다른 어떤 이질적 공간, 다시 말해서 신화적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우라』의 시간은 순환적이며 공간은 악마적이다. 공간이 악마적이라 함은 구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둠의 세계로의 하강을 암시하고 있으며, 또한 제물을 통해 젊음을 되찾는 행위 역시 흑마술의 세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다시 말해서 악마적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펠리페라는 자아(自我)는 점차적으로 소멸되어가고 결국 요렌테 장군(El General Llorente)으로의 변신(metamorfosis)이 이루어진다. 시간의 직선적 흐름이 정지된다면 자아나 주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세속적 시간-일회적이며 직선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주체나 자아의 개념이 보장되는 것이다.

     『아우라』에서 현재는 과거를 소환하며 과거는 현재와 결합된다. 이러한 제식행위의 주체는 콘수엘로(Consuelo)이며 펠리페 몬테로(Felipe Montero)는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양(Pharmakos)에 불과하다. 이러한 제식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펠리페가 조건이 좋은 광고에 이끌려 찾게되는 돈셀레스(Donceles) 거리에 위치한 구(舊)저택이다. 펠리페가 들어간 그 구저택은 모든 것이 고풍스러웠으며, 그 안에서는 어떤 시계도 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그 저택이 위치한 곳 -돈셀레스 거리는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었다(allí nada cambia). 거닐 때조차 어두워서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존해야만 하는 어둠의 세계인 것이다.


너는 현관문을 닫고서 지붕을 얹은, 그래서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선다. 아니 뜰에 들어선다... (중략) 널 안내할 불빛이 있는지를 찾아보지만 헛수고를 한다...(중략) 아니, 필요 없을 거예요. 당신께 부탁드려요. 13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면 오른 쪽으로 계단이 나올 거예요. 그럼 계단에 오르세요. 22계단입니다. 세어보세요.


     집에 들어선 펠리페의 행위는 이질적 공간으로의 일종의 통과제의(rito de la iniciación)이다. 즉 현실적-세속적 시공간에서 비현실적-신화적 시공간으로의 이동인 것이다. 구저택은 신화적 시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의 주인은 주술사(la bruja), 콘수엘로의 무대이며 그녀의 주술에 종속되는 시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펠리페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이미 결정되어있을(predestinado)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펠리페의 피동성은 콘수엘로의 의식을 암시하는 2인칭의 미래시제를 통해 더욱 명백해진다. 펠리페는 주체적 존재가 아니라 콘수엘로라는 타인에 종속되는 객체적 존재로 변한 것이다.


너는 이 광고를 읽을 것이다. 이런 제안은 매일 하는 것이 아님. 광고를 읽고 또 읽는다.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너를 위한 것 같았다...(중략) 너는 서류가방을 챙기고 팁을 놓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콘수엘로의 명령에 복종함을 암시한다. 펠리페는 철저하게 그녀의 공간에 종속되어 간다. 빛이 없는 세계에서 시각 대신 촉각과 감각에 의지해서 행동하고, 죽은 동물의 콩팥요리 등등을 먹으며 지낸다.

     한편으로 아우라(Aura)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 즉 콘수엘로가 만들어 낸 환영이며 제식을 행하는 대리인일 뿐이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매개체인 것이다. 아우라의 실체적 존재를 부인하는 서술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엌에서 숫양의 목을 쳐 피를 뿌리는 광경, 그리고 이와 동시에 타 공간에서 아우라의 행위를 동일하게 연출하는 콘수엘로의 행위는 아우라가 콘수엘로의 환영(simulacro)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 인용은 현실적으로 이질적 시공간의 아우라와 콘수엘로가 신화적 시공간으로의 동조화(sincronización)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너는 숫 산양의 목을 베고있는 그녀를 부엌에서 발견한다. 벌어진 목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김, 흩뿌려진 피내음, 부릅뜬 채 굳어진 짐승의 두 눈은 너를 구역질나게 한다. 이 광경을 뒤로, 너는 널 알아보지 못한 채 계속 고기를 바르고 있는 머리를 묶어 올리고 피에 범벅이 된 초라한 옷차림의 아우라의 모습은 잊어버린다.
    너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이번에는 노파와 대화를 나눌 것이다...문을 밀어 재치고 희미한 불빛 속에 서, 허공을 휘젓는 그녀의 행위를 너는 본다.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고 있는 동작을 너는 본다. 마치 무엇인가를 쥐려는 듯이 힘을 다해서 팔을 쭉 펴 잡고,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몇 번이고 같은 곳의 허공의 대상을 움켜잡듯 하였다. 그리고 곧 노파를 가슴에 손을 거두어 한숨을 쉴 것이며, 마치 짐승의 껍질을 벗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다시 자를 것이다. -그래, 바로 네가 두 눈으로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지만.
    너는 복도, 응접실, 식당을 지나 아우라가 천천히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있는 부엌으로 뛰어간다. 그녀는 일에 몰두해 네가 들어오는 소리도 말소리도 듣지 못한 채, 너를 마치 허공을 보듯 바라본다.


     신화적 공간에서는 시간의 직선적 흐름은 정지되고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의 시간들이 수렴(convergencia)되는 공간이다. 과거는 현재로 돌아오고 미래는 현재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직선적 시간이 정지되는 공간에서는 차별이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무차별화의 총상(totalidad indiferenciada)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악마적’ 공간에서 콘수엘로는 자신의 젊음은 아우라를 매개로, 그리고 죽은 남편은 펠리페를 매개로 하여 돌아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환적 시간에서는 변화는 무의미하며, 펠리페는 곧 요렌테 장군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언급처럼 ‘나는 모두이며 모두는 나’인 것이다.

     신화나 민담의 기본적 이야기의 단위를 구성하는 3중구조(tríada)는 텍스트 전체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아우라』에서 통과제의는 3중구조를 지닌다. 펠리페는 마지막 3번째 제단(콘수엘로와의 성적 결합을 통해 펠리페는 요렌테 장군으로 변한다)에 오르기 전까지 두 번 통과제의(rito de iniciación)를 거친다.

     첫 번째 통과제의는 세속적 공간에서 신화적 공간, 즉 악마적 공간으로의 진입이다. 펠리페는 오래되고 어두운 집으로 들어감으로서 자신이 속한 세계와는 시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두 번째의 통과제의는 아우라와의 성적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너는 찾아본다. 너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우라의 존재가 아니고 지난밤에 생긴 어떤 이중적 존재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다. 너는 흩어진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관자놀이에 손을 댄다. 어떤 전조(前兆)에 대한 희미한 기억 속에서 절망적인 슬픔이 낮은 소리로 너에게 말하고 있다. 어젯밤 나약한 관념이 만들어 낸 너의 분신, 너의 반쪽을 너는 찾고 있다고.


    구저택으로 진입, 아우라와 성적관계, 그리고 3번째이며 마지막인 콘수엘로와의 성적관계로 펠리페의 탈자아적 변신은 완성된다.

     이러한 3중구조는 펠리페가 요렌테 장군의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점차적으로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도 나타난다. 첫 번째 서류는 ‘젊은 역사가’인 펠리페의 객관적 입장에서 날카롭게 분석되고 비판된다.

요렌테 장군의 프랑스어 실력은 부인이 말한 것처럼 훌륭하지는 못했다. 너는 이 문체들을 훨씬 더 매끄럽게 다듬고, 산만하게 나열된 과거의 사건을 정돈할 수 있을 거라고 중얼거린다...(중략)괜찮은 단락은 그냥 깨끗하게 옮겨 쓰고 신통치 않은 부분은 고쳐 써가면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하루 종일 넌 서류에 묻혀 지낸다.


     하지만 두 번째 서류에서는 이미 역사가로서의 객관적 거리감을 상실하고 역사적 사실보다는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콘수엘로의 매력에 빠져 들어간다. 과거와 현재라는 객관적인 시간의 간격은 존재하지만 과거에 요렌테 장군이 콘수엘로의 매력에 빠져 들어간 것처럼 펠리페가 아우라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빠져드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이 두 번째 서류를 읽어 가는 과정은 대상을 자기화(apropiación)하는 과정이며, 콘수엘로와 요렌테 장군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이다. 두 번째 서류는 펠리페의 미래를 예고하는 여러 단서들이 담겨있다. 녹색 눈의 아우라를 사랑하는 펠리페의 행위가 녹색 눈의 콘수엘로를 사랑하는 요렌테 장군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제의(祭儀)는 과거의 삶을 현재화한다. 늙은 콘수엘로라는 제사장이 과거를 현재화하는 제의를 거행하고 펠리페는 그 과거를 소환하는데 필요한 매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의를 통해 과거의 젊음이 돌아와 현재의 늙음을 무화(無化)시켜, 결국 영원한 젊음을 갖게되는 것이다.


사랑스런 콘수엘로, 너는 옷도 잘입는구나. 너의 녹색 눈동자처럼 항상 초록색 벨벳으로 치장을 하고..너는 항상 아름다울 것이다. 백년이 가도... 항상 녹색 옷을 입은 그녀, 항상 아름다운 그녀, 백년이 흘러가도... 네게 있어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넌 무슨 짓이라도 할거야.


     이미 객관적 거리를 상실하기 시작한 펠리페는 3번째 서류를 훔쳐 살피던 중 서류 속의 요렌테 장군의 사진이 바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제는 요렌테의 회고록은 펠리페 자신의 자서전으로 전환되고 만다.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역사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입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요렌테의 이야기는 곧 지금 진행되는 자신의 미래행적에 대한 기록이며 예언이 된 셈이다. 즉 펠리페의 행적은 이미 요렌테의 회고록에 이미 예정된 과정을 밟는 결정된 삶이었던 것이다.


3번째 사진에서 너는 노인과 함께 정원의 벤치에 앉아있는 멕시코 전통복장을 한 아우라를 볼 것이다. 사진이 약간 퇴색했고, 첫 번째 사진에서처럼 아우라가 젊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그녀였다. 그리고 그 노인은...그는 바로 너였다...(중략)마치 27년간 네가 간직해 온 가면을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뜯어내기라도 하는 듯이 두려워한다. 4반세기 동안 너의 진짜 얼굴을, 잊고 있었던 너의 옛 얼굴을 가리고 있던 고무와 마분지로 만들어진 얼굴이었다.


    이렇게 하여 텍스트의 도입부에서 콘수엘로가 펠리페에게 행한 주술은 실현된 것이다.


당신은 내 남편의 스타일대로 편집하게될 거예요. 서류들을 읽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남편의 스타일에 매료될 거예요. 이 투명하고 그리고...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3장의 사진 역시 광고를 읽으면서 시작된 펠리페의 감춰진 자아에 대한 인식과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신화적 시공간에서 자아가 수많은 자아로 분산되고 확산된다면 이는 역으로 자아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와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르헤스의 시간은 수없이 갈라지는 시간이며 이 갈라진 각각의 시간에 우리의 자아는 무한히 증식되고 분산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아의 무한증식을 통한 자아의 역설적 해체와 소멸인 것이다. 순환적 시간 속에서 개성은 해체될 수밖에 없으며, 고로 펠리페는 요렌테이며, 요렌테는 펠리페인 것이다. 순환적이며 동시적인 시간에서는 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야기된 늙음과 젊음은 무의미해지며, 개체로서의 개성은 무너지고 만다. 바로 그 시공간은 ‘나는 모두이고 모두는 나’인 알렙의 시공간인 것이다.


III. 상징의 그물구조

     『아우라』에는 신화적․악마적 공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수많은 상징들이 코드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계열의 상징들은 그물처럼 짜여져 기표(significante)적 신화구조에 연쇄적으로 결합되어 기의(significado) 즉 의미장(campo semántico)을 형성하여 초시간적 신화구조를 현재화하고 있다.
먼저 미슐레의 제문(epígrafe)은 텍스트 전체의 의미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남자는 사냥하고 투쟁한다. 여자는 계획하고 꿈을 꾼다. 여자는 환상과 신들의 어머니이다. 여자는 두 번째 비전인 무한한 욕망과 상상력을 향해 날게 하는 날개를 소유한다... 신들은 남자들과 같다. 여자의 가슴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미슐레의 제문에서 축출할 수 있는 여자(마녀-hechicera)는 ‘환상의 거미줄’을 짜는 자 (mujer-araña-tejedora de ilusión)이다. ‘꼰수엘라’라는 거미는 ‘아우라’라는 거미줄을 치고 펠리페라는 희생물을 유혹한다.

     펠리페 몬테로(Felipe Montero)에서 몬테로(Montero)의 사전적 의미는 토끼 사냥꾼(lebrel)이다. 토끼는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며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를 나타낸다. 펠리페가 아우라를 욕망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운명적으로 결정된 토끼사냥꾼이라는 상징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펠리페는 콘수엘로라는 마녀가 주도하는 제단에 바쳐질 ‘순수하고 순결한’ 희생양으로서의 자질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Donceles’거리에서 돈셀(doncel)의 사전적 의미는 ‘여자를 모르는 남자’이다. 고로 펠리페 몬테로는 ‘순결한 총각이 성적으로 여자에게 유혹을 받는 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희생물로서의 자격과 자질이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펠리페는 선택된 희생제물인 것이다.

     구저택은 콘수엘로의 시공간이다. 수많은 상징들은 이질적 시공간이라는 계열축(eje paradigmático)을 형성한다. 저택 내부의 어둠은 지하세계나 무의식 세계로의 ‘하강’을 의미하고 있다. 주된 식사는 죽은 동물의 콩팥요리, 핏빛 포도주 등등은 ‘흑마술’의 공간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질적 시공간의 계열축을 형성하는 상징들을 살펴보면, 청동 개의 문고리는 지하세계를 안내하는 개를 상징한다. 개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순간의 동반자이며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와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13 발걸음’과 ‘22의 계단’을 통해 나타나는 숫자의 상징도 있다. 13은 죽음과 재생의 숫자로서 펠리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고 있다. 2+2인 22는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직선적 시간의 진행을 나타낸다. 13과 22를 함께 배열함으로서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아우라』에서 모든 행위의 동인(動因)은 욕망이며 사랑이다. 수많은 에로티시즘의 상징들은 그물망처럼 얽혀 욕망이라는 계열축을 형성하고 있다. 먼저 지배적인 색인 녹색을 살펴보자. 아우라와 콘수엘로의 녹색의 눈 그리고 녹색의 옷은 무엇보다도 음탕한(obsceno) 육욕(肉慾)을 코드화하고 있다. 녹색은 비밀을 감추는 색이며, 사물과 운명에 대한 깊이 감춰진 지식을 상징한다. 또한 타락하기 전의 루시퍼의 돌의 색이기도 했던 녹색은 사악한 힘을 지닌다. 빨간 색과 녹색은 사랑의 신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토끼의 빨간 눈과 녹색의 눈 그리고 옷은 텍스트의 에로티시즘을 코드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토끼 역시 부드러운 이미지의 아날로지를 통해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고 있으며 또한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를 나타낸다(Corominas). 중국에서는 음양을 결합하는 제3의 요소로 등장하기도 하고 반대적 요소를 결합하는 상징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달의 여신, 헤카테(Hecate)과의 관계로 토끼는 출생과 산출의 상징이며 도덕과 비도덕이 결합된 양가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고양이 또한 여성의 음부를 상징한다. 펠리페 방 뒤에 존재하는 정원은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는 동시에, 칼 융(K. Jung)에 의하면 내실(內室)정원은 꿈꾸는 사람의 잃어버리거나 망각된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들은 이질적이며 반대적인 요소들의 결합으로서의 섹스(sex)를 코드화하고 있다. 『아우라』에서의 성행위는 과거와 현재의 결합과 욕망을 실현하는 정점이다.

     거울의 상징을 통해 변신과정은 더욱 더 보강된다. 거울 역시 3중구조를 지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거울은 점차적으로 펠리페가 정체성을 인식해 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으며 3번째 거울에서 펠리페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훔쳐 낸 서류 속에 끼워진 사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인 것이다. 이렇게 푸엔테스에 있어 거울은 감춰진 정체성을 폭로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이와 같이 상징들은 펠리페 몬테로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고하고 있으며 『아우라』의 전체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아우라』는 철저하게 계획된 상징들의 연쇄그물로 이루어진 텍스트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IV. 욕망의 구조

     『아우라』의 서술구조를 움직이게 하는 동인은 욕망(deseo)이다. 현실공간에서는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욕망은 대상을 추구하고 대상이 완전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리라고 믿고 다가섰는데 그 대상은 ‘흘러넘침’이어서 늘 차액이 남는다. 그 차액 때문에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고 남아서 다시 대상을 추구하게 된다. 욕망은 살아있는 한 충족되지 않는 결핍이다. 욕망은 완전한 충족을 모르기에 삶은 지속된다. 역으로 말하면 현실에서 욕망은 늘 좌절된다.

     현실세계에서 주체는 대상을 욕망하지만 대상이 직접 주체에 의해 추구되지는 못하고 늘 주체의 욕망은 매개된다. 비자발적 욕망의 구조는 욕망주체와 그 대상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직선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 주체로 하여금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유발하는 제삼자로서의 타자가 존재하는 삼각형적인 구조이다. 이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 타자는 욕망의 모델인 동시에 대상과 주체를 연결시켜주는 중개자(仲介者)가 된다. 이런 욕망의 구조는 직선적인 2항구조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 중개자가 들어있는 3항구조가 되는데, 이를 가리켜 지라르는 ‘삼각형적인 욕망’ 혹은 ‘중개된 욕망’, ‘모방된 욕망’이라 명명하고 있다.

     펠리페의 욕망의 대상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완전한 사랑이며 이 사랑은 아우라로 매개되어 있다. 하지만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환영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아우라와 가진 3번의 성적결합은 아우라가 콘수엘로로 동일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첫 번째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공기와 같은 아우라와 관계를 가진다.


별도 없는 밤, 어둠 속에서 넌 그 여인을 볼 수는 없어도, 그녀의 머리에서 풍겨나는 앞뜰 화초의 향기와 더불어 그녀의 품안에서 마냥 부드럽고 뜨겁게 널 갈망하는 피부를 느끼면서 그녀의 젖가슴, 그 가슴의 민감한 핏줄로 뭉친 꽃봉오리를 애무한다.


     두 번째는 육화(encarnación)되어 가는 아우라와의 관계이다. 아우라가 실존의 무게를 획득하는 것은 결국 콘수엘로와 동일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은 두 명의 존재 아우라와 콘수엘로가 존재한다. 또한 이 두 번째의 관계는 마지막 의식을 위한 제단이다. 아우라가 건네주는 밀가루 반죽 쪼가리를 받아 그녀와 함께 삼키는 펠리페의 행위는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성체식이다. 아직 이 단계는 펠리페에게 아우라는 모방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단계이다.


아우라의 입술을 갈망하는 너의 허기진 키스는 그 멜로디를 질식시키고, 그녀의 어깨와 젖무덤에 갑자기 키스를 퍼부어 너는 춤을 멈춰 놓는다. 네 손에 그녀의 가운이 들려있다...(중략)...그리스도처럼 침대의 양옆으로 길게 뻗은 팔 위로, 그녀의 벌거벗은 몸 위를 너는 덮친다...(중략)...어둠 속에서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는 주름진 손을 어루만진다...네가 전혀 보지 못했던 소파에 콘수엘로 부인이 앉아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콘수엘로 부인이 아우라와 동시에 함께 네게 미소를 보낸다. 둘이 감사하며 네게 미소를 짓는다.



     3번째이며 마지막인 관계에서는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잔영임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아우라는 완전히 실존의 무게를 획득하는 순간 사라지고 늙은 콘수엘로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부드럽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그녀의 말라빠진 젖가슴을 더듬다가 넌 깜짝 놀라 얼굴을 들어 달빛이 스미는 벽의 균열을 찾는다. 쥐가 뚫어놓은 벽의 틈새, 벽의 눈을 통해 스며들어온 은빛은 아우라의 흰 머리칼 위에, 양파껍질처럼 층층이 쭈그러지고 창백하게 메마른, 마치 삶은 살구처럼 주름진 아우라의 얼굴 위에 쏟아지고 있다.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계획하고 의도한 욕망의 구조 속에서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며, 그 욕망 또한 매개되어있기 때문에 지라르가 낭만적 거짓이라고 비판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콘수엘로의 욕망은 매개되어 있지 않다. 욕망의 대상인 요렌테 장군의 회귀를 위해 펠리페를 매개체로 이용하지만, 펠리페와 요렌테 장군을 동일화시킴으로서 콘수엘로 욕망은 매개항이 제거된 직선적인 2항구조가 된다. 즉 콘수엘로의 욕망은 매개화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상을 추구한다.




    이러한 욕망의 2항구조는 현실적 공간이 아닌 신화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콘수엘로는 이러한 신화적 공간에서 욕망의 대상을 육화(encarnación)시키기 위해 희생제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앞서 논의한대로 펠리페의 욕망은 신화적 공간에서조차 매개항의 부재로 인해 좌절된다. 하물며 세속적 공간에서의 욕망은 어떠하겠는가. ‘진정한’ 역사가가 되고자하는 그의 세속적 욕망은 회고록을 정리하는 역사가라는 매개를 통해 추구되지만, 그 회고록은 결국 자신의 자서전으로 변모되면서 객관적 역사가의 욕망은 좌절되고 만다. 결국 펠리페는 타인 즉 콘수엘로의 욕망의 매개로, 그리고 종국에는 욕망의 대상, 요렌테 장군이 되고 마는 것이다. 펠리페라는 한 주체는 완전히 소멸된다는 점에서 『아우라』가 환상적 괴기소설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펠리페는 콘수엘로의 무의식의 표출인 피동적 주체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욕망이 육화된 모습이며 펠리페는 자신의 남편, 요렌테 장군에 대한 기억의 현존인 것이다.


V. 나오는 말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아우라』에서 현실에서 살고 죽기를 거부하는 한 늙은 여인의 악마적 상상력에서 이상화되고, 창조되고, 꿈꾸어진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펠리페는 아우라가 콘수엘로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부정한다. 그러나 자신 역시 콘수엘로가 추구하는 욕망의 매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립적인 현실과 환상의 결합은 현실적 공간이 아닌 신화적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신화는 극단적으로 대립된 두 양극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상상적 매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내의 수많은 상징들은 우리가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반대적인 요소들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아우라는 동일한 의미구조에 속하는 상징들로 구성된 계열축(el eje paradigmático)과 그러한 계열축의 배열로 구성된 통합축(el eje sintagmático)으로 짜여져 있다. 이미 늙어 죽은 요렌테가 젊은 펠리페를 통해 현실 공간으로 복귀한다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콘수엘로의 욕망의 힘이다. 이 욕망의 힘이야말로 세속적 공간을 신화적 공간으로 변하게 하는 절대적인 동인인 것이다. 현실적 공간에서 이질적인 타자들 간의 결합은 불가능하다. 즉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 신화적 공간에서만 이들 타자들간의 결합은 가능하고 욕망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콘수엘로가 다시 젊음을 획득하고 죽은 요렌테 장군이 부활하는 것은 소설이 각각의 독서행위로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과 동일하다. 콘수엘로가 주술사이며 마녀인 것처럼 작가 또한 독자에게 주술을 거는 우화의 창조가인 것이다.

     요렌테 장군의 회고록을 재해석해서 구성해 내는 펠리페의 행위는 텍스트를 해석해내는 독서행위와 동일하다. 텍스트는 언제나 독서행위에 의해 열리는 열린 공간이며 또한 독서를 통해서만 일시적으로 종결될 수 있는 역설적인 비종결구조를 지닌다. 즉 매번의 독서행위를 통해서 텍스트는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아우라』에서 독자는 마법사이다. 세상에 마술을 걸어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마술의 과정은 독서행위를 통해 매번 새로운 텍스트의 의미를 창출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