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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키호테』의 부분적 마술 / 보르헤스 2003-10-22 / 3533   

『돈키호테』의 부분적 마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박병규 옮김



     이런 견해는 언젠가 그리고 어쩌면 수없이 많이 논의되었을 법하다. 나의 관심은 참신한 견해보다는 진실일 수 있는 견해이다.

     『돈키호테』는 다른 고전(『일리어드』, 『에네이다』, 『파르살리아』, 단테의 희곡,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희극)과 비교하면 사실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주의는 19세기 사실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조셉 콘래드는 소설을 쓰면서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했다. 초자연적인 것을 인정하면 일상적인 것이 경이롭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이러한 직관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돈키호테』를 보면 시적 상상력의 세계와 산문적 현실 세계를 대립시키고 있다. 콘래드와 헨리 제임스는 현실을 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현실을 소설화했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에게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은 반의어였다. 세르반테스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에 등장하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지형 대신에 카스티야 지방의 먼짓길과 지저분한 여관을 선택했는데, 이는 현대의 어느 소설가가 패러디적 의미에서 나프타를 공급하는 화물역을 강조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기에 세르반테스는 17세기 스페인에 대한 시를 창조했지만 그가 보기에 17세기나 당시의 스페인은 시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세르반테스는 회상에 젖어 만차 지방을 바라보는 우나무노, 아소린, 안토니오 마차도 같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기사 로망스를 논박하는 작품을 구상했기 때문에 작품 속에는 경이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이적인 것을, 적어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해야만 했다. 마치 탐정소설을 패러디하는 작품에서도 미스테리와 범인이 등장하듯이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부적이나 점(占)을 사용할 수는 없었으나 초자연적인 것을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그리고 그로 인해 더욱 효과적으로, 암시했다. 내면적으로는 초자연적인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1924년 그루삭(Paul Groussac)은 이렇게 말했다. “세르반테스는 라틴어와 이태리어를 귀동냥 정도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문학적 원천은 주로 전원 로망스와 기사 로망스와 재미난 포로생활 얘기였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허구들에 대한 해독제라기보다는 은밀하고 향수에 젖은 결별에 더 가깝다.

     사실 소설이란 모두 이상적인 설계도이다. 세르반테스 경우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독자의 세계와 책의 세계를 즐겨 뒤섞었다. 이발사의 말안장을 노새 안장이라 하고 세숫대야를 투구라고 우기는 여러 장(章)에서 이 문제는 명백하게 드러나며, 앞서 언급한 다른 곳에서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1권 6장을 보면, 신부와 이발사는 돈키호테의 서재를 조사하는데 놀랍게도 세르반테스가 쓴 『갈라테아』도 꽂혀있다. 이발사는 세르반테스의 친구이지만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시보다는 불행에 더 익숙한 사람이며 『갈라테아』는 다소 기발한 점도 있고 또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지만 도대체 결론이 없다고 말한다. 세르반테스의 꿈, 다시 말해서 꿈의 형태에 불과한 이발사는 세르반테스를 평가하고... 1권 9장 모두(冒頭)에서 『돈키호테』는 아랍어를 번역한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또한 놀라운 일이다. 세르반테스가 톨레도 시장에서 원고를 입수해 무어 사람에게 번역을 부탁했더니 이 사람이 한달 반 이상을 집에 틀어박혀 작업을 끝냈다고 한다. 여기서 칼라일 생각이 난다. 칼라일은 『의상철학』이 토이펠스드렉 박사가 독일에서 출판한 작품의 일부인 것처럼 위장했다. 또 카스티야 출신의 랍비 모이세스 데 레온(Moisés de León)은 『조하르, 광휘의 책』(Zohar)을 쓴 다음, 이 책이 3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어느 랍비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상한 모호성의 놀이는 『돈키호테』 2권에서 절정에 이른다. 2권의 주동인물들은 1권을 읽은 사람들이다. 『돈키호테』의 주인공들이 바로 『돈키호테』의 독자들이다. 셰익스피어도 『햄릿』 속에 연극 장면을 삽입했는데, 이 연극은 비극으로 『햄릿』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주 작품과 이차적인 작품이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삽입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미약하다. 세르반테스의 기법과 유사하면서도 더욱 놀라운 것은 라마의 무훈과 악마와 전쟁을 노래한 발미키의 시, 『라마야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 라마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밀림으로 들어가 숨는다. 여기서 어느 은자가 라마의 자식들에게 읽기를 가르친다. 놀랍게도 이 스승이 바로 발미키이고, 공부하는 책은 『라마야나』이다. 라마는 말을 희생물로 바치도록 명령하고, 발미키는 제자들과 함께 이 축제에 참가한다. 현금 반주에 맞춰 이들은 『라마야나』를 노래한다. 라마는 자기 얘기라는 것을 알고 자식들을 알아보며, 마침내 시인에게 보상한다... 우연은『천일야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환상적인 이야기의 모음인데,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또 덧붙여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중심 이야기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수많은 부수적인 이야기로 가지를 친다. 하지만 현실성의 등급을 조정하지 않아 그 효과는 (그랬더라면 틀림없이 심오한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양탄자처럼 표면적이다. 『천일야화』 서두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왕은 처녀와 결혼식을 올린 날 밤 침실에서 목을 자르기로 무지막지한 맹세를 하고, 사라자드는 이야기로 왕의 환심을 사려고 결심한다. 마침내 천 하루 날이 지나 왕에게 왕자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집대성한 사람들은 천 한 개의 이야기를 완결짓기 위해 갖가지 이야기를 삽입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술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602(DCII)째날 밤의 이야기만큼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이야기는 없다. 이 날 밤 왕은 왕비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의 첫 부분은 『천일야화』의 다른 이야기는 물론 이 이야기 자체까지 ―괴상하지만― 포함하고 있다. 독자는 이러한 삽입이 초래하는 엄청난 가능성, 그 야릇한 위험을 명확하게 파악했을까? 한마디로, 왕비는 영원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왕은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서 『천일야화』의 한 토막에 해당하는 이야기, 이제는 무한하고 순환하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창조물은 예술적 창조물만큼 환상적이다. 로이스(Josiah Royce)는 『세계와 개인』(1899) 1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영국의 어떤 지역을 완벽할 정도로 평평하게 고른 다음 지도 제작자가 그 위에 영국 지도를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그 지도는 완벽하기 때문에 영국 땅의 세세한 부분까지 그 지도 ―축적이 얼마이든 간에― 에 등재되어 있다. 영국 땅의 모든 것이 그 지도와 대응한다. 이런 경우 그 지도는 지도 속에 지도를 포함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왜 우리는 지도 속에 포함된 지도와 『천일야화』의 천일야화 이야기에서 불안을 느낄까? 왜 우리는 돈키호테가 『돈키호테』의 독자가 되고 햄릿이 『햄릿』의 공연자라는 사실에서 불안을 느낄까? 나는 그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전도(顚倒)가 암시하는 바는, 허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독자가 되거나 공연자가 될 수 있다면 그 허구의 독자나 관람자인 우리도 허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1833년 칼라일은, 세계사는 모든 사람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한 권의 무한하고 신성한 책이며, 그 책 속에서 사람들은 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