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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와 세르반테스 / 푸엔테스 2003-10-22 / 3610   

에라스무스와 세르반테스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 박병규 옮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처럼 구세계와 신세계라는 두 세계, 르네상스라는 흐름과 반종교개혁이라는 역류라는 두 조류에 휩쓸렸던 사람이다. 세르반테스는 침몰하지 않기 위해 에라스무스라는 배에 승선했다. 그런데 이 배는 광인선(狂人船)이 아니었을까?

     에라스무스가 스페인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데는 까닭이 있다. 당시 스페인 지식인들은 이성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 그리고 새로운 이성과 옛날 이성을 초월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에라스무스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최후의 보편인(hombre universal), 적어도 보편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세르반테스는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Juan López de Hoyos)라는 스페인 에라스무스주의자의 제자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세르반테스는 어느 곳에서도 에라스무스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에라스무스의 저서를 읽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내 견해로는, 세르반테스가 에라스무스를 입에 담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톨레도의 주교 폰세카와 세비야의 주교이자 최고위 종교재판관이었던 만리께는 스페인 에라스무스주의를 지지했는데, 이 때는 카톨릭 교회가 스스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전쟁과 트리엔트 종교회의 이후, 카톨릭 교회는 과거 에라스무스주의자들의 경박함을 소리 높여 한탄했으며, 서구에서 스페인만큼 격렬하게 에라스무스에 반대했던 나라도 없었다.

     세르반테스와 에라스무스의 관계는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관계가 있다― 레판토 해전의 외팔이 세르반테스가 에라스무스를 언급하지 않은 까닭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에라스무스주의적인 세 가지 주제, 즉 진리의 이중성, 외관의 환영, 광기 예찬이 『돈키호테』의 핵심을 차지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세르반테스도 그렇지만, 이해하는 것은 믿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성은 겉모습(外觀)으로 사물을 판단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라스무스는 『광기 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간의 일은 두 가지 측면,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실레노스 상자처럼 상이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언뜻 보면 죽어있는 것 같지만 [...] 자세히 관찰해보면 살아 있다.


    이어 이렇게 덧붙인다.

만물의 참모습(reality)이란 의견에 의존할 뿐이다. 인생에서 모든 것은 너무 불분명하고, 너무 다양하고, 너무 상반되므로, 우리는 그 어떤 진리도 확신할 수 없다.


     이어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논리에 희극적인 색채를 부여한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주피터는 청춘의 여신 유벤타스를 출산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으로 변장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희극적 정신은 진리의 이중성이라는 이단적 비전을 드러내는데, 세르반테스는 이를 채택하여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라는 인물을 창조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산초 판사는 특수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기사는 믿지만 종자는 의심하고, 각자의 겉모습은 상대의 참모습 때문에 불분명해지거나 또는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산초는 현실적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의 몽상적 세계에 참여한다. 돈키호테는 몽상적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산초의 순수한 현실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상사(思想史)에서 가장 찬란한 역설 가운데 하나는 “신성한 이성”을 사랑하던 시대에 에라스무스가 『광기 예찬』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에라스무스의 광기에는 나름의 ‘방법서설’이 있다. 흡사 이성이 에라스무스에게 다음과 같은 다급한 경고를 하는 것과 같다. 즉, “에라스무스 당신은 나 이성을 과거의 신앙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내 이성의 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에라스무스의 광기는 이중의 비판 작용이다. 중세적 질서가 요구하는 진리로부터, 가짜 절대성으로부터 광기를 분리시키는 한편 근대적 이성에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나중에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광인이므로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광기일 것이다. 이성이란 광기의 또 다른 회전이다.”

     이성이라는 나사가 이처럼 회전한다는 사실이 바로 에라스무스가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즉, 이성이 이성적이려면 자신을 아이러니칼한 광기의 눈으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비판적 보완인 광기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되며, 개인이 자신을 긍정하려면 자아에 대해 아이러니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오만과 유아론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난파할 것이다.

     두 문화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는 에라스무스의 광기는 두 문화의 절대성을 상대화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에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광기이면서, 동시에 이성의 심장부에 위치한 광기이기도 하다. 에라스무스의 광기는 인간이 인간을 의심하는 것이고 이성이 이성을 의심하는 것이지, 하느님이나 악마나 죄가 인간과 이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칼하고 비판적인 광기의 작용으로 인간은 상대화되며 운명과 신앙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절대적 주인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이상과 같은 에라스무스 사상의 동기가 되었던 정신적 현실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아마도 근대성이라는 용감한 신세계의 불확실한 이성과 중세의 확실한 진리 사이의 심연에서 고뇌하고, 주저하고 의심했던 최초의 인물은 단순하면서도 무한한 세 단어를 발설했던 햄릿일 것이다. 이 단어란 “말(words)... 말... 말...”이다. 이 말이 우리를 뒤흔들고 창처럼 찌르는 것은, 자기 존재의 본질에 대해 반성하는 허구적 인물의 말이기 때문이다. 늙은 폴로니우스(역주. 햄릿의 계부)는 안절부절하고, 음모를 꾸미고 충고한다. 마치 연극의 세계가 현실 세계인 것처럼 행동한다. 말은 행동으로 변하고, 언어는 칼로 변하며, 폴로니우스는 햄릿의 말, 즉 문학의 칼에 찔린다. 말, 말, 말이라고 햄릿은 얘기하지만 경멸적인 의미는 아니다. 햄릿은 아무런 환상도 가지지 않고 그저 단순히 문학의 존재를 가리킬 뿐이다. 그러면 이 문학은 어떤 종류의 문학인가? 어쩌면 문학은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돈키호테와 햄릿은 새로운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증인들이다. 이 문학은 더 이상 하느님 말씀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사회적․신적 질서만큼 확실하고 일관성 있는 인간적 질서를 반영하는 기호가 될 수도 없었다.

     『돈키호테』, 『리어왕』, 『멕베드』가 1605년이라는 같은 해에 출판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늙은 광인 두 사람(역주. 돈키호테와 리어왕)과 젊은 살인자 한 사람(역주. 멕베드)이 동시에 나타나서 정신착란적인 상상력으로 이행기(移行期)의 세계사 무대를 채웠다. 그리고 『멕베드』가 의문문의 희곡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맨 처음 “우리 셋이 언제 또 만날까?” 하고 의심하는 마녀들의 말부터 시작해서 멕베드가 왕을 살해할 작정을 하면서 “왜 [...] 내 칼로 죽여야하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나 살인을 하고 난 뒤, “내 눈앞에 보이는 이것이 단검인가?” 그리고 “바다의 신 넵튠의 사해 바닷물이면 이 손의 피를 깨끗이 씻을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도 까닭이 있다.

     의문부호 사이에서 현상태의 세계는 해체된다. 그리고 저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이라는 말은 허깨비같은 인간 존재들이, 다시 말해서 소문과 분노만 가득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천치같은 작가들이 세계라는 위대한 연극무대에 입장하고 있음을 알린다.

     또한 『리어왕』의 위대한 비유가 언제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우주로부터 파생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우주에서 일식, 월식, 성좌, 하늘의 강제라는 어리석음, 행성의 영향이라는 거짓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성좌는 제자리를 잃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지상적 요소의 이미지와 ―비와 불, 파도와 천둥의 드라마― 혼합된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합리적인 요소들보다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 우주의 중심에서 버림받은 늙은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밖에 이해할 수 없으며, 고독하고 흐느끼는 자연과 다를 바 없는 정열의 희생자이다. 마치 우주가 중심이 없기 때문에 불가해하고, 사슬에서 풀려난 자신의 힘 때문에 희생되었듯이.

     최초의 말, 떠도는 말, 고아가 된 말인 우리는 아버지를 잃어버렸으나 그렇다고 우리들 자신을 만나지도 못했다. 세계 전체가 무대이고 이 무대에서 발설된 말은 진정 소문과 분노로 가득차 있다. 말은 모호성과 역설의 수단으로 변한다. 피치노의 얘기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존 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의문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의 요동 한가운데서 문학은 불투명한 영역으로 나타난다. 이 불투명한 영역 가운데 햄릿의 조직적인 광기, 로빈슨 크루소의 낙관적 합리주의, 돈환의 세속적 에로티즘, 산 후안 델라 크루스의 천상적 에로티즘이 동일하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중세의 우주에서 각각의 현실은 다른 현실을 표현했다. 오류가 없다고 공인된 상징에 따라 표현되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불안정한 세계, 오류의 세계에서 이러한 기준은 사라졌다.

     만물은 조화를 잃어버렸다. 해방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주장이 제기되던 그 순간, 개인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우주의 잠재적인 힘을 해방시켰던 바로 그 비판에 의해, 의심에 의해, 질문에 의해 파편화되었다. 또 우주가 확장됨으로써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한 개인은 열정을 분출했고, 자존심을 옹호했고, 인정사정없이 권력을 휘둘렀고, 새로운 태양의 도시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었고, 시간에 집착했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상상력에 매달렸으며, 침묵을 지키는 우주 공간과 대조되는 새로운 인간적 공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욕심은 아메리카의 발견에서도,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피치노는 아무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심오한 힘의 무시무시한 형태에서부터 신비주의자가 기술한 신성한 지성의 위계질서에 이르기까지 각 차원을 포함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부정하는 가능성이란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능성일 뿐이다. 방탕한 인간과 고행자, 돈환과 사보나롤라, 보르지아와 코르테스(Hernán Cortés), 폭군과 모험가, 말로우의 파우스트와 존 포드 극작품의 근친상간적 애인, 반란하는 사상과 반란하는 육신에서 보듯이 이제 결핍은 과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 이성, 쾌락, 권력과 같은 자족적인 원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은 승리를 얻자마자 비판에 의해 의심받는다. 왜냐하면 비판이 이러한 원리를 수립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