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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키호테』에 나타난 문학과 삶 / 릴리 2003-10-22 / 6090   

『돈키호테』에 나타난 문학과 삶

릴리(Edward. C. Riley) / 박병규 옮김


진정한 영웅은 시인이다.
영웅이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시가 없는데
영웅적 행위를 할 수 있을까?
― 우나무노




I.

     문학과 삶의 상호작용은 『돈키호테』의 근본적인 테마이다. 물론 문학이론이 『돈키호테』의 주제는 아니다. 『돈키호테』를 극화된 논문이라고는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돈키호테』를 고찰하는 것은 유용하다. 이러한 작업은 문학 이론뿐만 아니라 때로는 익살스럽고 당혹스럽고 또 복잡한 게임이나 장황한 사담(私談)처럼 보이는 세르반테스의 기법과 동기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같은 문제는 자칫 끝없는 철학적 논의를 유발할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에 한정하겠다. 『돈키호테』가 제기하는 인식론적 의문들 역시 소설가 세르반테스가 깊은 관심을 가졌던 문학적 문제였다.

     문학적 허구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는 작품에 표명된 목적과 가장 기초적인 주인공에 대한 개념에서 나타난다. 아무리 저자가 자신의 목적을 초월한다고 할지라도 세르반테스가 선언한 목표는 기사로망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그는 삶과 문학적 허구를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 모험가가 생각하고 보고 상상하는 것은 모두 책에서 읽은 것과 똑같이 발생하고 행해지는 것처럼 보였다.(I, 2)


    그러므로, 토파닌(Toffanin)이 맨처음 지적한 것처럼, 2권 3장의 역사(실제 사건)와 시(허구)에 대한 토론은, 이와 유사한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핵심을 드러낸다.

     기사로망스를 비판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소설 내에서 다소 직접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허구로서 평가하는 방법이다. 허구의 형식에 대한 관례적인 비평은 패러디이다. 그리고 『돈키호테』는 어느 면에서 패러디이지만 패러디 대상을 중요한 요소로 작품 내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기사로망스는 로시난테나 이발사의 세면 대야와 마찬가지로 『돈키호테』라는 책 속에 존재한다. 기사로망스는 너무도 생생하게 현존하므로 몇몇은 불에 태워질 수도 있다. 세르반테스의 독창성은 기사로망스로 세르반테스 자신을 (또는 그저 우연히) 패러디했다는 것이 아니라 미친 기사가 기사로망스를 모방하고, 이 소설을 문자 그대로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기사로망스를 패러디했다는 데 있다.

     돈키호테의 망상은 기사로망스와 관계가 있으나 이보다 더욱 본질적인 특성은 책벌레적인, 우화적(寓話的)인 속성이다. 돈키호테가 부활시키려고 했던 기사의 황금시대는 실제 중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 시대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단지 상상의 이야기책에 나오는 “옛날 옛적”이었다. 역사가 허구와 합쳐져 전설처럼 아득해졌을 때만이 비로소 역사는 돈키호테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세르반테스는 “스페인 기사도를 일소(一笑)에 붙여버렸다”는 바이런의 어리석은 논평은 역사와 문학을 혼동한 것으로 미친 기사가 문학과 삶을 혼동한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돈키호테의 유토피아적이고 메시아적인 이상은 작품 결말에 이르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할지 모르겠으나 1권 1장에서 세르반테스가 얘기한 바에 따르면 애초에 돈키호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황당무계한 기사로망스였다.


돈키호테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온갖 마법, 언쟁, 전투, 도전, 부상, 구애, 사랑, 고뇌, 기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일들로 가득 찼다.(I, 1)


    1752년 레녹스 여사(Mrs. Lennox)는 영웅 로망스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린 부인의 얘기를 담은 『여성 돈키호테』를 출판했고 어느 현대판 세르반테스는 공상과학소설에 푹 빠진 20세기 돈키호테쯤은 쉽게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통속 로망스의 독자인 돈키호테는 엠마 보바리와 조이스 작품의 게티 맥도웰(Gertie McDowell)의 조상이다. 돈키호테가 이들 인물과 다른 점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터무니없는 허구 형식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키호테는 기사로망스의 영웅들을 완벽하게 모방함으로써 문학적으로 살려고 시도한다. 기사로망스를 막연히 흉내내지도 않으며 편력기사의 습관, 행동양식, 의상을 무작정 모방하지도 않는다. 성 이나시오 로욜라하고는 달리, 돈키호테는 기사도의 이상을 단순히 다른 대의에 적용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의미로 기사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돈키호테는 우화[이야기] 세계 전체가 ―기사, 공주, 마법사, 거인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일단 자신이 실제로 편력기사이며 허구 세계가 사실이라고 믿게 된 돈키호테는 완벽한 흉내내기의 절정에서 물러나 광기로 빠져든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우화 세계 바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문학을 살고자 노력한다.

     돈키호테가 선택한 문학은 극도로 허구적이고 저질적인 서사시 형식이다. 그리고 돈키호테는 이상화되고 초인적인 기사로망스의 영웅이다. 돈키호테는 고난과 위험을 통해서 명예와 영광을 성취하려는 서사시적 열망과 봉사라는 기사도의 이상 그리고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만들려는 영웅적 충동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자신의 존재를 벗어버리고 정화된 시의 영역에서 살고자 애를 쓴다(이처럼 고군분투하는 인물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이야기 자체가 시적 허구이므로 ―즉 작품에서 말하는 “인생”이라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창조물이므로― 여기서 우리는 『돈키호테』의 복잡성의 일부를 보고 있다). 돈키호테는 살아가는 동안에 삶을 예술로 만들려고 시도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어떤 것보다 이상적인 예술은 선택을 의미하는데 한 인간이 경험하는 온갖 편린을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은 별개의 것이지만 그 차이가 무엇인가는 세르반테스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또 매료시켰던 문제였다. 기사란 시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시를 살고자”하는 에피쿠루스의 현자와 같은 존재라면 문자 그대로 예술을 살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노력은 미친 짓이다. 우나무노(Unamuno)는 넓은 의미의 영웅심과 시를 동일시했지만 이는, 이들 단어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문자 그대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제 돈키호테가 실제적이고 확실하게 기사로망스를 모방하는 방법은 익히 알려진 예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예컨대, 로망스를 쓰는 것―이다. 사실 돈키호테는 처음에 이를 시도한다. 돈키호테는 여러 차례 미완의 소설 『그리스의 돈벨리아니스』를 완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며 “만약 좀더 중요한 생각에 골몰하지 않았더라면”(I, 1) 돈키호테는 그 일을 해냈을 것이고 또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기사로망스에 너무도 완벽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펜을 잡는 대신에 칼을 쥐게 되었다.

     돈키호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지니고 있는 예술가이다. 그의 첫째 매체는 행동이며 그 다음이 말(言語)이다. 의식적으로 책을 살아가고 현명한 마법사가 기록에 남기도록 행동할 때 돈키호테는 어느 의미에서 자신의 전기를 쓰는 저자이다. 관습적인 문학적 표현, 즉 기사로망스를 쓰겠다는 생각을 포기했을 때조차 돈키호테는 여전히 작가의 특성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는 때때로 시를 짓고 기사로망스의 고풍스런 언어를 모방한다. 모험을 나서는 돈키호테는 자신의 행적을 기록하는 연대기 작가를 앞질러 출발 장면을 언어 형식으로 옮겨놓는다―화려하고 고상한 돈키호테의 언어는 실제 작가가 사용하는 문체와는 대조적으로 장려하고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1권 21장과 1권 50장에 나타나는 돈키호테의 환상 그리고 양떼와 벌인 전투에 대한 묘사는 눈부신 짜깁기(pastiches)이며, 터무니없기로는 이에 영감을 준 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돈키호테는 수차례에 걸쳐 문학에서 자극을 받는다. 시에라 모레나 산맥에서 카르데니오의 시를 발견한 돈키호테는 이내 모방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카르데니오가 『아마디스 데 가울라』를 언급하자 이를 빌미로 돈키호테는 이야기에 간섭하고 마침내는 곤란한 지경에 이른다. 가이페로스와 멜리센드라의 사랑을 주제로 한 꼭두각시 극을 보고는 별안간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돈키호테의 예술적 본능은 ―비록 이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지만―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돈키호테는 많은 노력을 들여 출발 준비를 한다. 능숙한 작가처럼 오랫동안 숙고한 후에 이름을 짓는다. 시에라 모레나 산에서 고행할 때처럼 주변 여건이 마음에 흡족할 경우에는 사소한 것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강렬한 관심을 쏟는다. 이것이 행동하는 예술이다. 비록 이 역시 광기일지라도. 그러나 예술을 실생활에서 실천한다는 생각은 세르반테스 시대에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카스틸리오네 작품이 담고 있는 가르침은 완벽한 궁정 생활은 참다운 예술 작품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작가와 변별되는 세르반테스만의 특징은 예술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충동이라고 말해도 ―이 충동은 영웅심 자체의 동력(動力)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아마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인 형태로 실현된 스페인 예술은 춤과 투우인데 여기서 양식화는 즉흥성과 결합하며 작가는 배우와 결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돈키호테는 기사도 모델이 요구하는 관례적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삶의 여러 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돈키호테는 자신이 영웅인 이야기를 창조한다. 차이점은 인생은 길고 춤은 짧다는 것이며, 세계를 투우장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자신의 삶을 한편의 서사시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충동은 무용수와 투우사가 동작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충동과 다르지 않다.

     불행하게도 돈키호테는 서툰 예술가이며 실패한 예술가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지극히 다루기 어려운 소재인 삶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한다. 돈키호테는 희극적 패러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예술가이므로 모종의 예술 원리를 자신의 행동에 적용하기도 한다. 이런 이상한 관계에서 세르반테스가 그러한 예술 원리를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애초에 쓰려고 했던 것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돈키호테』와 같은 소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다. 다른 경우를 보면 세르반테스는 분명히 예술 원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문학적 허구와 ‘현실’ 경험이 그처럼 기묘하게 결합하는 곳에서 문학 이론의 이상한 적용을 발견하는 것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논의하겠다.


II.

     『돈키호테』는 다양한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 소설이다. 세르반테스는 작가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독자와 인물의 관점에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본다. 이는 마치 세르반테스가 거울이나 프리즘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 것과도 같다. 일종의 굴절 과정을 통해 세르반테스는 작품에 부가적 차원을 부여한다―또는 부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세르반테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지만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극중인물의 시각을 통해 행동을 기술함으로써 현대 소설가들의 기법을 예고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사실”이거나 “삶”이다. 세르반테스는 베넨헬리(Cide Hamete Benengeli)라는 가상의 연대기 작가를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허구가 역사인 체 한다(나중에 알게되겠지만 이는 의심스러운 역사이다). 이 역사 속에 다양한 장르의 허구가 삽입된다. “어리석은 호기심”이라는 중편소설(novela)이 한 예이다. 이와는 다른 종류의 예로는 도로테아의 '역사적' 에피소드에 엉터리없는 얘기를 가미한 미코미코나 공주의 일화이다. 도로테아 일화는 돈키호테에 대해 베넨헬리가 서술한 역사의 일부이며, 베넨헬리의 역사는 『돈키호테』라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허구이다. 여기서 예를 더 든다면 갈피를 잡기 어려워진다. 물론 이야기와 역사는 다같이 환상, 꿈, 전설, 속임수, 오해 등을 포함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명백히 문학적이다. 작품 속에 유령 같은 기사들이 현존한다는 것은 돈키호테와 산초를 형상화하는 효과와 아울러 두 인물의 행동이 대조됨으로써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지닌다. 세르반테스는 소설 속에 외양(外樣)을 갖춘 세계와 함께 상상력의 세계 ―이는 마음속에는 물론 책 속에도 존재한다―를 포함시킴으로써 단숨에 산문 허구의 범위를 무한정 넓혔다.

     만약 독자가 저 유명한 기사 돈키호테와 종자를 동행하는 제정신이 박힌 여행자라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돈키호테』 통일성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이때 카르데니오, 레안드라, 클라우디아 헤로니마를 비롯한 여러 문학적 일화, 즉 여담(또는 삽입된 이야기)은 돈키호테가 상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돈키호테를 위해 꾸며낸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되는 참다운 모험으로 나타난다. 이들 여담은 여담의 주동인물들에게는 진실이며 외부의 독자에게는 일어날 수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여담의 주동인물과 외부 독자에게 이 여담은 진기한 사건, 즉 모험이다. 좀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여담에 대한 돈키호테의 반응 그리고 사건에 참견할 경우 개입 정도는 여담의 성격과 돈키호테의 정신상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러한 외적 사건과 돈키호테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본질적인 어떤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예외는 “어리석은 호기심”이며 또 다른 가능한 예외는 포로 얘기인데 세르반테스 자신은 이 두 일화를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여담은 목가소설적 사건의 도입으로 복잡해진다. 이 목가소설적 사건은 성질상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책에서나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비록 목가적 세계에 들어갈 수는 결코 없지만,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세르반테스는 그리소스토모와 마르셀라, 냉정한 레안드라, 카마초의 결혼, 그리고 자극적인 아르카디아 이야기에서 목가소설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이들 사건은 문학과 삶이라는 주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사건은 도저히 불가능한 기사로망스식의 터무니없는 허구와 여관주인, 이발사, 신부의 일상생활 ―이 일상세계는 도망간 무어인의 아내, 유혹자, 공작과 공작부인 등 쉽게 만날 수는 없지만 다분히 현실적인 사람들을 포함하는 세계이다― 사이의 중간 영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아이러니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보통은 책 바깥에 존재하는 사건을 『돈키호테』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으며 이야기를 교묘하게 다룸으로써 주요 등장인물들은 책표지 바깥의 세계를 의식하게 된다. 세르반테스는 작품 속에 베넨헬리라는 저자(작품에서 『돈키호테』를 쓴 저자로 추정된다)를 포함시킨다. 세르반테스는 실제의 자신을 베넨헬리가 쓴 소설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사람으로 제시한다. 때때로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친분관계가 있는 등장인물인 것처럼 언급한다. 즉 마을 신부의 친구이자 『갈라테아』의 저자로서, 포로가 알제리에서 만난 “사아베드라라고 하는” 군인으로서 자신을 소개한다. 독자들 또한 세르반테스는 “어리석은 호기심”,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누만시아」의 저자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상기한다. 이것뿐만 아니다. 세르반테스는 소설 속에 독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돈키호테』 2권에는 1권을 이미 읽었고 따라서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게다가 2권에서는 라이벌 아베야네다의 『위작 돈키호테』를 언급하면서 등장인물까지 한 사람 소개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와 산초가 출판된 책[『돈키호테』 1권]의 주인공임을 의식하게 만들고 또 자신들의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의식하게 만든다. 예컨대 2권에 주동인물은 아베야네다의 『위작 돈키호테』가 가짜라는 사실을 화제로 삼기도 한다.

     세르반테스는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다룸으로써 그가 그토록 독립적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애썼던 작품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이에 대한 흥미 있는 예는 1권 8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여기서 세르반테스는 영사기를 정지시키듯 돌연히 등장인물들의 동작을 정지시킨다. 돈키호테와 비스카야인 사이에 벌어지는 사투는 극적인 순간에 멈춰버린다. 돈키호테와 비스카야인은 칼을 든 채로 얼어붙어 버리고 세르반테스는 몇 쪽에 걸쳐 베넨헬리의 원고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삽입한다. 세르반테스는 종종 긴장감과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지 기법을 사용한다. 이 기법은 에르시아(Ercilla)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사용했지만 어느 작품에서도 이곳만큼 생생하지 않다. 이러한 문학적 환상의 파괴는 전형적인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며 저자의 힘을 과시하는 일종의 예술적 노출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세르반테스는 예술적 테두리 내에서 그리고 독자의 능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설들”(여담)과 줄거리를 서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문제는 세르반테스가 상상하는 삶의 비전이 방대하다는 데 있다. 이는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들은 모두 직면하는 문제이지만, 세르반테스에게 삶과 문학은 너무 복잡하게 맞물려 있어서 때때로 양자는 실제로 서로 간섭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 여러 곳에 이러한 관점이 나타나고 있다. 죄수 히네스 파사몬테는 피카레스크적인 자서전의 구상을 끝냈으나 탈고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정작 자기자신도 모른다. 자서전을 탈고했느냐고 물었을 때, 파사몬테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내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I, 22)라고 대답한다. 다른 예는 『페르실레스...』에서 찾을 수 있다. 페리안드로는 아르날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분간 걱정하지 말게. 바로 어제 우리는 로마에 도착했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에 우리 행동이 바람직한 결과를 얻도록 계획을 수립하고 묘안을 짜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4부 4장)


    이러한 세르반테스의 말은 사실상 “작가에게 이야기를 구성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라는 의혹을 피하기는 힘들다. 히네스 데 파사몬테의 자서전의 길이는 인생만큼 길어지며 페리안드로의 경우, 작가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작품을 행복한 결말로 끝맺을 수 있다. 이러한 재미있는 암시는 세르반테스 작품에서 어떤 방식으로 삶과 문학 작품이 병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돈키호테』에서는 기발한 속임수(trick)에 예술적 초점이 맞춰진다. 이러한 기법은 모두(앞에서 언급한 중단된 싸움은 예외인데, 이는 동일한 기법을 전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주요한 효과를 준다. 우선 이는, 대부분의 2차원적 소설과 비교했을 때, 외견상 작품에 깊이를 더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인물에게 생명력과 견고함을 부여하며 이들 인물이 그들에 대해서 쓰여진 책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상을 준다.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논평도 때때로 이러한 효과를 강조한다. 카르데니오는 돈키호테의 광기가 너무나 유별나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누군가 그러한 생각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의심한다고 말한다.(I, 30) 산손 카라스코는 1권을 읽고 상상했던 산초보다 실제의 산초가 훨씬 명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II, 7)

     작가는 작품 뒤편에 숨어있기 때문에 자신의 조작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조작은 리얼리티에 대한 예술적 환상을 향상시키는 속임수이다. 만약 비(非)미학적인 예술 목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떤 속임수이든지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부적절한” 미학적 과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속임수는 분명히 관례에 어긋나지만 이들 속임수가 기여하는 환상은 문학적 환상의 “시적 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기여”라는 말이다. 결국 그 효과는 기법보다는 예술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 뒤에 세르반테스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자신이 보기에는 기사로망스의 영웅이 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했듯이(“내 눈으로 아마디스 데 가울라를 직접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II, 1) 독자도 돈키호테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창조물이 창조자의 정신적 능력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알쏭달쏭한 주장을 폈던 우나무노와 같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속임수 같은 것에 자주 의존해서는 안 된다. 코르네유가 『희극적 환상』에 실린 『시험』에서 말했듯이 “이런 종류의 장난은 한번만 해야 된다”. 세르반테스는 다른 작품에서도 유사한 장치를 사용했지만 결코 어떤 작품에서도 이상과 같은 규모의 문학적 속임수를 다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복잡한 조작의 근저에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이론이 안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예술 작품의 본질과 한계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돈키호테가 허구와 사실을 혼동하는 것이지만 작가는 이러한 혼동을 얼마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경계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 또한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삶과 예술은 지속적으로 상호 간섭한다. 이 문제의 본질은 예술적 진리의 본성에 대한 문제이다. 진실과 역사의 관계는 개연성과 허구의 관계와 같다. 하지만 허구를 역사인 체 함으로써 개연성을 역사적 진리만큼 강력한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 이는 『돈키호테』와 『페르실레스...』 전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상상적인 문학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다시 돈키호테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반종교개혁에서, 특히 스페인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6세기에, 다시 말해서 인쇄술이 발명된 이래 독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카톨릭은 당연히 문학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학과 예술의 힘에 대한 광범위한 ―카톨릭에만 국한되지 않는― 자각이 있었다. 17세기에 인쇄된 책이 던진 충격은 오늘날 텔레비의 충격과 얼마간 유사하며 인쇄된 책이 야기한 반응 또한 전적으로 상이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상상적인 문학은 주인공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허구는 환상적 즐거움을 위해 이야기를 꾸며내며 돈키호테와 산초를 포함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공작 부처의 마음에 어떤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여관집 주인에게는―도로테아가 “주인 양반도 머지 않아 제2의 돈키호테가 되겠네요 [또는 『돈키호테』 2권을 쓰겠네요].”(I, 32) 라고 중대한 혼동의 여지가 있는 말로 언급하는 여관집 주인에게는―어떤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그리고 아르카디아를 모방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책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문학은 인간 경험의 일부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여러 가지 얘기를 담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삶에 있어서 책에 관한 것이다.


III.

     이와 유사한 영향력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다루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글쓰기에서 비평적 거리를 형성하는 대부분의 명백한 양식은 일찍이 수사학에서 변명, 즉 서두나 결론 등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로 정형화되었다. 도덕적 반성과 방백 그리고 기사로망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사가 그렇게 얘기한다”는 관례적인 공식조차도 어느 정도의 비평적 거리를 함축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산문과 시에서 이야기의 진행에 관한 논평 그리고 새로운 장면이나 사건의 전개에 대한 예고는 흔히 발견되는데 이는 구어 전통의 시적 기법에 속한다. 아리오스토와 에르시야는 이런 식으로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규칙적으로 그들이 존재를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아리오스토는 때때로 ―시작품에서 그렇지 않지만―자신의 창작품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 점 그리고 스토리가 실제로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고 아이러니하게 암시하는 방법은 세르반테스의 방법을 생각나게 만든다.

     문학적 인물에 대한 문학적 허구의 영향은 보카치오 이후에 쓰여진 중편소설(novelle)에서 어느 정도 느껴진다. 『데카메론』의 영향은 너무 강력해서 종종 이후의 소설가들(novellieri)은 남녀 주인공들이 『데카메론』의 주인공들처럼 이야기를 함으로써 보카치오의 “틀”(framework)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게 만드는 일이 흔했다. 등장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즐기기로 작정했을 때, 아마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데카메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는 빈약하지만 창조된 인물이 문학적 허구를 문학적 허구로 인식하는 것은, 흔히 그랬던 것처럼, 다른 작가의 허구적 인물을 자기 작품에서 사용하기 위해 차용한 것에 대한 궤변이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등장인물이 문학적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피란델로적 생각은 최고(最古)의 소설 작품 가운데 하나인 헬리오도루스의 『에티오피아 이야기』에서도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그것은 단지 유희에 불과하다”고 외치는데 이는 허구와 유사하다는 것을 ―허구와 동일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들 스스로가 이야기의 예외적 본성에 주목하게 만드는 헬리오도루스의 작은 속임수는 세르반테스를 생각나게 한다. 그 당시 또 다른 두드러진 기법은 델리카도의 뛰어난 르네상스 소설 『안달루시아 여자 로사나의 초상화』에서 사용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하등의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도 아니다. 그보다는 마치 16세기의 이셔우드(해상도가 매우 높은 카메라)처럼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창녀 로사나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델리카도는 이 기법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사나는 자신이 델리카도의 “초상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나(그녀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행위는 이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개인적 관계는 종종 매우 복잡하며 이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작품 이해에 중요하다. 작가로서 단테와 순례자로서 단테를 구분하는 일은 단테의 시작품 “전체 구성의 기초”라고 얘기들 한다. 16세기 사람은 작품에 대한 작가의 위치를 명확하게 하는 방식이 상당히 혼동스럽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산나차로의 작품 『아르카디아』는 작가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작품 외부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한정하는 데 실패했다. 가르실라소의 『애가』에서 누가 누구인가에 대한 혼동은 시인이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개인적인 소재, 시인 내면의 개성과 삶에서 얻은 세부사항, 순수한 허구가 혼합된 데서 기인한다. 모종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감지한 기사로망스의 작가들은 형식적으로는 작품과 자신들을 연관시키지 않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혼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반델로는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악행과 범죄를 책임질 수 없다면서 거리 두기를 도덕적 알리바이로 이용함으로써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마테오 알레만(Mateo Alemán)이 제기한 도덕적 행위의 복잡성은 한결 다채롭고 또 그렇게 의심스럽지도 않다. 알레만은 피카레스크 소설가들에게 익숙한 자서전 형식을 사용했는데 『구스만 데 알파라체』에서는 이러한 자서전적 방법과 객관성을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피카로의 개심(改心) 때문이다. 즉, 개심한 인물은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와는 “다른 사람”이었던 자신의 얘기를 쓴다.

     비록 알레만의 방법과 세르반테스의 방법은 다르지만(한 가지 예를 들면, 세르반테스는 소설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제시하지 않았다) 이 두 소설가의 이룩한 이 특별한 성과는 역사적 사실과 시적 허구의 차이에 대한 고도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확산에 뒤이은 발전으로 시적 허구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삶과 문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양된 의식은 돈키호테와 산초가 유례없는 정도의 자율성을 누릴 수 있게 했으며 또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고도로 복잡한 작용이지만 더 이상 참기 어려운 혼동은 아니었다. 자신의 자유를 확신하고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작가는,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안과 밖에 존재하게 되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결말 부분에서 시데 아메테 베넨헬리로부터 ―차라리 그의 펜으로부터― 손을 떼고 이렇게 말한다.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하여 돈키호테는 태어났고, 나는 그만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다. 그는 행동할 줄 알았고, 나는 쓸 줄 알았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하나이다”라는 말로 그들의 동일성을 재확인한다.(II, 74)

     16세기 비평적 사고에서 삶과 문학은―비록 고대이래 헤아릴 수 없는 정확성으로 구별되었지만―밀접하게 되었다. 이는 스칼리저의 이론에서 예증된다. 스칼리저는 궁극적으로 시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를 구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시인은 자연을 모방하는데 비르질리우스만이 완벽하게 이를 성취했다. 그러므로 현대 시인은 청중을 교육하기 위해 비르질리우스를 모방해야만 한다(그럼으로써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간략한 형식으로 제시된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면, 이들 사이의 간격이 좁다는 것은 ―이는 복잡한 스칼리저 이론 체계의 일례에 지나지 않지만― 문학적 모델과 자연의 이러한 융합에서 볼 수 있다. 허구의 수준 역시 탐험되었다. 피콜로미니는 모방의 모방에 대하여 숙고했는데, 이는 『돈키호테』에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이런 종류의 이중 모방이 잘 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더 [모방된 것을] 확대하고 투영할 수 있는지를 추론했다. 말하자면, 단지 한 번의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원하는 만큼 모방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다른 모방자를 모방하는 모방자를 모방하는 식으로 계속 할 수 있다 [...] 사실, 모방자를 모방할 때 그 사람 역시 모방자가 모방한 것을 다시 모방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어떤 식으로든지 진실된 것을 모방한다.


     1600년대 초엽까지 예술은 철저하게 내향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몇 가지 흥미 있는 시각적 속임수가 개발되었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창작과정에 거울을 돌렸고 그들이 본 것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로페 데 베가의 유명한 작품 「문득 생각난 소네트」의 주제는 그저 이 소네트를 쓰기이다. 아이러니한 비전은, 대표적인 예를 들면, 『햄릿』의 “극중극”, 코르네유의 『희극적 환상』, 『돈키호테』의 인형극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이 비전의 가능성은 칼데론이 『세계라는 위대한 연극』과 『운명은 하느님밖에 없다』에서 눈부시게 개발했다.

     『돈키호테』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인, 몇 가지 허구 조작은 계속해서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7세기이래 유럽 소설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장치들, 가정상 다른 사람이 쓴 이야기이며 허구적 문서라는 장치는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 이러한 장치는 비록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세르반테스의 덕택이다. 이보다 책략적인 장치들 가운데 몇몇은 17세기 이후 19세기가 되어서 주요작가들이 작품의 중요한 일부로 사용했다. 사실, 당연하지만, 페레스 갈도스, 우나무노, 특히 피란델로의 자율적인 인물들은 3세기 전 돈키호테와 산초가 예견한 인물이다. 앙드레 지드와 루이스 캐럴 같은 이질적인 작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념 중의 일부도 그렇다. 『사전꾼』의 에두아르보다 훨씬 이전에 세르반테스는 “현실이 제시하는 사실과 이상적인 현실 사이의 갈등”에 관한 책을 썼다.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트위들덤이 앨리스는 붉은 왕의 꿈속에 나타난 사물에 불과하다고 도발적인 암시를 했을 때, 앨리스가 비통하고 분노에 찬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돈키호테와 산초의 현실이 아베야네다 작품의 주인공들에 의해 도전받았을 때 보였던 반응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행한 “거울 게임”과 가장 유사한 것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림이다. 이 그림은 『돈키호테』와 동시대적이고 이에 견줄만한 걸작인데 그 효과도 유사하다. 내가 말하는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궁녀들」이다. 이 그림은 숫제 트릭이다. 이 그림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있다. 그 그림에서 가장 큰 인물이지만 어둡고 그래서 부각되지 않는다. 문간에 서 있는 이 인물은 고정된 자세를 취하고 방에서, 다시 말해서 화폭에서 반쯤 비켜서 있다. 왕과 왕비는 뒤편 벽에 희미한 그림과 함께 걸려 있는 거울에 비쳐지고 있다. 그리고 감상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그림을 한 지점에서,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는 왕과 왕비 가까이 있는 지점에서, 그 그림이 실제로 그려졌던 지점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누군가 어깨 너머로 흘끗 쳐다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 지점에서 작업 중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저기 걸려진 거울인가(이는 조금 의심스럽다), 아니면 주제 외부에서 정신적으로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인가? 어느 경우이든, 그는 동시적으로 주제의 내부와 외부에 있으려고 노력한다. 나아가서 외부의 감상자 역시 그림 내부로 끌려들이려고 한다. 고티에는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액자는 어디에 있는가?” 피카소는 “그곳에서 당신은 진짜 현실의 화가를 보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케네스 클라크 경은 이렇게 썼다. “벨라스케스의 목적은 눈에 띄지 않게 헤아릴 수 없는 공정성을 유지함으로써 [...] 단지 완벽한 시각적 인상에 대한 총체적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상당히 교묘하게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