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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1) / 현중문 2003-10-22 / 6330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1)

현 중 문



목 차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1)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2)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3)



I. 길놀이

    보르헤스의 단편「아스테리온의 집」은 널리 읽히고, 또 그만큼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다. 보르헤스 문학의 상징(혹은 상표)이라고 할 수 있는 미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독서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에 직면하기 일쑤이며, 참고 자료 구하기도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보르헤스는 어려운 작가라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보르헤스 작품을 남김없이 이해하고 싶은 욕망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각종 문헌과 의견을 참조하여 작품을 읽은 경험을 토대로 작성했다. 차례에 나열된 여러 항목 중에서 “「아스테리온의 집」 자세히 읽기”는 롤랑 바르트 저서 『S/Z』의 따분한 형식을 본뜨고 앤더슨 임버트(Anderson Imbert)의 견해를 많이 참고했다.

    간혹 결과는 의도를 배신하기도 한다. 더불어 읽고 즐거움을 나누자는 게 우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너저분한 정보로 당신의 순결한 독서를 방해하고 굼뜬 글솜씨와 부적절한 이미지로 당신의 찬연한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들지나 않을는지... 이와 같은 우려에서 여기 또 하나의 통로를 마련한다.

☞ 우리말 번역 보르헤스「아스테리온의 집」



II. 이스토리아

    스페인어 '이스토리아'(historia)는 이야기(story)와 역사(history)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의 용법으로 쓰인 대표적인 예는 보르헤스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인용한 『돈키호테』 구절이다. 실제로 세르반테스 시대에는 역사와 이야기 사이에 구별이 없었다. (후세 스페인 역사가들은 역사와 이야기가 뒤섞어버린 책의 미로에서 참 역사를 가려내는 데 곤란을 겪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얘기하려는 「아스테리온의 집」 창작 내력도 역사이면서 이야기이다. 1940년대 말 보르헤스는 문예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연감》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원고 마감을 하고 편집에 들어간 어느 날 지면은 배정되어 있었으나 작품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르헤스는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랴부랴 서둘러 이틀만에 작품을 썼는데, 그것이「아스테리온 집」이다

    평소 보르헤스는 작품을 창작할 때, 단어 하나 하나를 엄밀하게 따져가며 퇴고를 거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이 작품에 어떤 모순이나 결점이 있다는 암시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에 대한 해석이다. 어느 비평가에 따르면, 「아스테리온 집」은 시간에 쫓겨 쓴 작품이기 때문에 보르헤스 문학적 상상력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얘기한다. 즉, 보르헤스가 평소 사고하고 상상하던 세계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멋진 사고의 반전이며, 경쾌한 상상력이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보르헤스 옹호라거나 터무니없는 합리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득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성찰해보니, 어느결에 역사의 영역에서 이야기의 영역으로 옮아갔고, 이제는 '이스토리아'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다.



III. 프롤로그

1. 미노타우로스 신화

    모든 신화와 전설이 그러하듯이 미노타우로스 신화도 세월의 때가 묻으면서 여러 갈래의 이본이 생겨났다. 우리의 관심은 정설보다는 보르헤스가 어떤 판본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일이다.

    보르헤스는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뿐만 아니라「아벤하칸 엘 보하리, 자신의 미로에서 죽다」(『알레프』, 황병하, 193쪽 참고)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에서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참고용으로 가장 적합한 작품은『상상 동물 이야기』에 실려있는 「미노타우로스」일 것이다.

    모두들 알고 있듯이 『상상 동물 이야기』는 남진희의 번역(까치, 1994)으로 이미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의외로 번역하기 까다롭고 잔손이 많이 가는 작품인데 역자는 방대한 전거를 참조하여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아쉽지만, 여기서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직접 옮겼다.


미노타우로스

    어쩌면 사람들이 길을 잃게 집을 짓겠다는 생각이 황소 머리 남자라는 생각보다 훨씬 이상하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생각은 상호 관련이 있다. 미로 이미지는 미노타우로스 이미지와 부합하며, 괴물 같은 집 한 가운데 괴물이 사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미노타우로스는 반은 황소이고 반은 사람이다. 크레타 왕국의 왕비 파시파에가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하얀 황소와 통정(通情)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이러한 사랑이 실현될 수 있기까지는 데달로스의 재주가 한몫 했는데, 이번에는 미로를 만들어 괴물을 눈에 띄지 않게 가두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인육(人肉)을 먹었기 때문에 크레타의 왕은 속국 아테네에게 매년 일곱 명의 처녀와 일곱 명의 총각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테세우스는 과중한 조공에 신음하는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심에서 희생물이 되기로 자원했다. 크레타의 공주 아드리아네는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실꾸러미를 건네주었고,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오비디우스는 기발한 형식의 오운시(五韻詩)에서 미노타우로스는 "황소인데 반은 인간이고 인간인데 반은 황소"라고 얘기했다. 단테는 고대 언어에는 능통했으나 고대의 동전이나 기념물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황소라고 상상했다.(『신곡』, 지옥편, 12곡, 1-20)

    황소 숭배와 쌍도끼(이를 'labrys'라고 하는데, '미로'라는 단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신성한 투우 제전을 거행했던 여러 종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벽화를 보면, 황소머리를 한 인간은 크레타 인들이 믿었던 악마이다. 그리스판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신화를 후세 사람들이 개작한 것으로, 아마도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상 세계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보르헤스,『상상동물 이야기』에서)




▶ 그림 설명 : 크노스스 궁전의 라브리스(사진 중앙의 꼭지점이 맞닿은 두 개의 삼각형 모양)


    위 글도 중요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보르헤스 글쓰기의 전형에 속한다. 파시파에가 왕비라면 왕은 누구일까? 해신 포세이돈은 누구에게 하얀 황소를 보냈을까? 아테네를 속국으로 만들고 제물로 바칠 인간 조공을 요구한 사람은 누구였고, 또 데달루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둘 미로를 축조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노스 2세(Minos II)이다.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라는 말의 뜻이 ‘미노스의 황소’이므로 글 제목에서 이미 미노스 왕을 언급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와츠

    보르헤스는 버릇처럼 작품집의 첫머리나 끝에 수록된 작품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한다. 『알렙』(Aleph)의 '후기'에서도 「아스테리온 집」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아스테리온의 집」과 불쌍한 주인공이라는 인물 설정은 1896년 와츠가 그린 그림 덕분이다.”

    보르헤스는 이 그림을 어디서 보았을까? 앤더슨 임버트는 아마도 체스터튼(Chesterton)이 쓴 『와츠』(1904)에 수록된 그림을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보르헤스는 『또 다른 심문』에서 체스터튼의 이 작품을 다섯 번 정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읽었다는 얘기다.




▶ 그림 설명 : 〈The Minotaur〉, George Frederic Watts(British 1817~1904) 보르헤스는 1896년 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885년에 완성하고 1897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체스터튼의 견해에 따르면, 와츠가 그린 미노타우로스는 "바보 같은 야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스토아적이고 청교도적인 도덕 관념에서 현대 도시의 잔인성을 고발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와츠의 그림과 체스터튼의 해석을 통해서 보르헤스가 새롭게 인식한 미노타우로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불쌍하다"고 단 한마디로 압축하고 있는데, 참으로 보르헤스다운 정갈한 언어이다.

    불쌍한 주인공이라니! 사실 이 한정 형용사는 서구 전통에서 수 천년 동안 괴물로 여겨온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하고는 어딘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처럼 일반적인 관념과 충돌을 일으키는 낯선 어휘는 작품의 미노타우로스가 문화적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은근한 암시이다.



3.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보르헤스 작품의 심층에 거대한 빛을 드리우고 있는 작가이다. 널리 알려진 작품 예를 든다면, 「카프카와 선구자들」이지만 보르헤스가 직접 이름과 작품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현대의 지적, 정신적 어둠을 마주보며 작품을 써내려갔던 카프카의 뜨거운 숨결을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 「만리장성과 책」(『또 다른 심문』) 이고, 「아스테리온 집」이다.

    지금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카프카의 작품은 각각「만리장성의 축조」와 「굴」(窟)인데, 이야기에 앞서, 극히 사적인 일이나,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보르헤스 작품을 읽기 전에는 카프카의 두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어쩌면 그 전에 카프카의 작품을 읽었는데도 장서가 흩어지면서 기억도 함께 흩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인 사정이야 어떻든 현재로서는 보르헤스를 통해서 카프카라는 선구자를 창조하는 것만은 틀림없으니 시공간을 넘어선 보르헤스의 문학적 깨달음을 확인하고자 다시 한번 「카프카와 선구자들」(『또 다른 심문』) 의 마지막 단락을 읽어본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앞서 열거한 이질적인 이야기들은 카프카 것과 비슷하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이들 모두는 비슷하지 않다. 이 마지막 사실이 더 의미심장하다. 이들 각각의 텍스트에는 어느 면에서 카프카의 특성이 나타나있다. 하지만 카프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러한 특성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두려움과 신중」이라는 시는 카프카의 작품을 예고하지만, 우리가 카프카를 읽음으로써 브라우닝의 시에 대한 우리의 독서는 상당히 세련되고, 또 빗나간다. 브라우닝은 지금 우리들처럼 그 시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비평용어에서 선구자라는 단어는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논쟁이나 경쟁과 같은 모든 함축적인 의미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모든 작가는 선구자를 창조한다. 그러한 작업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수정하듯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수정한다.(「카프카와 선구자들」,『또 다른 심문』에서)


    카프카의 작품 「굴」(이주동,『카프카 전집 1』, 솔)은 중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긴 작품이나 사건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만큼 굴의 상징성에 대한 언급도 많아서 흡사 초라한 영역에 안주해버린 나와 당신의 삶을 빗댄 우화처럼 보여 가슴이 뜨끔하고, 나아가서 오밀조밀 복잡한 관계망에서 자신을 위치를 확인하고 안도하는 현대인의 삶이란 결국 보잘것없는 굴 속 같은 삶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증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편, 보르헤스의 「아스테리온의 집」처럼 카프카의 작품도 주인공이 동물이고, 굴 또한 미로 같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굴을 만들고 거기에 갇혀버렸다 것, 그리고 세상과 타자에 대해 적의를 느끼는 동시에 세상과 적을 그리워하는 고독한 동물이라는 점은 보르헤스의 미로와 마찬가지로 카프카의 굴 또한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카프카보다 보르헤스를 먼저 언급했다) 이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작품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독법을 보르헤스의 언변을 빌려 변호해보자. 카프카의 「굴」이라는 단편은 보르헤스의 작품을 예고하지만, 우리가 보르헤스를 읽음으로써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독서는 상당히 세련되고, 또 빗나간다. 이를 일러서 상호텍스성이라도 불러도 좋을 것이다.



목차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1)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2)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