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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 / 현중문 2004-06-12 / 5083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

현 중 문



목 차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


VI. 가능성의 영역





위의 두 판화를 비교해보자. (오른편 판화는 에셔의 《그림 그리는 손》(1948)이고 왼편은 설명을 위해 합성한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왼편은 실제의 손이 그림을 그린다는 일상적 경험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 이 경우 손이건 와이셔츠건 회화적 재현(판화)이라는 사실은 대상을 인식하는 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른편 판화는 다르다. 어떻게 그려진 가짜 손이 또 하나의 가짜 손을 그릴 수 있지? 아무리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판화는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판화를 소설로 바꾸면 코르타사르 작품에 적용된다)


책『괴델, 에셔, 바흐』로 유명한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는 이 판화를 가리켜 실제로 판화를 그리고 있는 에셔의 손이 누락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기묘한 상황이 창출되었다고 설명한다. 주네트 또한 코르타사르의 이 단편을 지칭하여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무한 진행(ad infinitum)로 인해 발생하는 지적 현기증은 말끔하게 해소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지나치게 현상을 유지하려는 설명이다. 이 판화를 보았거나 이 단편을 읽은 사람이 경험한 인식론적 지평의 파쇄를 도외시하고 어떻게든 현실의 굳건한 확실성을 확인시키려고 들기 때문이다.


아래 도표를 보자





이 그림에서 '그'는 분명 우리가 창조한 허구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허구를 실제(the real)의 대용품으로 여기므로 '그'는 허구이면서 실제이다. 이제 '그'의 관점으로 이동하면 '그'는 실제이므로 '그' 또한 나름의 허구(사내와 여자의 영역)를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진행하면, 여자와 사내 또한 A라는 테두리 바깥에서 보면 허구일지라도 안에서 보면 실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조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C라는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실제라고 여기고 있으나 C 바깥에서 보면 허구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보르헤스의 작품 「원형의 폐허」도 동일한 메카니즘이다. 근대 서구에서 원조를 찾는다면 피란델로의 유명한 희곡, 『작가를 찾는 등장인물 여섯 명』과 우나무노의 『안개』이다.)


그렇다면 에셔와 코르타사르 작품은 일차적으로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의 단단한 껍질을 허물고 불확실한 알맹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실이란 구멍이 숭숭 뚫린 스펀지와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앞서 이 단편의 주인공 '그'가 부르주아라고 했다. '그'가 개념하는 현실이란 웰렉(Wellek)의 표현처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인간이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 나머지는 '그'가 제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므로 모두 비현실이다.


코르타사르는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의 가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되풀이 말했다. 이를테면, 그의 문학을 가리켜 '환상문학'이라고 칭하는 것도
불만이었는데, 그 까닭은 환상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방금 얘기한 현실과 비현실의 가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지적 현기증을 통해 일상적 사고를 뒤흔드는 작품을 논하면서 일상적 사고의 굳건함과 확고한 현실 개념을 재확인하면 지적 현기증은 해소될 것이라는 주장은, 비록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할지는 모르겠으나,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를 왜곡하는 일이며, 나아가서 독서 경험의 원인 무효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어떤 사람은 A, B, C 사이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침윤할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 경험법칙으로는 진리이다. 하지만 코르타사르의 작품에서 작동하는 법칙에 따르면 A, B, C는 모두 실제이면서 허구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차원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C의 영역에 거주하는 남자는 B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고 나아가서 A의 영역에까지 진출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층위의 도약이 가능한 영역을 서술하는 작품은 더 이상 아리스토넬레스가 말한 개연성에 기초한 문학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개연성은 없으나 얼마든지 상상은 가능한 영역을 보여주는 새로운 미학이다. (그러나 마치 현실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SF소설과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일상 경험법칙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어떤 것은 현실적이고, 어떤 것은 비현실적이라든가, 현실적인 사건과 비현실적인 사건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환상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따위의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3의 (문학적, 예술적) 현실), 전혀 새로운 현실, 더 이상 낯익은 경험법칙의 잣대로는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지적 현기증을 유발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일상적 의미의 현실을 깊이 천착하여 숨겨진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범주를 남김없이 개방함으로써, 즉 이제까지 서구 미학에서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영역을 수용함으로써 생성된다.


끝으로, 이 작품은 메타픽션이다. 문학에서 현실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은 곧 픽션의 굴레를 부수는 일이다. 그리고 작품을 창작한다는 자의식의 의도적인 발현이란 곧 글이 만들어가는 영역이 결코 당신들이 생각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인 동시에 당신들이 편안하게 안락의자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아니라는 경고이다. 적어도 코르타사르의 단편「맞물린 공원」에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