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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3) / 현중문 2003-10-22 / 3934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3)

현 중 문



목 차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1)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2)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3)


V. 아스테리온의 집, 미로, 세계


[1-7행] 나는 이런 놀이만 상상한 게 아니다. 집에 대해서도 명상했다. 집은 모든 부분은 여러 번 반복되기 때문에 어떤 곳은 곧 다른 곳이다. 하나의 저수조, 하나의 안마당, 하나의 가축용 물통, 하나의 구유통이란 없다. 구유통도, 가축용 물통도, 안마당도, 저수조도 열 네 개[무한]이다. 이 집의 크기는 세계의 크기만 하다. 다시 말해서. 이 집이 세계이다.


    "집에 대한 명상"은 미로에 대한 명상이지만, 미로의 건축학적 구조가 아니라 미로의 시공간적 성격에 대한 명상이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성가신 의문을 해소하겠다. "저수조..." 등등은 소 같은 가축, 즉 황소의 머리를 가진 아스테리온에게 꼭 필요한 품목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미로에서는 모든 게 반복되므로 '하나'라는 수사는 부적합하다. 하나의 끝없는 반복, 그것은 곧 무한이다.

    그리고 미로가 무한이라면, 미로의 안(아스테리온의 집)과 밖(일반인들의 세계)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의상 무한의 밖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집이 세계다". 그리고 이 집은 미로이므로, "세계가 곧 미로다"는 보르헤스의 결론이 도출된다.


[8-9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먼지로 뒤덮인 회색 석조 회랑과 저수조가 있는 안마당을 지치도록 돌아다닌 끝에 길거리로 나왔고, 쌍도끼 신전과 바다를 보았다.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첫 단락의 다음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느 날 오후, 나는 길거리로 나간 적도 있다..." 위 문장은 바로 이 진술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의 되새김이다. 미로가 무한이고, 세계라면 아스테리온이 길거리로, 즉 미로 바깥으로 나간다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이것은 아스테리온뿐만 아니라 독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변은 다음 구절에 있다.


[10행] 그러나 밤의 비전을 통해 신전과 바다 또한 열 네 개[무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까다로운 구절이 등장했다. 바로 "밤의 비전"이다. 여기서 비전이란 추론을 거치지 않고 눈을 통해 단번에 대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직관적 이해, 또는 통찰력이다.

    그렇다면 '밤'이란 무엇인가? 앞 단락에서 아스테리온은 잠자는 놀이를 하면서 가끔은 "하루의 색깔이 바뀌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밤과 낮이 바뀌었다는 표현이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왜 전에는 "하루의 색깔"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사용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색깔의 바뀜은 시각적인 서술이고, 유추적으로는 공간적인 서술이다. 미로에서 연상하는 이미지도 일반적으로는 공간적이다. "길거리로 나갔다"는 표현 역시 공간의 이동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언어 선택이다.

    그러나 밤이란 낮이 변화한 하루의 한 양상이며, 이러한 변화는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고, 창공이 검은색이 되는 일련의 과정, 즉 시간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밤의 비전"이란 시간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깨달았다는 것은 곧 미로가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이라는 통찰의 획득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두 갈래 오솔길이 난 정원」(『픽션들』)의 문학적 변이체라고 할 수 있다.


[11-13행] 모든 것은 여러 번, 즉 열 네 번 반복된다. 그러나 단 한 번인 것처럼 보이는 게 세상에 둘 있다. 위로는 복잡한 태양이요, 아래로는 아스테리온이다.


    우리가 앞에서 잠정적으로 유보한 질문, 즉 14 = ∞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반복이다. 그리고 시간 개념을 내포한 반복, 즉 희생 제물의 주기적인 반복은 한 번이나 열 네 번이나 모두 무한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단 한 번"은 아스테리온 어법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 행은 다시 모호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반복되는데 태양과 아스테리온만이 유일하다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세한 단어가 개입하면서 단정적인 진술을 추정으로 바꿔버린다.
바로 "~처럼"이다. 유일한 것 같다는 뜻이지, 유일하다는 단정적인 진술은 절대 아니다.

    "복잡한 태양"이란 앞에서 얘기한 밤과 관련지어 풀어보면, 공간적인 태양이 시간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복잡하다는 것이다. 좀더 과감하게 밀고 나가면, 태양은 추상적인 시간 개념의 은유이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면 아스테리온이라는 개체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진다.

    실제로 아스테리온의 유일성이란 개체성을 일컫는다. 그런데 개체성이란 무한성이 시공간적으로 정위(定位)될 때만 가능하다. 비록 '나'라는 존재가 무한히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지금, 여기'(hic et nunc)라는 시공간에서 '나'라는 개체는 언제나 유일하다(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유한한 개체가 무한히, 영원히 존재할 수 있고, 유한성이 무한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보르헤스의 논리이다.


[14-15행] 어쩌면 내가 별과 태양과 그 거대한 집을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한이라는 관점을 채택하면, 창조를 비롯한 모든 사건은 언제나 현재의 일이며 과거의 일이며 동시에 미래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우리는 얼마간 무한과 유한, 개체와 전체라는 두 가지 흐름에 동시에 발을 담그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시간의 미로란 바로 이와 같은 존재의 이중성에 대한 색다른 논증이 아닐는지?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보르헤스의 미로는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말을 바꾸면,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서 문화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스테리온의 우주창조론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창조란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끝이 있으므로(혹은 그렇게 생각하므로) 창조는 언제나 유한하다(기독교의 천지창조론과 종말론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이와 반대로 무한이라는 관점을 채택하면, 이른바 창조를 포함하여 모든 사건은 과거의 일이며 동시에 미래의 일, 말을 바꾸면 언제나 현재의 일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제나 창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창조란 있을 수 없으며, 시작이란 기억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보르헤스의 미로는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말을 바꾸면,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서 문화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VI. 전도된 신화, 전도된 세계


[1] 구 년마다 내가 악에서 해방시켜주기를 바라며 아홉 사람이 집으로 들어온다.


    신화에 따르면 9년마다 희생물을 바쳤다는 설과 9년 동안 매년 희생물을 바쳤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경우이든 행위의 반복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아홉이라는 숫자는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그런데 "아홉 사람"에서 '아홉'은 조금 다르다. 아스테리온이 14가 무한이라고 추론하는 근거는 남자 일곱과 여자 일곱, 도합 열 네 명을 주기적으로 바쳤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면 아홉이란 숫자는 작품의 논리와 어긋난다.

    이와 같은 불일치를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시도가 있었다. 먼저, 프로이트 개념을 이용하면 아홉은 회임 기간의 상징이며, 미로는 거대한 자궁의 상징이므로. 아스테리온의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는 사람은 "보르헤스가 8개월만에 태어났다"고 하면서 직접 목격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언젠가 보르헤스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손가락 마디로 팔걸이를 세 번 두드렸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씩 웃고, 3이나 9나 33은 주술적인 숫자라고 하면서 아담은 33살에 태어났고, 예수는 33살에 죽었다고 대답했다.

    둘 모두 재미있는 견해인데 아낌없이 동의하기에는 망설여진다. 위의 일화는 보르헤스라는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 대한 정보일 뿐 이 작품에 대한 정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비평가는 보르헤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보르헤스는 이 작품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어쩌면 부주의해서 아홉 사람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보르헤스의 실수라는 마지막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보르헤스의 창작 습관에 비추어볼 때 유례없이 단시간에 창작되었다는 증언도 이에 대한 방증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정작 주의해야 할 단어는 '악'이다. 아스테리온 사고에 의하면, 인간을 "악에서 해방시켜주는" 행위란 곧 죽임이다. 도덕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아스테리온에게 악이란 괴물로 태어났다는 사실, 즉 생명이다. 그리고 그 악 때문에 죄를 짓지 않았어도 미로에 갇힌 수인이 되었고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고독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존재 조건을 헤치고 나가는 삶이란 곧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이요, 그 끝은 죽음이리라.


[2-4] 석조 회랑 안쪽에서 목소리나 발소리가 들리면 기쁜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으러 달려간다. 의식은 몇 분 안에 끝난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사람들은 차례차례 쓰러진다.


    4행의 수수께끼는 이 작품 세 번째 단락 "적을 향해 돌진하는 양처럼..."에서 이미 예시되고 있다. 뿔을 무기로 사용하므로 손에 피가 묻지 않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그리스 비극을 뜻하는 tradegy도 원래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던 양 (혹은 비극 경연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수여하던 양)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던가? 아스테리온, 그는 테세우스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5-6] 사람들은 쓰러진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시체 덕분에 이 회랑과 저 회랑을 구별할 수 있다.


    1행의 문학적 보충 설명이다.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은 악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미로에서도 벗어났기 때문에 이곳과 저곳을 구별하는 표지로 사용된다. 여기서 아스테리온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동기가 밝혀진다. 현란한 미로에서 탈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에.


[7-10]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그들 중 한 사람이 임종을 하면서 언젠가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이 당도하리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구원자가 살아 있고, 결국에는 먼지를 밟고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먼지를 밟고 일어서다"는
1) 미로의 통로가 먼지투성이라는 이전의 기술과 연관된다.
2) "결국에는", 즉 테세우스와 조우가 끝났을 때는
3) "일어나다", 즉 승자는 테세우스가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테세우스와 조우했을 때 아스테리온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암시한다.


[11-16] 내가 세상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구원자의 발소리도 들을 수 있으련만. 제발 복도도 한결 적고, 문도 한결 적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구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황소일까, 사람일까? 인간의 얼굴을 가진 황소일까? 아니면, 나 같이 생겼을까?"





▶그림 설명: red-figure kylix showing deeds of Theseus; Attic, 440-430 BCE
London, British Museum.(출처: http://www.beazley.ox.ac.uk/)



VII. 반(反)영웅 테세우스


     아침 햇살이 청동검에서 반짝거렸다. 이미 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말했다.
     "아리아드네, 믿을 수 있겠어? 그 괴물은 방어도 안 했어."


    보르헤스는 이 단락과 앞 단락의 사이에 여백을 두어 아스테리온과 테세우스의 결전을 깔끔하게 압축(생략)하고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미로를 빠져나온 테세우스를 전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스테리온이 왜 방어를 하지 않았는가도 이미 작품에서 암시하고 있고 또 충분히 논의했으므로 여기서 군더더기를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테세우스", "아리아드네", "괴물"이라는 단어는 아스테리온이 곧 미노타우로스임을 지시하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구성적인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의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신화의 결말과 동일하다. 테세우스가 아스테리온을 죽이고 미로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이다.

    테세우스는 저항하지 않는 아스테리온을 까닭 없이 죽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이 아니다. 비록 테세우스는 "괴물"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아스테리온을 지칭하고 있으나 이미 아스테리온은 공식적인 신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로서의 "괴물"이 아니다. 이 작품에 의하면, "괴물"이란 어디까지나 테세우스 관점일 뿐이며, 아스테리온은 삶과 우주의 고뇌를 짊어지고 살해당한 영웅, 아스테리온이라는 단어의 뜻처럼 "별처럼 빛나는" 인물이다.



에필로그: 코스모스와 미로

    어느 면에서 보면 한치의 의문도 남김 없는 주해란 작품을 고갈시키는 일이고, 갖가지 접근 방법과 해석은 작품을 한결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가끔씩은 해석을 너무 덧씌운 나머지 본말이 전도되는 경우도 있으나 어떤 단어나 구절, 혹은 전체적인 개요에서 섬광처럼 발원하는 사고의 갈래는 현란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덧없는 깨침이기 때문에 소중하며, 언어로 인화되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에 더욱 애틋하다.

    이런 경험을 갈무리하고 뒤를 돌아보니 이 작품을 기리는 여러 가지 명문이 눈에 띈다.
1) 미로는 우주의 참모습이라는 형이상학적 견해를 비롯하여
2) 미로와 혼돈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혼란상의 표현이라는 우의(allegory)적 견해,
3) 보르헤스의 미로는 본질적으로 언어 유희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문학적 견해 등이다. 작품 이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모두가 귀한 성찰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문화적 맥락이라는 독법을 보충하려고 한다.

    보르헤스가 살았던 20세기 전반기의 라틴아메리카는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지배계급은 그때까지 정치,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원주민, 메스티소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민족주의를 주창했으며, 이에 부응하여 지식인들은 다양한 인종, 계급, 계층으로 구성된 국가를 문화적으로 통합하고 서구와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방편으로 "아르헨티나의 특성"(argentinidad), "멕시코의 특성"(mexicanidad) 등을 규명하고 정의했다.

    넓게 보아, 보르헤스 또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또한 글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문화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며,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땅과 대기와 바다 냄새를 담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직접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아르헨티나인들의 특성을 한정하고 기술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이를테면 서구와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통해서, 서구 변방에 위치한 지식인의 문화적 자의식을 표출하였는데,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전도한 「아스테리온 집」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사실 미노타우로스 신화는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헬레니즘 세계관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선과 악, 영웅과 괴물, 문명과 자연, 삶과 죽음을 분별하고, 각각의 가치를 평가하고, 이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세워 세계를 정돈할 때 그리스인들의 생각처럼 우주는 코스모스(cosmos), 즉 이 단어의 원뜻처럼 "질서"가 된다.

    테세우스라면 질서는 편하고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스테리온의 관점에서 보면, 다시 말해서 타인이 세워놓은 질서 속으로 편입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분별, 평가, 서열화는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논리이며, 주변을 중심에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논리이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서구 중심의 신화를 벗겨내기 위하여 코스모스가 배제해버린 원리들, 즉 다의성, 반복, 우연, 혼돈을 기꺼이 긍정하는 미로를 주장한다. 미로는 중심이 없으므로 주변도 없으며, 시작이 없으므로 끝도 없으며, 이곳과 저곳을 구별할 수도 없고, 이것과 저것을 차별할 수도 없다. 결국 미로에서는 코스모스의 서열화가 해체되며, 모든 것은 정당화(justification)를 둘러싼 담론 투쟁으로 귀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르헤스의 미로는 서구 주변부 목소리의 문학적 현현태라고 할 수 있다.◇



목차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1)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2)
아스테리온의 집으로 가는 길(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