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구비평 > 작품읽기
 
 
  틀뢴에서 아드로게로(3) / 현중문 2003-10-24 / 7292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3)

현 중 문



목 차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1)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2)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3)



6. 틀뢴 ― 가정의 세계

영화 큐브

▶그림 설명: 보르헤스의 미로를 잘 표현한 영화 《큐브》의 한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뢴의 유물론자에 대한 “이러한 논박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논박할 대상은 동일성과 동등성이 아니라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틀뢴의 정통파 사상가의 “대담한 가설”, 즉 범신론이 등장하게 된다.


유일한 주체만 존재하며, 이 분리불가능한 주체가 우주의 개별자이며, 이 개별자들은 신성의 기관이고 가면이다.


     보르헤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명제이다. 인용구 바로 위의 각주에서도 보르헤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암송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셰익스피어이다”라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유일한 주체를 증명할 수 있을까? 사실, 이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며, 발견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르헤스가 언급하는 한스 바잉거(Hans Vaihinger)의 가정 세계는 틀뢴의 세계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잉거가 말한 가정이란 과학적인 가정 혹은 가설이 아니라 허구이다. 허구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마치 ~인 것처럼’(Als Ob)이라는 전제하에 수용하는 것으로써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첫째, 실재(reality)를 기술하지 않는다. 둘째, 허구의 기능은 인간의 인식을 배열, 발견, 정돈하는 실용적인 기능을 가진다. 셋째, 진위와 같은 진리치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진위를 떠나 있다. 명제로 표현하면, “우주의 속성이 어떠어떠하다”가 아니라 “아무개는 마치 우주의 속성이 어떠어떠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잉거의 논의는 나중에 에른스트 카시러의 상징형식, 프랭크 커모드의 허구, 그리고 놀이 이론, 가능세계 이론 등으로 발전되었다. 커모드에 따르면, “허구는 정신의 구조물이다. 인간 심리는 자체 내에 이런저런 생각을 만들어낸다. 인간 정신은 발명꾼이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은 외부 세계에 자극되어, 꼭 필요할 경우, 자체 내에 숨겨진 장치를 발견한다. 생명체는 모순된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도움 수단을 찾게 마련이다.”(프랭크 커모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즉, 허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허구에는 유토피아와 같은 패러다임의 허구, 형평에 관한 법률적 허구, 물자체나 인과율의 허구, 절대의 허구 등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허구가 허구임을 망각할 때 우리는 신화로 퇴행한다는 사실이다.



바렐라 그림

▶ 그림 설명: 메르세데스 바렐라(Mercedes Varela),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도서관과 보르헤스》(출처: http://www.ucm.es)



7. 보르헤스의 유머와 진솔성

     보르헤스 작품을 읽을 때 자주 발생하는 해프닝은, 모든 서술과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웃어야 할 때도 인상을 찌푸리며, 논리에 닿지 않는 어구 앞에서도 혹시 심오한 뜻이 있을까 싶어 한없이 망설인다. 즐기는 독서가 아니라 연구하는 독서가 되고(이 글도 그런 면이 있다),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경험 대신에 정신적 중압감을 경험한다. 「틀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틀뢴...」에서 보르헤스는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작품을 해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숨겨놓고 있다. 독자에게 길을 잃지 마시라고 이정표를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첫 부분에 등장한다.


일인칭 화자는 사실을 왜곡․생략하거나 여러 가지 모순을 범할 수도 있으므로 소수의 독자들―극소수의 독자들―은 잔혹하거나 하찮은 현실이라는 점을 간파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극소수 독자들”이란 사실 모든 독자이다. 어쨌거나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 생략된 부분도 있고, 조리에 닿지 않는 진술, 속된 표현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다고 얘기한다. 이야기 전개에서 생략된 부분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구절은 물레흐나스(Mlejnas)일 것이다. 궁금증을 야기하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구절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진술로는 운석처럼 부피에 비해서 중량이 많이 나가는 틀뢴 원추를 들 수 있다(보르헤스는 각주에서 “소재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압권은 역시 흐뢴(hrön)과 흐뢰니르(hrönir)이다. 흐뢰니르의 복잡한 증식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것인가? 이런 독자의 의문은 뒷부분에서 해결된다. 즉, 멤피스 본에서는 “몇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점들(예를 들어, 흐뢰니르의 증식)을 삭제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보르헤스의 장난기는 참고문헌으로 하슬람의 저서 『우크바르라는 땅의 역사』(1874)와 『미로의 일반사』를 언급할 때도 드러난다. 하슬람(Haslam)은 보르헤스 할머니의 성이다. 일반 독자는 이런 점까지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크게 개의치 않아도 무방한 일이다. 혹시 가계도, 연보 등을 통해서 보르헤스 집안의 내력을 아는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슬며시 웃고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틀뢴의 남반구 언어를 설명하는 곳에 이르면 우리는 “흘뢰르 우 팡 아사아사아사스 물뢰”(hlör u fang axaxaxas mlö)라는 구절을 만나게 된다. 이 구절에서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아브락사스(abraxas)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실제로 아브락사스는 로마제국 초기 영지주의자들의 부적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구절을 소리내어 읽어보라. 발음은 간장공장공장장처럼 걸치덕거리고,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은 무슨 비밀단체의 주문과도 같으니 절로 웃음이 터진다.

     또한 19세기에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라는 세계를 창조한 백만장자 에즈라 벅클리(Ezra Buckley)도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불완전한 후계자임을 드러내는 희화이고 조롱이다.

     이처럼 틀뢴에 대한 보르헤스의 태도는 진지함과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틀뢴의 세계는 “잔혹하거나 하찮은 현실”이다. 이러한 평가는 『틀뢴 제1백과사전』 11권을 지칭하여 “이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라는 말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소설 『멋진 신세계』(1932)를 넌즈시 암시하는 곳에서 확연해진다.

     마침내 작품 끝부분에 이르러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틀뢴의 엄밀성에 매료된 인류는, 틀뢴의 엄밀성이 영원하고 신적인 고도의 엄밀성이 아니라 체스와 같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엄밀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거나 애써 망각하려 든다.” 즉 이 모두가 허구임을 망각함으로써 우리는 신화로 퇴행하고 있다는 준열한 비판이다.

     이 때 우리는 문득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아드로게 호텔에 앉아서 소용돌이치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보르헤스를 만난다. 바로 난삽하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토마스 브라운(Thomas Browne, 1605~1682)의 『납골 항아리』(Hydriotaphia: Urn Burial, 1658)를 바로크 문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케베도(Francisco de Quevedo, 1580~1645)의 문체를 빌어 스페인어로 번역하고 있는 보르헤스이다.

     브라운의 『납골 항아리』는 영국의 노포크(Norfolk)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유골 항아리를 보고 과거와 당대의 장례풍습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죽음, 세속적인 명성의 덧없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케베도 또한 신랄한 풍자를 통해서 바로크라는 환멸의 시대를 꿰뚫어보았으며, “어제는 이미 지나가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쉼없이 흘러간다”고 삶의 허무를 노래했다.

     이처럼 보르헤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 브라운과 케베도를 빌어 우회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화려하고 창백한 지성의 유희를 막 끝내고 늦가을의 해가 쏟아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볼 때, 가슴에서 뭉클 치밀어오르는 감성의 덩어리를 넌즈시 작품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르헤스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하는 냉철한 보르헤스가 아니라 「보르헤스와 나」에서 언급하고 있는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보르헤스이다. 이리하여 작품에는 이성과 감성, 무한과 유한, 글과 실존, 꿈과 현실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가 형성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미학적 페이소스가 샘 솟는다. “이 꿈틀거리는 생명 앞에서 틀뢴, 너가 도대체 무엇이더란 말이냐”, 하고 묻는 듯하다.◇


목차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1)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2)
틀뢴에서 아드로게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