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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 현중문 2003-10-24 / 5736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현 중 문



목 차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



I. 공원 입구에서

    이 공원을 둘러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상하다고들 한다. 일반 관람객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마찬가지 의견이다.

    예컨대, 주네트(Genette)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면 문제가 해소된다”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안(Hahn)은 존재론적 층위의 얼크러짐으로 설명하며, 맥해일(McHale)은 주네트와 안의 논의에 에셔(Escher)의 그림을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혹스럽다고 말한다.

    코르타사르의 공원은 문고판 분량으로 2쪽이니 아주 적은 공원, 미니(mini)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옆 그림만큼 지형도가 복잡한 모양이다. (사실, 옆 그림은 유사반복과 자기 증식에 기초한 프랙탈 도형이다)

    그런데 당신은 ‘공원’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숲이 있고, 조깅 코스가 있고, 벤치가 있고, 잔디가 있는 쉼터? 중남미 사람들은 공원 하면 먼저 놀이터를 생각한다. 소소하게는 그네, 미끄럼틀, 정글이 있는 곳으로부터 크게는 바이킹, 청룡열차 등을 구비한 놀이 공원까지. 따라서 제목 “Continuidad de los parques”란 두 개 이상의 놀이터가 연결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놀이터란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코르타사르 놀이터의 연결 방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도는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작품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코르타사르와 에셔의 상상력은 문학과 회화라는 예술 장르의 차이를 초월하여 같은 자리에서 논의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하다.



II. 언어로 그린 그림

    왼쪽 그림은 데생하고 있는 손이다. 엽서만한 종이에 와이셔츠의 커프스 단추와 소매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판화의 독특한 질감만 제외하면, 어느 날 미술 학원에서 데생하고 있는 손을 촬영한 사진처럼 매우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사진이 아니라 판화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드로잉 펜을 든 손의 묘사가 어찌나 생동감 있는지, 마치(as if) 살아 있는 듯하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는 이 손이 진짜 손은 아니라는 것쯤은 너끈히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손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진짜 손인 것처럼, 때로는 진짜 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실 재현(mimesis)은 모든 환상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가장 끈끈한 환상이다. 가짜(즉 그림)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진짜(즉 손)처럼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소설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1] 그는 며칠 전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급한 용무가 생겨 책을 덮었다. 그리고 열차 편으로 농장에 돌아온 다음에 다시 책을 펼쳤다. 인물과 줄거리에 점점 흥미를 느꼈다. 그날 오후, 대리인에게 편지를 썼고, 관리인과 소작료 문제를 상의했다. 그리고 다시 떡갈나무 공원이 보이는 조용한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불쑥 들어와 독서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왼손으로 안락의자를 덮고 있는 초록색 우단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소설과 다름이 없는 평범한 서술이라서 우리는 금새 책을 읽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상상하거나 또는 그런 사람을 묘사한 글이라고 받아들인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언어로 그린 현실의 그림이다.

    소설에서 소설 읽기를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혹시 메타픽션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수준의 서술은 극히 통상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보다는 문학을 현실의 이야기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인공 ‘그’의 사회적 신분은 부르주아, 정확하게 말해서, 아르헨티나의 농업 부르주아이다. 수만 헥타르에서 수십만 헥타르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손수 농사를 짓기는커녕 혼자 관리하기도 벅찰 지경이다.

    이런 ‘그’에게 소설이란 고급 오락물이다. 하우저(A. Hauser)가 얘기하고 있듯이 19세기말 20세기초의 높은 문맹률과 빈약한 독자층을 생각해 보라. 소설을 구입할 정도의 경제적 여력과 글을 읽고 쓸 정도의 교육 수준과 독서를 취미로 즐길 정도의 한가한 시간을 고루 갖춘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영화도 TV도 없던 시절이라 독서 이외에는 마땅한 소일거리도 찾기 힘들었다.

    또한 소설은 고급 오락물일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인용 오락물로 취급했기 때문에 처녀와 아이들은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었다. 이들이 본 받을 일을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의 ‘그’와 같은 성인 남자는 소설 주인공의 일탈 행위를 통해서 은밀하게 욕망을 분출하고, 대리 만족을 느꼈다.

    위 서술에서 등받이 높은 “안락의자”, “초록색 우단”, 창문을 바라보고 “문을 등지고 앉았다”는 사실은 기억해두자.



III. 소설적 환상

    왼편 그림은 에셔 판화(해방, 1955)의 일부이다. 하단의 검정색과 하얀색 삼각형이 중간에 이르러서는 입체감 없는 새의 윤곽이 되고, 상단에서는 완전한 형체를 갖추고 마침내 검은 새와 하얀 새로 변형되어 창공에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코르타사르의 작품을 읽어보자.


[2]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미지가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내 소설적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한줄 한줄 읽어감에 따라 주변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야릇한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은 높은 등받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며 담배는 손닿는 곳에 있고 창 너머 떡갈나무 아래로 늦은 오후의 바람이 춤추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면서 주인공들의 빗나간 행실에 빠져들었고, 이미지는 한데 어울려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간혹 말하면 싱거워지고 그냥 입을 다물고 넘어가면 불명료한 의사소통 때문에 후일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 아무래도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에셔의 그림과 코르타사르 작품 인용 부분 사이에는 결정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림과 소설 감상의 기본 조건(대상 인식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에셔는 선과 색에서 출발하여 2차원의 형상을 거쳐 그리고 3차원의 물체로 전이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코르타사르는 단어(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출발하여 이름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로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미지가 살아 숨쉬는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복화술사이다. 회화와 문학에서 3차원의 물체와 인간은 결코 실제가 아니라 예술이 만들어내는 환상, 즉 눈속임이고 허구라고 얘기하는 동시에 관객과 독자는 이러한 환상을 잠정적으로 실제 사물로 수용한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메카니즘을 일컬어 문학적 환상의 이중성, 넓게는 예술적 환상의 이중성이라고 칭해도 될 것이다.

    조금만 더 부연하겠다. 환상을 환상으로 인식하려면 베이트슨(G. Bateson)의 말처럼 먼저 지도와 지형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영역을 사실의 영역과 구별하는 능력, 즉 테두리(frame)를 설정하고 인식할 수 있는 메타 단계의 능력을 요구한다. 에셔 판화에서 2차원과 3차원, 코르타사르 작품에서 언어적 이미지와 사람 사이의 구별이다.

    한편, 예술은 ―놀이도 마찬가지이지만― 위에서 말한 두 영역(사실의 영역과 환상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비록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상태이지만 환상을 마치 현실인 척 용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주인공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한다.

    이상의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다시 말해서 1)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고 2) 이에 더하여 잠정적으로 환상을 현실로 수용할 때, 진정한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 이 과정을 말로 설명하고 그림으로 보여주니까 복잡하게 보일 뿐, 사실은 우리가 소설을 읽거나 영화, 연극, TV드라마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이다.

▶ 그림 설명: 에셔, 《파충류》(1943, 부분)


목차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