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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 현중문 2003-10-24 / 5159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현 중 문



목 차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


IV. 존재론적 심연에 드리운 안개


[3] 마침내 그는 주인공들이 산 속 오두막집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먼저 여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이제 사내가 들어왔는데, 나뭇가지에 긁혀 얼굴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키스로 지혈을 했다. 그러나 사내는 애무를 뿌리쳤다. 예전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솔길과 낙엽 속에서 열정적인 밀회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미지근해진 칼, 그리고 칼끝 밑에서 자유를 잃은 심장이 박동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시냇물처럼 숨 가쁜 대화가 몇 장이나 이어졌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이미 결정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의 행동을 말리기라도 하듯이 온몸을 더듬는 애무까지도 실은 결딴을 낼 사람의 생김새였다. 알리바이, 우연, 실수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계산에 넣었다. 그 시간 이후, 매 순간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흘러갈 터였다. 잔인하게도 다시 한번 계획을 검토하려는데 손으로 뺨을 애무하는 바람에 중단됐다. 어스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대부분의 독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 다음 단락(인용문 [4])을 읽으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어떤 곳에서부터 길이 빗나갔다는 직관적인 통찰에 따라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면 무언가 조금 아득하고 모호하게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모호성은 의도적인 장치이다. 일상적인 언어의 논리로는 서술 불가능한 특수한 상황을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는 상황으로 만드는 서술 기법이므로 자세하게 분석하려고 한다.

     치밀한 문체 분석은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게 통념이나 이른바 코르타사르 환상문학의 멋과 맛을 한껏 실감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적절한 통로이며,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작동하는 코르타사르 특유의 기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 글을 서술하는 주체는 화자, 흔히 말하듯이, 작가 코르타사르이다. 작품에서 누가 말하고 보든지 간에 모든 진술은 기본적으로 화자의 것이므로 앞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 오로지 화자, 소설을 읽는 '그', 그리고 '그'가 읽고 있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 여자와 사내의 관계만을 살펴보겠다.

     첫 문장에서 (마침내 그는 주인공들이 산 속 오두막집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건을 진술하는 시각에 변화가 있다. 밀회 장면을 목격하는 사람은 화자가 아니라 등장인물 '그'이다.




     이전까지의 행위자는 '그'였고, '그'의 행위를 서술하고 목격한 이는 화자였다면, 이제부터 행위자는 여자와 사내이고 이 두 사람의 밀회를 목격한 사람은 소설적 환상에 사로잡힌 '그'이다. 따라서 두 번째 문장부터 얼마간 문장의 주어(행위자)는 '그'가 읽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들(여자와 사내)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잠시, 후반부로 갈수록 문장은 모호해진다. 주어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행동의 주체가 사내인지, 여자인지 아니면 '그'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문장을 진술하는 시각도 화자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가려내기 어렵다.

     예를 들어, "가슴에서 미지근해진 칼, 칼끝에서 자유를 잃은 심장..." 이라고 하는데, 사내와 여자 중 누가 가슴에 칼을 품고 왔다는 얘기인지, 또 그 칼로 누구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는 말인지 전후 문맥을 고려해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 사실 두 사람 모두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결말을 고려하면 제3의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문장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알리바이, 우연, 실수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계산에 넣었다. 그 시간 이후, 매 순간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흘러갈 터였다." 이제 행위자는 인물에서 사물로(번역문은 능동태이지만) 변하고, 이를 얘기하는 시각 또한 '그'에서 화자로 바뀌면서 누구에 관한 진술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문맥마저도 헝클어지니 행위 주체는 완전한 모호성의 영역에 위치한다. 말을 바꾸면, 행위자가 '그'인지 아니면 밀회를 즐기는 사내 혹은 여자인지 불분명하다.

     따라서 끝에서 두 번째 문장, "손으로 뺨을 애무"한다는 서술은 사내나 여자가 상대방의 뺨을 어루만진다고 해석해도 되고 독서를 하고 있는 '그'가 자기 뺨을 만진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스름이 드리우고 있었다"는 문장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내와 여자가 있는 영역에서 날이 저문다. 둘째, '그'가 독서 삼매경에 빠진 때는 오후이므로, '그'의 영역에서 날이 저문다.

     이처럼 문장과 문맥의 모호성이 야기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불확실성이 바로 코르타사르 특유의 환상문학 서술기법이다. 현실의 영역('그'의 영역)과 비현실의 영역(여자와 사내의 영역)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론적 심연 위에 짙은 안개를 드리우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까. 그 안개(모호성) 때문에 독자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선을 넘어가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며, 어느 순간 발을 딛고 있는 땅이 물렁거린다는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면 일상적으로 너무나 이질적이라고 여기고 따라서 그 어떤 연계도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버렸던 저곳과 이곳이 교묘하게 맞물려서 생성된 가능성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V. 지적 현기증 - 코르타사르와 에셔


[4] 그들은 앞일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오두막집 문 앞에서 헤어질 때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는 북쪽 오솔길로 가야만 했다. 반대편 오솔길로 가던 사내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머리칼을 날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도 나무나 울타리 뒤에 몸을 숨기며 달려갔다. 마침내 안개 같은 어스름 아래로 그 집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타났다. 개가 짖으면 안 된다. 짖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관리인은 집에 없을 것이다. 집에 없었다. 사내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은 널뛰고 있어도 여자의 말소리는 귓전에 쟁쟁했다. 처음에는 청색 거실, 다음에는 복도, 그리고 양탄자가 깔린 계단. 계단 위로 문이 두 개 있다. 첫 번째 방에는 아무도 없다. 두 번째 방에도 사람이 안 보인다. 그런데 저 문, 그리고 움켜쥔 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등받이가 높은 초록색 우단 안락의자, 의자에 앉아 소설을 읽고 있는 사람의 머리.


     작품의 대단원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는 목전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믿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외의 결말에 직면했을 때도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 때문에 간혹 오독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잠시 내용을 설명하려고 한다.

     사내가 찾아 간 집, 정확하게 얘기해서, 사내가 범행대상으로 삼고 찾아간 사람은 바로 이 작품 첫머리에서 소설을 읽고 있던 '그'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그'와 작품 말미의 '그'가 동일인물이라는 증거는 작품의 처음과 끝에서 반복되는 단어들 즉, "관리인, 등받이가 높은 안락의자, 초록색 우단, 창문을 등지고 앉은 자세, 소설을 읽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를 죽이러 왔다는 얘긴데, 당신은 이처럼 당돌한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에셔, 갤러리    어느 날인가, 에셔의 화첩을 뒤적거리다 깜짝 놀랐다. 작품《갤러리(화랑)》(옆 그림) 때문이다. 코르타사르 작품은 에셔 판화의 명문(銘文)이며, 역으로 에셔 판화는 코르타사르 작품의 삽화로 손색이 없었다. 내친 김에 창작 년도를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출판 년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1956년도 작이다. 두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더라도 영향을 얘기할 근거가 없었다. 동양 고전 어투를 빌리면, 하늘은 북반구 유럽에 환쟁이 에셔를 낳았고, 남반구 아르헨티나에 글쟁이 코르타사르를 낳았다고 할 수밖에.

     이왕 말이 나왔으니, 에셔 그림을 문학적으로 뜯어보겠다. 왼쪽 하단의 어떤 젊은이가 오후 한가한 시간에 화랑에 들렀다. 전시된 그림을 둘러보는데, 문득 낯익은 항구 풍경이 시선을 붙잡고, 이내 청년은 선박과 선창가에 늘어선 집 그리고 창문을 훑어본다. 그런데 어느 집 이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아들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한 할머니, 혹시 어머니가 아닌가 싶어 차마 눈길을 떼지 못한다.

     어머니가 계시는 집 처마는 늘어지고 또 늘어져 어느덧 화폭의 틀(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경계)을 감쪽같이 용해시키고 화랑의 아치 기둥과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으니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와 내가 있는 곳이 다른 곳(화폭 왼쪽)이 아니라 같은 곳(화폭 오른쪽)일진대 어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화폭 한 가운데 위치한 둥그런 공백을 보라. 서명 같기도 하고 작품명 같기도 한 일련의 모호한 기호로 우리의 관심을 빼앗고 있으나 그 본질은 액자와 화랑의 아치 기둥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존재론적 심연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안개이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지적한 코르타사르의 문체적 모호성을 시각적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공백이다.

     글과 그림의 메커니즘이야 어떻건, 이쯤에 이르면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고 전자에 존재론적 절대성을 부여하는 우리들의 일상적 사고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말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제아무리 실제(real)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본령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이고 가상인데, 어떻게 현실의 영역을 침범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영화 《매트릭스》처럼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구분이 사라지고 가상세계의 사건이 현실세계의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을 인정하라는 얘기인가?

     《링》같은 공포영화를 관람한 독자라면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혹시 이 사내가 '그'를 죽이고 다음 차례로 코르타사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를 노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물론 코르타사르 작품에서 범행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으며, 작품 내용으로 보아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이 무엄하게도 책장 바깥으로 걸어나올 수 있다는 가당치 않은 가능성 때문에 우리 모두는 종잡을 수 없는 지적 현기증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 현기증이 코르타사르가 이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의구심 때문에 자세한 작품 분석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1) 문학작품은 일차적으로 심미 대상이지 분석 대상이 아니며, 2) 불확실한 독서 경험이야말로 지금 아니면 미래 어느 순간에 독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한 두 가지쯤 가슴에 품고 있어, 이따금 먼 산과 하늘을 보고 그런 의문을 되새김하며, 어느 순간에 이르면 세상이 밝아지는 화려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음 글이 그런 가능성을 봉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

▶ 사진 설명: 에셔의 《갤러리》 배경이 된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아말피(Amalfi) 해변 (사진 출처: http://www.escher.info)


목차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1)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2)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