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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누두스의 난(亂)과 『오지에서의 반란』 / 최금좌 2006-10-28 / 12678   

카누두스의 난(亂)과 『오지에서의 반란』

최 금 좌




1. 들어가는 글


         출판된 지 1백년이 넘은 에우클리데스 다 쿠냐(Euclides da Cunha, 1866-1909)의 작품, 『오지에서의 반란』(Os Sertões, 1902)이 오늘날 브라질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이유는, 브라질 공화국 성립이후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던 브라질의 현대화 과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의 사회과학적 시각이 현 세계에서 무차별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횡포로 억압당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과 일치하며, 그의 번뜩이는 기지와 상상적 인식,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문체 ―극도로 현실적이고도 과학적인 드라마틱한 산문체― 가 역사적 현실의 한계 속에서 픽션이 갖지 못할 강렬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그의 관심은 언제나 브라질의 거대한 영토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의 작품들의 소재는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 ―혼혈인, 농민, 노동자― 이었고,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그가 표현하고자 한 주제는 하나로 통합된 ‘브라질의 단일성’이었다. 그는 첫 작품 『오지에서의 반란』에서 당시 인종혼합 문제를 우려하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브라질 미래를 위해 사라져야만 할 인종으로 간주한 내륙지방의 혼혈인들, 즉, “퇴행적인 인종”이라고 생각되던 세르타네주(sertanejo)들이 멸종하리라는 확신을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서로서 브라질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오지에서의 반란』은 20세기 전반에 출판된 브라질 정체성에 대한 다른 저명한 브라질 학자들의 작품들 ―실비우 호메루(Sílvio Romero)의 『브라질 문학사』, 올리베이라 비아나(Oliveira Viana)의 『(자오선에서의) 브라질 사람들』, 질베르투 프레이리(Gilberto Freyre)의 『주인과 노예』 그리고 세르지우 브아르키 데 올란다(Sérgio Buarque de Holanda)의 『브라질의 근원』― 과 함께 브라질의 고전을 형성하고 있다(Candido, 1965, p.133).

         이렇게 에우클리데스는 브라질 역사에 있어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사건을 문학의 형식을 빌려 성공적으로 엮어냈기에, 많은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작가로 존경을 받는다. 따라서 브라질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브라질 시네마 노부(Cinema Novo)의 거장 글라우베르 호샤(Gláuber Rocha)에 의해 처음으로 《신과 악마》(1964)에서 다루어지기도 했으며, 또한 그의 행복하지 못했던 비극적 가정생활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TV 연속극 《욕망》(1990)은 문맹률이 높은 브라질 일반 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는 그의 『오지에서의 반란』을 기반으로 『세상 종말 전쟁』(La guerra del fin del mundo, 1981)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시각을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오지에서의 반란』은 카누두스의 난(1896-97)의 1백 주년이 되는 1990년대 중반에는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 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이 극도로 복잡한 브라질의 역사와 문화에 성공적으로 결부되었다는 것과,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1백년 전 그가 브라질 역사를 꿰뚫어 보는 과학적인 시각이 현 세계에서 무차별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횡포로 억압당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누두스의 난: 1889년 갓 태어난 브라질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배경 속에서, 당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브라질 북동부 바이아주(州) 카누두스(Canudos)라는 마을에서 한 종교지도자와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순전히 공화정부의 정치적 논리에 의해 ‘광신도들의 난(亂)’이라고 매도된 사건. 당시 카누두스 마을사람들이 왕정복고를 시도하는 그룹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16세기 아프리카 원정 시 사라졌던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Sebastião) 왕이, 포르투갈의 왕실을 재정립하기 위해 군대와 함께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세바스티앙 왕의 재림이라는 메시아 운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가치를 그의 문학적인 특성보다도 사회학적 특성에서 찾으려는 학자들이 종종 있기도 한데, 브라질의 대표적 문학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넬송 웨레넥 소드레(1938)는 “에우클리데스야말로 브라질의 인간과 자연이 처한 상황을 직접적이고 보다 정확한 인식에 기초해 브라질의 진정한 이해를 시도한 최초의 작가이며 [...] 작품 속에서 다소 투박한 문체상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진정한 열정과 인간적인 삶에 대한 희구를 그려냈는데, 그러한 열정은 문학에 대한 그의 항구적인 도전의식과도 맞물려 있다”고 했다. 안토니우 칸지두(1965)는 브라질 사상사에서 에우클리데스의 작품 『오지에서의 반란』이 차지하는 위치는 문학과 자연주의적 사회과학의 중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문학적으로 제국주의의 종말을 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브라질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특히 약 300년 동안의 포르투갈의 식민통치기간동안 대서양 해안선을 따라 내륙으로 100km 이내만을 정책적으로 개발한 식민정책에 의해 브라질 해안지방과 내륙지방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의 차이 속에 내포하는 모순점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 꼭 적용되어야 할 분석의 틀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이 작품의 소재인 ‘카누두스의 난(亂)’을, 때 마침 신문사 통신원으로 취재하게 되었던 작가가, 나중에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진실 사이에 존재했던 역사적 오류를 고발한 『오지에서의 반란』의 분석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동시에 ‘지식과 열정’, ‘분석과 항의’라는 형식을 통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던 작가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인 인생 자체가 작품 속에 사랑과 증오로 녹아있기에, 작가의 성장배경과 가정생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브라질의 역사 및 사회적 배경과, 이 작품의 단점이자 강점으로 작용하는 혼혈인들에 대한 작가의 사고 전환과정을 논의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지배적이던 실증주의 사상에 입각한 인종우월주의를 버리고 북동부 지역의 혼혈인 세르타네주야말로 브라질 사회가 껴안아야 할 같은 동족임을 처음으로 주장함으로써 작가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브라질 정체성과 단일성에 대한 고민과 염려가 1백년이 지난 현 브라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2. 에우클리데스 다 쿠냐

2.1. 탄생 및 사상적 배경 - 열렬한 공화주의자


         1866년 리우 데 자네이로주(州) 칸타갈루시(市)의 산타히타 데 히우네그루(Santa Rita de Rio Negro) 태생인 에우클리데스는 세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원래 바이아주(州)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개인 서고 관리인으로 플로리아노 폴리스주(州)의 대농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리우, 상파울로 그리고 바이아주(州)에 사는 친척들 손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교육은 수도인 리우에서 받게 된다. 중등과정을 리우의 콜레지우 아키누에서 마치고, 대학은 당대 브라질 최고의 공과대학 에스콜라 폴리테크니카에 입학하지만,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학비가 들지 않는 리우의 프라이아 베르멜랴( 군사학교로 편입하게 된다.

         그가 성장할 당시, 즉 19세기 후반의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오직 자기 나라만이 제정(帝政)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낙후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르헨티나와 같은 주변 국가들의 변화와 세계정세에 자극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브라질 공화주의자들과 군의 장교단은 제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프라이아 베르멜랴 군사학교로의 편입은 그의 인생진로를 결정적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된다. 공화정이 수립되기 전, 이 군사학교에서의 벤자민 콘스탄트(Benjamin Constant)의 실증주의에 대한 강의는 군의 명예와 국가 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던 젊은 장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고등학교시절의 은사이자 나중에 공화정 수립과 함께 초대 국방장관을 역임하게 되는 스승의 영향으로, 에우클리데스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철학사조들에 대한 학습은 물론 인간과 자연에 관한 문제를 과학이 해결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 즉,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사회생활에 대한 법칙은 환경과 인종 그리고 각자가 처한 시대상황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콩트의 제자 테느(Taine)의 결정론, 다윈의 진화론, 스펜서의 적자생존의 법칙, 콩트와 리트레의 실증주의, 토마스 칼라일의 “역사는 위대한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영웅주의와 노예제도의 폐지를 부르짖은 시인 카스트루 알베스(Castro Alves), 브라이스, 테느, 르낭, 버크(Edmund Burke) 사상의 영향이었다. 특히 생물학적 진화로 우수한 종족과 열등한 종족이 만들어진다는 고비노(Gobineau), 지리 및 기후환경이 인간생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미국의 지리학자 더비(Orville Adalbert Derby), 지질학자 브레너, 캐나다의 지질․고고학자 하트의 이론들은, 나중에 그가 『오지에서의 반란』에서 발휘하는 과학적이고도 사실적 묘사의 기본 틀이 되었다.

         군사학교에서의 위와 같은 과학적 훈련으로 형성된 그의 실증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노예제도폐지론자가 되게 했고 또한 군주제 폐지와 함께 국민의 자유권을 보장하며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게 했다. 따라서 제정시대 군사학교의 생도시절은 평범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제정의 국방장관이던 토마스 코엘류의 군사학교 방문 시, 왕의 폐위를 부르짖으며 계획적으로 자신의 군도 사브르를 장관의 발 아래로 내던져 군에서 쫓겨난다. 상파울루로 자리를 옮긴 그는 《우 에스타두 데 상파울루》(O Estado de São Paulo)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제정에 반대하는 글을 싣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 페드로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 공화정이 성립되자, 그는 다시 군대에 복귀하였다. 이어 그는 장군 페데리쿠 솔론 히베리루의 딸 아나와 결혼하며, 졸업 후에는 군사학교에서 수학한 전공(토목공학)을 살려, 군과 관련이 있는 브라질 중앙 철도회사에서 토목기사로서 일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왜냐하면, 신생 공화국의 야심에 찬 공업육성 정책과 계속된 커피 경기의 호전으로 경제는 번영할 것처럼 보였지만, 당시 재무장관이던 후이 바르보사(Rui Barbosa)의 실정으로 도시 중산층의 생활이 극도로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우 그란지 두 술 주(州)에서는 연방주의 혁명(1892)이 발생하고, 수도 리우에서는 해군장교의 반란(1893)이 일어나자 플로리아누 페이쇼투(Floriano Peixoto)의 중앙집권적이고도 권위적인 정권은 ‘칼의 공화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혹독한 탄압정책을 썼다. 에우클리데스는 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에 항의하다가 결국 군과 결별, 상파울루주(州)에서 민간 토목공사의 감독관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그는, 다시 《우 에스타두 데 상파울루》 신문사로 복귀하는데, 신문사는 군 출신이던 그를 브라질 북동부 바이아 지방에서 일어난 카누두스의 난(亂)을 평정하기 위한 공화국 군의 마지막 4차 원정을 취재를 위해 통신원으로 특파한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반대로 그가 사건 현장인 황량한 대지에서 발견한 것은 기아에 허덕이는 군중이었기에, 그의 공화주의에 대한 확신은 여기서 일단 후퇴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 혁명 후 보수적이고 종교적이던 한 마을의 순수한 농민들이 왕정주의자들에게 회유되어 왕정복고를 부르짖으며 일으켰던 벤데이아 혁명에 비유한, 「이 반란은 진정 브라질의 벤데이아 혁명인가?」와 「진정 카누두스 마을은 왕정파들의 소굴인가?」라는 두 기사를 기고한다.

         그리고 5년 후, 상파울루주의 성 조제 두 히우 파르두에서 다리 재건축 공사를 맡게 되면서, 그 동안의 원고를 다시 정리해,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오지에서의 반란』을 출판한다.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긍정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듬해 브라질 최고의 영예인 ‘브라질 역사 및 지리학회’와 ‘브라질 문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대되고, 1905년에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히우 브랑쿠 남작으로부터 ‘알투 푸루스 국경문제 위원회’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과 맞닿고 있는 아마존 지역에 대한 국경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나중에 『페루 대 볼리비아』와 『역사의 경계』의 출판을 가능케 하지만, 늘 빈궁했던 그의 생활에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윤택하기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안정적이지 못한 토목기사로서의 생활을 계속했기에, 여러 면에서 ―육체적으로는 결핵증상으로, 정신적으로는 부인 아나의 젊은 중위 딜레르만두와의 부정한 관계로― 고통 받았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자기의 직업적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직업을 구해 가정을 지키려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던 히우의 동페드로 2세 고등학교에 이론학과 교사로 임명되는데, 이번에는 설상가상으로 부인 아나가 에우클리데스의 아들 둘과 정부 딜레르만두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 둘을 데리고 아예 그의 집으로 가출해 버린다. 뜻하지 않은 이 사건으로 그는 향년 43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남자의 명예를 걸고 딜레르만두와 총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숨을 거두기 전에 정당방위로 자기를 쏠 수밖에 없었던 딜레르만두를 용서했다. 그러나 이 젊은 중위는 나중에 에우클리데스의 둘째 아들인 에우클리데스 주이어가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도전했기 때문에, 그까지도 정당방위로 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슬픈 운명의 소유자였다.


2.2. 에우클리데스와 브라질 그리고 그의 철학 - 소외된 자들의 대변자

         24세에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43세에 사망하기까지 20년이 채 안되는 그의 활동은 군장교, 철도회사의 엔지니어, 국가 엔지니어, 여행자, 고등학교 선생으로서, 휴식이라는 것도 없이, 책을 집필할 일정한 서재도 없이, 브라질 공화국에 대한 환상에 잡혀 작품에만 열중했다. 그의 일생에 나타난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면, 첫 번째는 그가 언제나 아주 가난했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직업적으로든 아니건 간에 항상 일반대중과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변화의 순간과 상황에서도 힘없는 약자들, 사회에서 낙오된 자들, 정부로부터 쫓기는 자들이거나 억압당하는 자들 편에서 용기를 갖고 그들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을 만들려 했고, 브라질 사회문제에 대해 염려했으며, 특히 브라질 국가에 대해 염려했다. 그는 브라질을 이제까지 어떤 누구도 깨닫지 못한 시각으로 들여다보며, 브라질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소외되고 잊혀진 사람들을 포용하려했다. 특히 브라질 발견당시 대서양 해안을 따라 서식했던 파우 브라질 채취를 시작으로 포르투갈의 정책적인 식민통치방식으로 개발된 해안지방은, 오직 자연의 힘과 변화에 지배되던 내륙지방과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에, 작가로서 그의 관심은 언제나 거대한 브라질 ‘영토’와 그 땅에 살고 있는 브라질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의 소제는 자연스럽게 ‘브라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고,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그가 표현하고자 한 주제는 브라질이라는 국가 문제였다. 『오지에서의 반란』은 물론, 그의 사후에 발간된 『역사의 경계』에서도 그는 브라질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브라질에 대한 생각과 도달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관점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에우클리데스는 어떤 현실이나 역사적 사실에서 심오한 뜻을 발견하려는 철학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이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상을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3. 카누두스의 난(亂)

3.1. 종교지도자 안토니우 콘셀례이루와 카누두스 마을


         안토니우 콘셀례이루(Antônio Conselheiro)라고 널리 알려진 카누두스 마을의 종교 지도자(본명: Antônio Vicente Mendes Marciel, 1830-1897)는 세아라주(州) 출신으로, 가정불화로 1871년 집을 떠나, 세아라, 페르남부쿠, 알라고아스, 세르지페주(州)를 순례하다 1893년 바이아주(州)에 정착한다. 그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주는 경건한 자’(beatos)라는 칭호와 나중에는 이 보다 한 계급 높은 ‘상담가’(Conselheiro)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학교나 고아원의 성격을 띤 자선기관과 공동묘지를 돌보며, 가난한 신도들을 도왔다. 이것은 원래 프랑스 작은 마을의 카톨릭교 신부들이 자기 교구에 속한 가정들의 여러 대소사를 관장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당시 브라질 내륙지방에서는 카톨릭 교회의 신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교회는 부족한 일손을 돕는 자들에게 그들의 지도력과 언어표현능력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 및 다른 여러 자질을 심사하여 위의 칭호들을 부여했다.

         신도들에 대한 안토니우 콘셀례이루의 신임과 지도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브라질의 정치체제는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1889년 브라질에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의 체제가 그리스도의 적인 사탄의 힘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에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그 때까지 아무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국가와 교회를 분리시켰고, 또한 교회에서만 올려왔던 신성한 결혼식의 권한을 빼앗아,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민간결혼식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브라질에서, 특히 내륙지방에서, 공화국의 이러한 조치들을 타당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민간결혼식을 올리려는 사람들이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창녀”와 같은 인물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공화국의 또 다른 새로운 조치는 과중한 세금부과였다. 콘셀례이루는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과 함께 이미 법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정부의 세금제도를 타도하자고 선동했기 때문에, 결국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남으로 이동하던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바이아주(州) 내륙지방 바자바히스 (Baza-Barris) 강변에 위치한 벨루 몬치(Belo Monte)라는 곳에 정착, 근처 강변에서 흔히 자라는 카누두스 데 피투(Canudos-de-pito)라는 풀이름을 따 마을 이름을 카누두스라 명명했다. 당시 대부분의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결혼생활을 하며 자식들은 물론 개인 재산을 소유했었는데, 이러한 이들과는 달리, 그는 내세의 구원을 현세에서 이루려했기에 도덕적으로 매우 경건한 생활을 영위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주위의 대농장이나 목장에서 대단위로 이탈하여 그를 찾아 모여들었다. 그들은 또한 자급자족 경제의 형태를 갖출 정도로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빼앗겨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 주변 지역의 대농장주들과 콜로네이스들은 이 종교집단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카톨릭 교회로서는 더 이상 그들 이단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공화정부는 - 특히 급진적인 군대의 자코뱅파들은 - 이들이 자기들만의 자치구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3.2. 카누두스전쟁 발발 원인과 제4차에 걸친 공화군의 원정

         전쟁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새롭게 정착한 곳에 교회를 짓고자 했기에 선금을 주고 바이아주(州)의 주아주에이루(Juazeiro)라는 도시에서 목재를 주문했다. 하지만 배달은 약속한 날짜를 어기고 지연되고 있었다. 이에 애를 태우던 콘셀례이루는 그것을 직접 그들이 찾으러 가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지방판사 아를린두 레오니는 바이아주(州) 주지사 루이스 비아나에게 그들이 그곳을 침입할 것이라며 구원병을 요청했다. 따라서 주지사는 1896년 11월 마누엘 다 실바 피리스 페레이라 중위의 지휘 하에 107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렇게도 잔인하게 끝날 전쟁의 발단이 되게 된다. 한창 가뭄 때 우아우아라는 곳에서 카누두스들과 충돌한 정부군은 약 80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배했다. 정부군이 일개 반란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게 된다.

         따라서 바이아주군 총사령관이자, 에우클리데스의 장인이었던 페데리쿠 솔론 히베이루 장군은 두 번째 파병을 준비한다. 알라고아스, 세르지페, 바이아의 세 주(州) 연방군에 의해 소집된 625명의 군인들은 페브로니우 데 브리투 소령의 지휘하에 카누두스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과 같이 보이는 산들로 둘러싸인 ‘신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몬치산투(Monte Santo)라는 마을에서 진을 치고 공격할 준비를 한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이들 외부에서 들어온 수백 명의 군인들의 2주에 걸친 막사 건립과 전쟁준비의 움직임이 마치 승리의 축제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곳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던 정부군들은 카누두스들과 교전하자마자 그들의 매복전에 놀라 후퇴하게 된다. 큰 사상자 없이 어이없게 끝난 두 번째 원정의 패배는 이미 새로 탄생한 공화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중대사가 되어있었다. 갓 수립된 공화국은 종교적 색채로 위장하여, “왕정복고”를 위해 수도 리우까지 쳐들어 올 수 있는 광신도들의 국가 전복 기도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화정부는 이들을 쳐부수기 위해서 상파울루주(州) 출신이며 파라과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47세의 모레이라 세자르(Moreira César)대령을 앞세워 1897년 3월 1,300명으로 구성된 세 번째 파병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대단히 권위적이고 엄격했던 이 세자르 대령에게도 카누두스의 지도자였던 콘셀례이루만큼 정복하기 힘든 고질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간질이었다. 전쟁에 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하들의 전투력을 그는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전투 중 일으킨 두 번의 발작으로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있었기에, 전투 지형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쉽게 공격을 결정했다. 하지만 긴 행렬 끝에 지친 군사들을 숨돌릴 틈 없이, 적의 진지 깊숙한 곳에 침투되어, 익숙하지 않던 미로와 같은 그곳 지형으로부터 적시에 빠져 나오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후방에서 대포를 이용한 지원사격을 하고자했다. 하지만, 이것은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자기 군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세자르 대령의 판단은 자기들이 처해 있는 전쟁터가 이제까지 싸워왔던 평평한 평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데에 있다. 그는 장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요새에서의 승마전을 명령하며, “내가 직접 본때를 보여줘야지”라며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못 가서 배에 총알을 맞고 사망한다. 그의 후임으로 성격이 쾌활하고 단순한 60세의 페드로 누네스 타마린두(Pedro Nunes Tamarindo)대령이 전쟁 지휘권을 이어 받지만, 그 또한 곧 사망하고 만다. 카누두스들은 퇴각하는 군인들에게 타마린두 대령의 시체를 나무 가지에 걸어놓아 전시함으로써 다시는 감히 자기들의 신성한 요새를 침입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혼비백산하여 퇴각하고 있던 군인들은 자기들을 추적해 오는 카누두스들에게 무기와 탄환을 빼앗기자, 운반하고 있던 세자르 대령의 시체조차 움부라나스 마을에 두고 퇴각한다.

         반란군에 대한 진압 실패 소식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세자르 대령의 사망소식은 브라질 전 국민들을 분노로 전율케 했다. 특히 수도 리우 데 자네이루는 성난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했고, 세자르 대령의 출신지였던 상파울루에서는 모든 것을 멈추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국민들도 새로이 성립된 공화국이 ‘질서와 진보’를 내건 실증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카누두스들의 반란을 평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국가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리우의 군중들은 “왕정주의자들에게 복수를!”이나 “그들에게 죽음을!”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신문사를 비롯하여 왕정을 옹호하는 기관이라고 생각되는 곳이면 아무 데나 습격하여 파괴했다. 그리고 왕정주의자로 낙인찍혔던 인물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와중에 죽은 세자르 대령이 자기의 시체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카누두스들과 싸워 그곳을 사수할 것이라는 카보호키 작전에 대한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소문은 당시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 카보호키라고 개명한 거리들이 생겨날 정도로 일반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연방정부는 네 번째 파병을 석 달에 걸쳐 다시 준비한다. 1897년 6월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알려진 아르투르 오스카 데 안드라지 기마랑이스(Artur Oscar de Andrade Guimarães) 장군의 지휘로 당시 최신무기로 무장한 거의 1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카누두스 마을에 원정하여, 주민들의 넉 달간의 저항을 물리치고 1897년 10월 5일 마을 주민 전체를 대포와 폭탄세례로 잔인하게 몰살시키면서 이 사건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공화정부의 혹독하고 잔인했던 카누두스의 평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원정군들은 이미 전쟁 중 사망한(9월 22일) 안토니우 콘셀례이루의 묘를 파헤쳐(10월 6일) 사진을 찍은 다음, 날카로운 칼로 그의 머리를 베어 바이아 주립대학 의과대학 실험실로 보냈다. 왜냐하면 공화정부는 1만 5천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카누두스의 지도자 안토니우 콘셀례이루의 뇌에 분명 어떤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과학주의를 맹신하던 이태리의 범죄인류학자 롬브로주가 “정신병자나 범죄자들의 뇌에서는 어떤 이상이 발견 된다”라는 주장이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뇌를 검사한 니나 로드리게스(Nina Rodrigues)교수는 최종보고서에 그의 뇌가 정상이었다고 썼다(1939, p.131-3). 그러나 실험실에 보관되었던 그의 뇌는 나중에 일어난 건물화재로 소멸되고 만다.


3.3. 카누두스의 난(亂)이 남긴 것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을 방불케 한 이 카누두스의 난(亂)은 수많은 전설과 전투에 대한 책략 그리고 브라질이란 국가나 브라질 국민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들을 낳기도 했는데, 아직까지도 이 카누두스들에 대한 망령은 브라질 어디에서나 다시 살아나고 있다. 신앙과 유토피아를 착각한 안토니우 콘셀례이루는 자신이 순교자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에우클리데스를 비롯한 당대 일반 사람들은 그가 종교를 자기 멋대로 해석한 무식한 “가짜 메시아”, “자기 착각에 빠진 엉터리”, 그리고 “정신병자”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를 따랐던 카누두스 마을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추구했던 “좋은 사람”, 안타깝게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용감한 저항의 모습을 보여준 “영웅”,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체 게바라와 같은 파벨라 언덕의 “혁명가”, 그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이끄는 “사도”로 평가하고 있다.

         콘셀례이루가 이끌던 원래 카누두스 마을은 현재 북동부 가뭄 해결책으로 건설된 인공저수지 속으로 매몰되어(1969),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카누두스 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은 원래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부터 10km 떨어진 곳에 새로 세워졌는데,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저수지 건축으로 발생된 먼지사태가 이 마을을 또 다시 세 번째로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저수지 둑 위로 옛날 카누두스를 정복하기 위해 파병된 군대가 저항자들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던 파벨라 언덕과 마리우 언덕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파벨라 언덕에서의 카누두스의 저항은 너무도 유명하여, 지금 리우의 빈민촌에 다시 살아 남아있다. 언덕에 빽빽하게 들어선 판자집이 마치 카누두스의 오두막집과 흡사하다고 붙여진 이 파벨라는, 브라질 국기 색깔인 초록과 노랑과 함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다.


4. 『오지에서의 반란』 작품 분석

         에우클리데스는 ‘어떻게 정신이상자 안토니우 콘셀례이루가 수천 명의 광신도들을 이끌고 4차에 걸친 정부 토벌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희생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규명을 19세기 말 과학주의, 특히 테느의 결정론에 입각하여 환경과 지리적인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분석한 제1부 대지와 인종적 혼합으로 오지인이란 뜻의 세르타네주(Sertanejo)들이 탄생하게 된 인류학적인 측면을 다룬 제2부 인간 그리고 카누두스의 난(亂)이 일어나게 된 역사, 문화, 정치, 사회적인 배경을 다룬 제3부 투쟁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4.1. 대지

         제1부 ‘대지’에서 작가는 자기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을 총 동원하여, 브라질의 북동부 반사막지역에 대한 묘사를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지역의 생태적 환경과 지리에 대한 첫 번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작가는 브라질 북동부 오지의 기후에 대해서 “자연은 극도로 대조적인 법칙을 즐기며 변화하고 있다”(p.38)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극도로 대조적인 자연의 두 양상 -타는 듯한 태양 빛으로 인해 생긴 건조한 여름의 가뭄과 폭우로 무참히 침식당하는 겨울의 우기- 이, 불균형적인 기후조건을 형성하기 때문에, 아마존과 같은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야생식물 카아팅가(caatinga)와 선인장 종류인 만다카루스(mandacarus)와 같은 식물들을 무성케하며, 또한 돌투성이의 땅과 뜨거운 태양 빛이 이 지역을 야만적인 불모지로 만들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건조기 때의 농민들이 해안지방으로의 이주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그 원인을 가뭄에서 찾고 있다.


그곳의 풍경은 인상적이다. 놀랄만하게 들쑥날쑥한 대지의 구조적 조건은 최고로 폭력적인 외부 요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정 기간동안 쨍쨍 내려 쬐는 햇빛으로 생긴 가뭄 후에, 갑자기 홍수를 일으킬 만한 폭우를 가져오는 극단적인 특징을 가진 기후의 규칙적인 반복은, 산맥의 심한 경사를 깎아내어, 가장 오래된 부스러기 조각들을 멀리 떠내려보낸다. 따라서 거칠은 석영이나 석회석 같은 다양한 종류들의 돌의 결정체들은 서로 겹치거나 엉켜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어렵게 하는 것은 물론, 여기 저기 듬성듬성 난 식물들조차도 제대로 자랄 수 없는 고통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p.13)


         이러한 비극적인 자연환경 속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는 내륙지방 사람들, 즉 세르타네주들에 대해 1부 마지막에서 그는, “저 거대하고 웅장한 대지로부터 세속적인 인간들의 순교가 발생한다... 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순교란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을 반영한 것으로, 이것은 진정한 인간의 삶이 아니다”(p.44)라고 아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4.2. 인간

         제2부 ‘인간’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브라질인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가장 역설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작가 역시 19세기 인종 결정론의 영향하에서 브라질 인종문제를 다룬 최초의 사회학자였던 호메루의 주장 - 인종의 혼합의 과정이 끝날 때쯤이면 백인들은 그들의 인종적인 우월성으로 결국에는 브라질 인종의 백인화(branqueamento da população)가 이루어져 브라질 특성이 나타나게 될 것 - 을 벗어나지 못하고, 브라질 북동부 내륙지방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채, 열등인종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장의 끝 부분에서 오히려 그들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세르타네주들이 어려운 자연환경은 물론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고립된 상황에서도 토지 소유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인종에 대한 개념은 먼저 백인이 혼혈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강한 인종인 백인이 약한 인종인 혼혈을 지배할 것이라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된 그의 사고의 배경은 “인종이 아주 많이 혼합되다 보면, 결국 열등한 인종의 출현으로 브라질 인종이 퇴화될 것”(p.77)이라는 데에 있다. 또한 그는 브라질 인종의 특징인 흑인과 포르투갈인 그리고 인디오의 혼합은 운명적으로 브라질인종의 단일화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장래에도 “브라질인들은 절대로 단일 인종을 갖지 못할 것”(p.51)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는 전반부에서 브라질 인종에 대해 “(우리 브라질인들은) 문명화되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에 발전을 하여 살아 남든지, 아니면 도태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p.52) 라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미래의 진보된 브라질 인종을 위해서는 열등한 인종이 “개종”되거나 “완전히 소멸”되던지, 아니면 그들보다 월등한 백인들의 “문명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러 인종이 혼합되어 생긴 세르타네주들을 브라질 인종의 생물학적 후퇴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보에 대한 부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후반부에서 이들이 거대한 문명의 변화들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기에, “세르타네주는 무엇보다도, 강하다. 그들은 해안지방의 신경쇠약에 걸린 메스티조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심리적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p.81)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앞의 주장과는 상당히 모순된 표현을 씀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독립된 계층으로 인정한 첫 작가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그가 자기의 인종에 대한 시각을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절충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내륙지방의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마멜루쿠(mameluco)와 흑인들을 노예로 들여왔던 바이아주(州)와 마라냥주(州)의 해안지방에서의 백인과 흑인의 혼합인 물라투(mulato)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마멜루쿠들은 해안지방의 “우수한” 도시문화와는 상관없이 인간이 살기에 극도로 어려운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승리자들이었던 반면, 물라투들은 대도시에서 자신들이 미처 수용할 수 없었던 문화적 삶의 형태와 접촉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마멜루쿠들, 즉 세르타네주들을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잘생기고 용맹스러운 전투적인 용사 헤라클레스”와 “못생기고 왜소하며 괴물 같은 노트르담의 곱추 콰지모도”의 두 가지 대조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긍정적이지 못한 외모에 대해서는 “왼손잡이 시골농부의 촌스러운 모습으로부터, 놀랍게도 비상한 힘과 민첩성을 발휘하는, 강한 구리 빛의 지혜로운 지배자, 타이탄 신의 면모를 무의식적으로 나타낸다”(p.81)라는 감탄의 표현을 쓰고 있다. 동시에 그는 주위의 대농장주로부터 자행된 만행과 폭력에 시달리며 어려운 자연환경에 저항하여 살아온 세르타네주들이 갖고있는 충동적인 야만성에 대해서, “가장 고집스럽고, 가장 저항적이고, 가장 위험하고, 가장 강한, 그리고 가장 견고한 브라질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p.84)이라는 표현으로 경의조차 표하고 있다.


4.2.1. 종교

         앞에서 설명한 자연환경과 인종적 혼합 요인 때문에, 에우클리데스는 이들 세르타네주들의 종교적인 측면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연적 환경과 싸워야 하는 이들은 일정한 토지에 정착하지 못하거나 유목생활을 하기 때문에, 극도로 야만적인 기질을 갖고 있으며 그에 준한 조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 세르타네주들은 좀 더 높은 심원한 세계를 지향하는 조직적 능력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지금 알 수 없는 유일신을 믿고 있다. 그들의 종교란 인디오들과 아프리카인들의 미신적 요소들로 가득 찬, 극도로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고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원시적으로 대담하고 강한 면이 있지만, 또한 단순하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은 미신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의 혈통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가 혼합된 것이다.(p.96).


         에우클리데스는 카누두스들이 맹목적으로 강한 종교적 성향을 보이는 이유를 그들의 고립된 생활의 결과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신비주의적 종교의식들은 인종적으로 분류될 수 없는 그들의 태생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결과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실증주의자답게 세르타네주들이 카톨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적 감성에 충만되어, 미신적 요소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카누두스의 난(亂)을 국가의 거대 사건으로 묘사하며, 동시에 브라질을 분열케 하는 요소들을 찾아내려 했기에, 그 결과로 브라질의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연결고리들이 브라질의 발전을 저지했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도 여러 변태적 신비주의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두두스들이 광신적인 종교집단이 될 수 있었다고 본 그는, 자기가 영웅적으로 묘사한 세르타네주들이야말로, 해안지방 엘리트들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장의 마지막에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같은 종교에 관심이 있다면, 이미 상대방의 알려진 악덕이나 과실을 용서하며, 하나로 뭉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기에, 바로 이점에서 그는 브라질 발전을 위해 방해가 되는 장애 조건들이 극복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장점을 드러내고 있다.


4.2.2. 예언자

         에우클리데스는 “대담한 안토니우 콘셀례이루는 우리 브라질 정체성을 좀 먹는 요인들인 미신들과 잘못된 것들을 병적인 신비주의에 집약시켰다[...]”(p.119) 라며 계시록에 심취한 허풍쟁이로 묘사했다. 작가는 사람들이 미치광이 안토니우 콘셀례이루를 정신병원에 감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브라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인물이 되었으며, 또한 그가 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을 브라질의 뒤늦은 산업발전에서 찾았다. 따라서 그는 “열등한 인종들은 사납고 거칠은 오지에서의 생활 때문에, 충동적인 성향을 갖게되었고, 따라서 종교에서도 일정한 질서를 갖출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야만적인 미신들로부터 카톨릭의 이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수한 신앙들을 신비주의 속에 응축시켰다”(p.102)라고 묘사하고 있다.

         실증주의 사상에 심취한 에우클리데스는 카누두스 마을 사람들의 종교성에 대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환경적 요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안토니우 콘셀례이루와 관계된 모든 현상을 그의 정신이상 - 즉, 인종 혼합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한 종교지도자의 불안정성에 의해 생긴 어리석음 - 에서 찾았다. 냉담한 편집증자, 이러한 표현은 아마도 그를 묘사하는데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내내 보인 그의 사상적인 퇴보는 그가 정신이상자라는 뚜렷한 증거이다.(p.103)


4.2.3. 카누두스 마을

         카누두스 마을은 정의와는 거리가 먼, 오만불손한 야만인들이 응집한 곳이었다. 즉, 그들은 미치광이 예언자의 강압에 이끌린 일반인들이 자기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의 마지막 재림을 기다리는 신비주의 집단이었다. 에우클리데스는 벨루 몬치(Belo Monte)를 지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진흙으로 만들어진 괴물덩어리라는 뜻의 우리비스(urbs), 음흉한 실수덩어리들의 집합소라는 뜻의 비비타스(vivitas),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이 전혀 아닌 곳, 가엾게도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의 재림을 믿고 기도와 찬송을 드리는 하늘 제단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카누두스들은 유명한 범죄 집단이다. 환상에 사로잡힌 목동들과 오지의 단순한 촌뜨기들이었던 그들 중에서도, 칼과 창으로 무장한 사악한 영웅들이 저기로부터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그의 명령이 하달되도록 도와주며, 아무도 그의 위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가 가장 선호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습게도 그가 잘 길러낸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가사의한 종교분파는 도덕적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이상적인 기독교적 아름다움을 미신적 변칙 속에서 괴물로 나타내고 있다. 즉 그들은 카톨릭 묵주를 세면서도, 가공할만한 무기에 총알을 넣을 수 있는, 야만적인 신도들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표자가 되었다.(p.130)


         하지만 에우클리데스는 여기서 그들에 대한 자기의 편견을 버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카누두스들 편에서 그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그들이 지칠 줄 모르는 투사들이며 진보적이면서도 강한 인종의 상징으로 “그들은 그들이 받아야할 마땅한 대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정부는 그들의 문제를 합법적이고도 유일한 최상의 도덕적 해결법으로 풀려 했는데,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우리로 하여금 엉뚱한 전쟁을 치르게 했다”(p.140) 라고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카누두스의 난은 결정적으로 오지에 형성된 마을 하나를 파괴하는 아주 작은 영광이나 바보같은 기능보다는 좀 더 숭고한 목적이 있어야만 했다. (당시 위정자들에게는) 생각보다 더 오래 지연되고 있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국민 모두가) 투쟁해야할 좀 더 심각하고도 고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이 저 야만적이며 바보스러운 (오지의) 동포들을 (도시에 사는 문명화된) 우리의 존재에 통합시켜, (우리) 시대에 걸맞는 사람들로 만들어 낸다는 명분을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이 카누두스 난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련의 국가조치는) 단지 아무 소용이 없는 야만적인 범죄에 불과했을 것이었다.(p.350)


         이렇게 단순히 신비주의자들과 도적 떼들의 집합장소였던 카누두스 마을은 무례한 자기들의 동포들인 공화군들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작가는 그 원인을 카누드스 마을 사람들이 억울하게도 사회적으로 소외되었었다는 것에서 찾았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만일 작가가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과 실증주의 이론으로 편견을 갖고 줄곧 그들에 대한 비난을 해댔다면, 이 작품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콘셀례이루는 단지 미치광이로, 그리고 카누두스 마을은 도적 떼들의 몰살 장소 정도로만 여겨졌을 것이고, 또한 카누두스의 난(亂)조차도, 하나의 역사가 흐르는 법칙이며 원동력인, 서로 다른 인종들 간의 투쟁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우클리데스의 위대함은 “세르타네주들이 국가 정체성을 이루는 주춧돌”이며, 카누두스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학살이야말로 한 국가가 자기 자신을 향해 저지른 문명화를 거스르는 범죄라고 결론짓고 있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바자바히스 강변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한 사건을, 한 치의 거짓 없이 심도 깊게 이해하려 했던 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4.3. 투쟁

         제3부 ‘투쟁’에서는 카누두스의 난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제4차에 걸친 정부군의 파병, 그리고 세르타네주들의 저항과 용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은 폭력 그리고 전쟁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게 부각되어, 대서사적인 드라마틱한 강렬함이 돋보인다. 제4차 정부군 파병을 현장에서 지켜봤던 작가는 정부군의 전략적 실수와 식량 및 무기의 조달부족사태, 그 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군인들의 굼뜬 동작, 게릴라 전법으로 대항하는 카누두스들에 대한 정부군의 전통적이고도 보수적인 구태의연한 전투 형태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동시에 그 곳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세르타네주들의 용기와 결단력에 대해서는 “정당한 이유”로 자신들을 의로운 전쟁에 임하는 카누두스들이 자기들에게 이롭게 전쟁을 끌고 가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장면은 다른 어떤 부분들보다도 카누두스들의 마지막 저항에 대한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병마와 기근 그리고 부상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오지인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거의 전멸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쯤 마치 귀신처럼 다시 살아 나타났다. 따라서 작가의 오지인에 대한 편견은 그 순간 오히려 경탄과 존경으로 바뀐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굉장한 일이 일어났다. 보기 흉한 적들이 놀랄만한 힘을 갖고 다시 되살아났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과 싸워왔던) 공화군들은 자기들의 적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는 단지) 자기들을 매복작전으로 유인하는 교활한 사람들로만 보였던 적들이, 그날에서야 자기들의 가공할만한 무기를 기반으로 벌이는 즉흥적인 공격에도 재빨리 도망하여 붙잡을 수 없는, 전혀 지배할 수 없는 영웅들로 생각되기 시작했다.(p.375)


그리고 “제압할 수 없는 무례하고도 고귀한” 오지인들의 전설적인 저항은 작가로 하여금 권위있는 공화정부의 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풍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승리자들, 저들 승리자들은, [브라질] 역사에서 기록된 승리자들 중에서도 가장 브라질적인 승리자들은 그 순간 자기들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무너짐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 ―기관총 6천 자루와 군도 6천 자루, 6천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공격과 1만 2천 켤레의 군화들의 발자국소리, 6천 자루의 총, 20대의 대포 그리고 수천 개의 수류탄과 수천 개의 대포탄알, 참수형, 방화, 기근 그리고 갈증, 10 개월간의 전투 그리고 100 일간 계속된 대포 쏘기, 대포로 파괴된 지역 진압,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그들의 성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투로 난장판이 된 장면들, 파괴된 제단들, 조각난 성자들의 동상들― 은 고요하고도 맑은 하늘의 무감각 아래에서, 그들의 불타는 이상을 몰락시킬 수 없었고, 또한 그들에게 강하고도 위안을 주는 믿음을 완전히 멸종시킬 수 없었다.(p.397)


         1897년 10월 5일 정부군의 마지막 공격에 대해 분노한 작가는 인간 학살과 잔인성, 그리고 무엇이나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가능케 한 현대 문명의 이기를 꼬집으며, 카누두스들의 파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3세기에 걸친 미개함에도 불구하고, 오지인들은 공화군들이 보인 것과 같은 잔인함을 보이지 않았다.”(p.378)

        어제의 문명인이던 공화군이 오늘의 야만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작가는 이 작품의 처음 부분에서 보이고 있던 편견을 번복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공화군은 이제 법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진압 중인] 공화군은 [오지인들이 살고 있던] 천막을 처음 발견하면, 아주 세속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들은 희생자들로 하여금 공화국 만세를 부르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잔인한 장면의 첫 순서에 불과했다. 전혀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오지인들의] 머리를 잡아당겨, 목이 잘 보이게끔 목에 있는 것을 다 풀어헤쳐, 목젖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면, 그들의 목을 베었다. 살인자들의 열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러한 음침한 준비들을 하여, 그 순서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시켰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큰칼로 그들의 목을 땄다. 그리고 단 한번의 칼 놀림으로 아랫배를 따서 아주 빨리 내장을 꺼내기도 했다. 어떤 군인들은 명백하게도 자기들의 군대 수장들이 비준한 이러한 무언의 불쾌하고도 비겁한 행위에 괴로워했다.(p.378)

따라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행해지는 목 따기는 실로 아주 간단히 실행되었다. 그것은 난(亂)을 진압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었다. 그것은 법의 엄격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복수였던 것이다. (p.381)


         다이나마이트 폭탄에서 나는 연기와 집을 삼켜버린 불에서 뿜어나오는 연기 아래에서 꼼짝 않고 저항하던 세르타네주들에 대해 작가는 이들이야말로 “브라질 국가의 중심부”(p.398)를 형성하며, 공화주의자들이 파괴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브라질 민족의 살아있는 주춧돌”(p.39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 결론

         역사와 허구를 작가의 뛰어난 문체와 그 만의 창의력과 독창성으로 잘 배합시킨 1902년 『오지에서의 반란』의 출판을 계기로, 브라질 사회 내부 문제에는 등을 돌린 채 유럽 지향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브라질 엘리트들은 처음으로 자국의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경제 및 사회․문화 발전의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사회 내에 존재하는 문제점, 즉, 지역간의 차이로 야기된 카누두스의 난(亂)이 잔인한 인간학살 사건이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광신도들의 난으로 매도되어 집단 학살된 사람들이 종교적 이단의 무리가 아니라, 단지 소외된 자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코앞에 둔 현 브라질 사회 내에서는 놀랍게도 100년 전 ‘카누두스의 난’을 평정한 똑같은 방식으로 무토지 농민들의 운동(MST-Movimento Sem Terra)을 저지하고있다. 그 좋은 예가 1996년 4월 17일 파라주(州) 카라자스의 엘도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파라주 전투경찰은 무단으로 대지주의 땅을 점거했던 농민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17명의 농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50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는 명백히 에우클리데스가 『오지에서의 반란』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문제들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는 브라질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들 - 농민들의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문제, 추수기 때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이동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 그리고 무토지 농민문제 - 로, 이것은 현재 브라질에 존재하는 생산적이지 못한 대농장, 소수의 토지에 대한 집중현상, 권력을 쥐고 있는 기득권층의 완고함, 그리고 당국의 직무유기와 같은 파생적 문제들과도 관련이 있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탄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환경과 인간 그리고 역사 사이의 상관관계로 브라질 문제를 분석했던 에우클리데스는 『오지에서의 반란』에서―비록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결정론에 입각한 인종에 대한 그의 사고는 약간의 혼란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세르타네주들의 실상과 브라질 공식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단절을 나타내는 면들을 다각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브라질 내륙지방에서 일어난 세르타네주들의 영광스러운 인간승리를 강조하며, 카누두스들이 파괴되었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그들을 이 현 세계에 부활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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