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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 담론과 이데올로기 - 아이티와 마르티니크 / 심재중 2005-09-16 / 14818   

정체성 담론과 이데올로기
― 아이티와 마르티니크의 흑인 정체성 담론을 중심으로

심 재 중



Ⅰ. 머리말


카리브해 지역의 프랑스어권에 속하는 아이티(Haïti)와 마르티니크(Martinique)는 서로간의 현실적인 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1), 카리브해 지역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렇듯이 식민 지배와 노예제라는 공통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숱한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층위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2차 대전을 전후하여 탈식민 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문화 정체성에 대한 논의들, 특히 ‘흑인 정체성’에 관한 담론들은 이 지역의 모순과 갈등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이래의 노예 매매에서 비롯된 유럽-아프리카 관계의 특수성, 그리고 그 특수한 관계가 만들어낸 지배-피지배 관계의 역학이 이 지역의 현실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숱한 모순과 갈등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흑인 정체성 담론은 쉽사리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피부색이 감추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관계, 예컨대 흑인, 물라토, 백인, 기타 인종들 사이의 상호의존과 갈등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지배하는 공동체 내에서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갖는 위험, 즉 배타적 이데올로기로 빠져들 위험을 보여주기도 한다.

1) 아이티는 정확히 2세기 전부터 독립 공화국의 지위를 누려왔고, 마르티니크는 1946년에 해외 도(道)의 자격으로 프랑스 공화국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또한 인구 규모(아이티: 750만, 마르티니크: 40만), 인종 구성(아이티: 물라토 5%, 흑인 95%, 마르티니크: 백인 5%, 흑인과 물라토 90%, 기타 5%), 소득 수준(아이티: 일인당 약 500달러, 마르티니크: 일인당 약 5,000달러), 문화적인 특성 등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언어에 있어서도 아이티의 경우에는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이긴 하지만 실제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10%에 불과하다.

이 논문은 정체성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그러한 상관관계를 아이티와 마르티니크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배타적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으면서 탈식민화의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일종의 전망으로서 이 지역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요 정체성 담론들의 특징을 ‘혼종성’의 관점에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는 이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지만, 오늘날 문화 연구의 장에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인문학적 논의에도 좋은 사례 하나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카리브해지도


Ⅱ. 아이티의 흑인주의와 뒤발리에 체제

국제기구들이 제시하는 기준으로 볼 때, 아이티는 전체 인구의 80%가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비참한’ 나라이다. 또한 아이티는 전체 인구의 1-2%가 전체 국민 소득의 50%를 장악하고 있는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나라이다. 또한 아이티는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질병, 인신매매와 아동 학대 등의 사회적 폭력이 착잡하게 얽혀 있는 ‘절망적인’ 나라이다. 예컨대 아이티는 에이즈 감염률이 위험한 수준에 다다른 나라이고, 미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에 보트 피플을 수출하는 나라이다.2) 그러나 마르티니크 출신의 프랑스 시인이자 네그리튀드 운동의 선구자였던 에메 쎄제르(Aimé Césaire)는 1939년에 한 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아이티를 “네그리튀드가 처음으로 일어선”(Césaire 1956, 44)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쎄제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이티가 1804년에 흑인 노예 반란을 통해 세워진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티에서 민족 정체성으로서의 흑인성에 대한 자각이 문학적·지적 담론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915년에서 1934년에 이르는 미국 점령기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 아이티 흑인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쟝 프리스-마르스(Jean Price-Mars)였다.

2) 아이티의 사회‧경제 구조와 그 현황에 대해서는 이남섭(1996) 참조.

장 프리스-마르스는 기층의 민중 문화 속에 뿌리내린 아프리카적인 요소들(부두교, 크레올어, 구전 전승, 등), 기존의 공식 문화에 의해 미신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되어 왔던 것들을 아이티 고유의 문화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적극 긍정하자고 주장하였다(Corzani et al. 1998, 41-43). 그리고 미국 점령 시기의 말엽에 이르면, 그의 이념은 일군의 작가들을 통하여 ‘토착민주의’라는 이름의 뚜렷한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것은 농촌의 기층문화 속에 방기되어 왔던 아프리카적인 요소들을 채집하는 민속지적인 성격의 문학이었고, 아이티 민중의 피 속에 잠들어 있던 아프리카 흑인의 영혼을 일깨우는 정체성 문학이었으며, 동시에 ‘구토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비참했던 당시의 농촌 현실에 대한 정치적 자각의 문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티의 토착민주의는 탈식민적 정체성의 담론이면서 동시에 지배 물라토 계층에 맞서는 좌파적 이념이기도 하였다.


물을나르는아이티여인
▲ 물동이를 인 아이티 여인


그 이후로 부두교를 비롯한 토착 민중문화와 카톨릭·프랑스어로 표상되는 유럽적인 문화는 ‘흑인으로서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자각’과 ‘물질적 진보’라는 대의 사이에서 항상 논쟁거리가 되어 왔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계층간의 사회·경제적 갈등과 불평등이 놓여 있었다. 그러한 사정은 예컨대 1930년대에 ‘자신의 아프리카적인 영혼을 프랑스의 언어로 길들일 수밖에’ 없었던 내적 분열과 갈등을 노래한 레옹 랄로(Léon Laleau) 같은 시인이, 그 지역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랬듯이,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고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어와 프랑스-유럽적인 문화는 언제나 상층 지배 계급의 문화였고, 90%가 넘는 대부분의 민중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결국 아이티 민중의 흑인성에 대한 각성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적인 사유와 문화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요컨대 문화 정체성을 둘러싼 대립과 계층간의 정치‧경제적 대립 사이에는 복잡한 역학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지배라는 굴욕적인 상황 앞에서 아이티의 지식인 계층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지배 엘리트 계층은 아이티의 프랑스적인 문화 정체성을 내세워서 미국의 ‘야만적인 지배’에 저항하려 하였다. 반면에 장 프리스-마르스는 흑인-아프리카적인 정체성을 통하여 민족 공동체의 와해를 막아내려 시도하였다. 그때까지 프랑스어와 프랑스적인 문화를 독점하면서 자신들의 밝은 피부색을 계급적인 표지로 인식해왔던 지배 물라토 계층은 장 프리스-마르스의 입장을 ‘문명과 진보를 포기하고 야만의 상태로 회귀하자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반면에 장 프리스-마르스는 지배 엘리트 계층의 그러한 태도를 ‘집단적 보바리즘’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전자의 비판 속에는 문명과 진보라는 미명 하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후자의 비판 또한 특정한 계층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태도 표명일 수 있었다. 예컨대 토착민주의 또는 흑인주의가 민중적‧아프리카적인 전통을 프랑스적인 문화와 거의 대등한 지위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3), 실제 기층 민중의 삶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엄격하게 사회‧정치적인 문맥에서 볼 때, 흑인 정체성 담론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으로 내세웠던 것은 이제 막 형성 단계에 있었던 소수의 ‘흑인 중간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시기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흑인 출신의 직업 군인, 하위 공무원, 학생 등등이 흑인 정체성 담론의 물적 토대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물라토 못지않게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흑인들이었을 뿐이다.

3) 그 정점을 이루는 ‘사건’ 중의 하나가 1946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 에메 쎄제르의 아이티 방문이다. 그것은 흑인주의를 추종하던 아이티 지식인들에게 마치 가톨릭 신자들에게 교황의 방문이 주는 것과 같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아이티 흑인주의의 근본적인 역설 하나를 읽어낼 수 있다. 서구라는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순에서 벗어나려 했던 흑인주의가 또 다른 종류의 보바리즘에 바닥을 대고 있다는 역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흑인주의가 소외된 대다수 민중 계급을 포괄하는 공론의 장, 그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티 특유의 정치적 상상력을 규정지어 온 것은 ‘비인간적’이라는 수식까지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한 사회·경제적 현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현실 인식 대신에 소위 ‘신비주의적’ 현실 인식이 힘을 발휘하고, 현실의 모순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을 모색하기보다는 ‘악마론적 이분법’의 도식으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인 나라―그것이 바로 아이티였다. 예컨대 50년대에 접어들면서 흑인‧민중 문화는 역설적이게도 문화 상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하였고4), 반면에 이념으로서의 흑인주의는 일종의 아프리카 근본주의(‘부두교가 아이티의 유일한 종교이고 크레올어만이 유일한 언어이다.’)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뒤발리에(Duvalier) 독재 체제가 부두교를 기반으로 하는 기층 민중의 지지를 권력 기반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흑인주의는 결정적으로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갔다. 또한 그때부터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종교 사이의 긴밀한 역학관계가 아이티의 정치 현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4)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부두교 제의의 잔혹성과 음란성에 대한 외지인들의 호기심 또한 증가하였다. 결국 제의는 거의 공연물로 전락하였고, 수도인 포르-토-프랑스에서는 성소를 네온으로 장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단적으로 말해서 뒤발리에 체제는 ‘악마론적 상상력의 제도화’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Corten 2001). 소수 중간 계층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라는 측면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진보적인 활력과 탈식민적인 전망을 지니고 있었던 흑인주의가 뒤발리에 체제 하에서는 지극히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던 것이다. 뒤발리에 체제의 흑인주의 이데올로기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전통적 지배 계층인 물라토들만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탄압의 대상이었고 공산주의자들도 탄압의 대상이었다.5) 다시 말해서, 뒤발리에 체제의 흑인주의는 대다수 흑인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몇몇 악마적인 세력들의 탓으로 돌리는 비이성적·비합리적·주술적인 현실 인식을 일반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계급적 정체성을 인종적 정체성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이의제기를 봉쇄해버리는 전략6), 아이티의 전 역사를 흑인 종족의 구원의 역사로 신비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원을 한 흑인 지도자의 형상 위에 고정시키는 전략―그것이 뒤발리에 체제가 기층의 민중 문화, 특히 부두교를 활용하여 구사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5) 특히 뒤발리에가 종신 대통령에 오른 1964년을 전후한 시기에 두드러졌던 현상이다. 어쩌면 뒤발리에 체제의 성공을, 좌파 혁명의 가능성에 절망한 지식인 계층이 대중적 파시즘으로 기울어간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이티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이다.
6) 흑인이 지배 엘리트 계층이 되면서 흑인주의 이데올로기는 소외 계층의 계급적인 각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부두 신앙은 아이티 기층 민중들의 삶 속에서는 거의 일상생활의 일부이고, 그 핵심은 정령 숭배와 주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조상의 정령들은 아이들을 악귀로부터 지켜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정령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의례를 주관하고 악귀를 물리치는 비법을 알려주며 주술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바로 부두교 사제들이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뒤발리에는 농촌의 부두교 사제들을 조직하여 권력의 대리인으로 사용하였다. 무보수였지만 권력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자부심이 소위 ‘통통 마쿠트(tontons makouts)’7)들로 하여금 체제의 적극적인 동조자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뒤발리에 체제의 입장에서 그것은 민중의 종교적 상상력을 정치적 상상력으로 전환시키는 장치였고, 또한 민중의 자발적인 동의 위에서 민중을 분할하여 지배·통제하는 장치이기도 하였다.

7) 원래는 도깨비나 악귀를 뜻하는 크레올어. 정식 명칭은 ‘국가보위대원’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약 4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위대원을 해치는 것은 뒤발리에를 해치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1986년에 뒤발리에 체제가 무너지고 아리스티드(Aristide)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도, 현실을 악마론적으로 재현하는 뒤발리에 식의 정치적 전략은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해방의 종교였던 부두교가 억압의 종교로 전환되고 오랫동안 지배와 억압의 종교였던 카톨릭이 저항과 해방의 종교로 탈바꿈하였다’는 식으로 ‘아리스티드 현상’8)을 설명하는 것(이남섭 2000)은 그다지 정확한 설명으로 보이지 않는다. 첫째로, 카톨릭의 교리나 신학 체계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일 것 같지만, 아이티 기층 민중들의 삶 속에서 카톨릭과 부두교는 전혀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다(Métraux 1958, 287-317). 둘째로, 199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아리스티드는 자신의 출마를 신과 민중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규정하였다(Corten 2001, 114). 신과 민중, 그리고 자기 자신 사이에 등가관계를 세우면서, 독재자를 처벌한다는 임무를 중심으로 민중의 정치적 상상력을 종교적으로 재구성했던 것이다. 전도된 방식이긴 하지만, 아리스티드 역시 기층 민중의 신비주의적 성향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던 셈이다. 다시 말해서 좀더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카톨릭을 활용했다기보다, 해방 신학을 신비주의적 구원의 신앙으로 포장함으로써 기층 민중의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8) 해방신학자이자 빈민선교 활동을 주로 해 온 카톨릭 신부 출신의 아리스티드가 카톨릭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시민 운동, 혹은 대중 운동을 통하여 1990년 선거에서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현상.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아이티의 흑인 정체성 담론은 식민주의의 배타적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차용함으로써 지배 권력의 전체주의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마르티니크와 네그리튀드

쎄제르일반적으로 네그리튀드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문화‧정치적 운동은 30년대에 파리에서 하나의 문학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에메 쎄제르에 의하면 그것은 ‘흑인 민중의 모든 가치들’을 가리키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회‧문화적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단어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운동으로서의 네그리튀드, 아프리카, 마그레브, 카리브 지역의 탈식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운동으로서의 네그리튀드이다. 본 연구에서는 주로 마르티니크와의 현실적인 관련 속에서 네그리튀드 운동의 의미와 한계를 검토해 보려 한다.

이제는 네그리튀드의 고전이 되어버린 에메 쎄제르의 『귀향 노트』(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1956)가 처음 세상에 발표된 것은 1939년의 일이었다. 『귀향 노트』는 고향인 마르티니크의 풍경 앞에서 시인이 경험한 내적 의식의 동요와 변화를 강렬한 이미지와 일탈적인 구문, 혁명적인 열기가 느껴지는 격렬한 문체 속에 담은 산문시이다. 그 시에서 ‘귀향’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마르티니크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낯설어할 수밖에 없는 한 시인-지식인의 역설적인 귀향이다. 체념과 절망에 빠져 있는 마르티니크, 삶에 대한 신념도 열정도 상실한 채 무기력에 빠져 있는 마르티니크인들의 병든 의식―오랜 식민 통치의 결과인 그 소외의 풍경 앞에서 시인은 차라리 상상의 공간으로 달아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식으로 시인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고통받고 모욕당한 마르티니크 흑인들의 불행을 고발한다. 결국 그 시에서 ‘귀향’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땅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소외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시인의 바램, 그 강렬한 희망과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귀향’인 셈이다.

쎄제르의 『귀향 노트』는 식민지 흑인들의 존재론적인 소외와 그 소외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의 외침이었고, 유럽적인 가치에 의해 억압당해 온 흑인성을 깜깜한 망각의 어둠으로부터 복원해내려는 외침이었다. 또한 치욕스런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탄생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과거로부터 대물림되어 내려온 열등 콤플렉스의 굴레에서 마침내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을 양손에 움켜쥐고자 하는 인간적 존엄성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서, 쎄제르의 네그리튀드는 되찾아야 할 ‘기원의 존엄성’, 신화적이고 우주적인 색채로까지 장식된 ‘기원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티와 마찬가지로 마르티니크에서도, 정체성의 문제는 인종, 계층 간의 사회·경제적 갈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였다. 예컨대 문학의 경우에, 네그리튀드 담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그 지역의 문학을 주도한 것은 19세기 이래의 백인 문학, 이국 취향의 크레올 문학, 그리고 흑인 동화주의라 지칭되는 경향의 문학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프랑스어를 매개로 한 문화에의 접근은 거의 전적으로 백인들이나 소수 물라토들만의 특권이었고, 당연히 초기의 백인 문학은 지배 계층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문학이었다. 예컨대 흑인들은 영원토록 노예의 신분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샴의 저주론’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1848년에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사회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그렇게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백인 지배 계층의 문학은 탈역사적인 순수성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노예의 신분에서 노동자의 신분으로 옮겨간 유색인들의 삶의 조건은 여전히 최악이었고, 19세기 후반부터 일반화된 교육 덕분에 서서히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유색인들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식민 지배의 잔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택한 수단은 프랑스 공화국과의 완전한 동화였고, 바로 그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국 취향의 크레올 문학과 흑인 동화주의 문학이었다.

결국 마르티니크의 지역·문화‧정치적 특수성과의 연관 속에서 네그리튀드 운동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는 동화와 독자적인 정체성의 추구 사이의 대립, 혹은 선택의 문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미국 점령기의 아이티에서 프랑스적인 문화 정체성을 추구하는 입장과 흑인 정체성을 주장하는 입장 사이에 놓여 있었던 정치·인종적 대립과 유사한 성격의 대립이다. 1934년에 이미 쎄제르는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흑인 인권 운동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잡지인 『흑인 학생』(L'étudiant noir)의9) 창간호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동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동물상(相)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며, 자연의 법칙인 이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Corzani et al, 1998) 동물상이라는 비유나 자연의 법칙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네그리튀드의 바탕에는 혈통이나 땅의 순수성에 대한 열망이 놓여 있었다. 일종의 흑인-아프리카 근본주의로 귀결되는 그러한 급진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30년대 안틸-카리브해 지역의 프랑스적인 지배 문화를 주도하던 물라토 계층에 대한 흑인 지식인 계층의 반감도 틀림없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9) 쎄제르, 생고르(Senghor), 다마스(Damas)가 공동으로 만든 잡지로서 네그리튀드 이론의 온상 역할을 하였다.

어쨌든 아이티의 토착민주의나 흑인주의, 에메 쎄제르의 네그리튀드가 오랜 식민 지배의 결과로 거의 내면화되다시피 한, 유럽-백인 문화에 대한 흑인들의 열등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때까지 그 지역의 흑인들은 프랑스적인 필터를 통하여 세계를 바라보았고, 심지어는 스스로의 근본적인 토대조차도 프랑스적인 관점에서 이국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내면의 건축물, 자신의 세계, 자기 삶의 순간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Bernabé et al. 1990, 14) 끔찍한 사태 앞에서 흑인들에게 아프리카라는 뿌리를 되돌려 준 것이 바로 쎄제르의 네그리튀드였다. 그러나 그 바탕에 놓여 있었던 피와 땅의 순수한 기원-뿌리에 대한 열망은 결국 네그리튀드를 하나의 이데올로기, 나아가 일종의 존재론으로 바꾸어버린다. “네그리튀드 개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존재론으로 굳어지면서 다음과 같은 역설을 보여준다. 노예제의 역사적 상흔 때문에 자기 소외 상태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와 자존을 일깨워주고 부추겨주기 위해 공식화되었던 것이, 오히려 그 사람들의 존재를 일종의 신체의 형이상학 속으로 증발시켜버린 역설.”(Depestre, 1978)

결국 네그리튀드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은 그 관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네그리튀드라는 개념 자체가 비역사적인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이고, 두 번째는 예컨대 안틸-카리브 지역의 복합적인 현실과 관련하여 네그리튀드가 드러내는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후자는 인종적인 측면에서나 언어의 측면에서나 아주 복합적이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그 지역의 현실을 네그리튀드가 극단적으로 추상화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럽인도 아프리카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크레올인임을 선언한다.”(Bernabé et al. 1990, 13) 요컨대 안틸-카리브인들은 아프리카인이 아니라는 것, 네그리튀드가 주장한 아프리카적인 가치는 이전의 유럽적인 가치를 바꿔치기한 또 다른 외재성일 뿐이라는 것, 진정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순수하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으며 보편적이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 ‘우리’는 역사의 질곡이 우연히 한 장소에 모아 놓은 이질적인 문화들의 혼종적 산물이라는 것―대개 이런 것들이 네그리튀드에 대한 비판의 주된 내용들이라고 하겠다.

사실 마르티니크가 오늘날 처해 있는 정치적 위상은 참으로 독특하다. 예컨대 이미 1950년대 초반에 프란츠 파농은 초등학교에서부터 프랑스어를 학습하고 ‘우리의 위대한 조상 골족’이라고 배워야 하는, 프랑스 국적을 지닌 마르티니크 흑인의 분열된 정체성을 분석한 바 있다(파농 1998). 흑인은 백인의 타자일 뿐 아니라 흑인의 타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이 바로 파농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의 목표는 안틸-카리브 지역을 비롯한 구식민지 흑인들로 하여금 억압된 흑인성을 되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 경험에서 비롯된 분열증적 소외에서 벗어나 실존적 주체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피부색의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흑인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제 그는 절망과 무기력 속에 빠져 지내거나 과도한 공격성이나 지배욕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무의미를 보상받을 수밖에 없다.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통하여 백인들의 부정적 타자가 되어버린 흑인의 ‘이미지-신화’에서 흑인 자신이 빠져나와야 할 필요성을 파농은 지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파농은 네그리튀드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향해 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서 극복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네그리튀드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유럽 자체의 자기반성적인 시각이 유럽중심주의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는 과정에서 발견해 낸 또 다른 타자의 모습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네그리튀드 이후에 마르티니크를 중심으로 제기된 정체성 담론들은 네그리튀드의 탈식민적이고 탈소외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혼종적인 현실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을 띠어 가게 된다. 그리고 그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가 마르티니크 출신의 작가인 에두아르 글리쌍(Edouard Glissant)이다.


Ⅳ. ‘관계의 시학’과 디아스포라

마르티니크글리쌍의 관점은 아프리카적인 기원의 순수성이라는 네그리튀드의 신화 대신에 안틸-카리브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수성, 즉 이종교배와 혼합에서 비롯된 혼종의 정체성(créolité)을 강조하는 데 있다. “천천히, 혹은 맹렬한 속도로 함께 불타오르고, 서로 밀쳐내고, 사라지면서 또한 머물고, 잠들거나 혹은 변형되는 그 숱한 문화들 사이의 현재적인 충격을 나는 혼돈-세계라 명명한다. (...) 나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혼돈-세계의 포착할 수 없는 전체성을 그려보게 하는 가능태로서의 상상계를 관계의 시학이라고 부른다.”(Glissant, 1997c) 예컨대, 그에 의하면, 마르티니크의 핵심적인 과제는 현대적인 문명 접촉의 차원에서, 체념적인 순응도 아니고 배타적인 고립도 아닌, 혼성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혼종화(créolisation)’나 ‘시학(詩學)’과 같은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개념들을 선호한다. 또한 문학에 있어서도 프랑스어와 크레올어 사이의 배타적인 선택 대신에 둘 사이의 풍요로운 결합을 선호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혼종적 정체성에 대한 긍정은 예컨대 네그리튀드의 ‘아프리카’에 대한 부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력에 대한 경의의 표시가 된다.

카리브 지역에서 민족적·지역적 정체성의 담론이 본격적으로 제출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아이티의 경우에서도 보았지만, 미서전쟁 이후에 미국의 영향력 증대가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글리쌍은 그런 정체성 담론들을 통틀어 ‘안틸 담론(discours antillais)’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 가령 1958년에 발표되어 프랑스의 대표적 문학상 중의 하나인 르노도 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소설 『레자르드 강』(La Lézarde, 1997)에서 글리쌍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지의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가는 마르티니크인들의 식민적 상황이다. 그리고 글리쌍이 선택하는 탈식민의 방식은 마르티니크 섬의 지세, 즉 산악과 평야, 대서양 연안과 카리브해 연안, 그 모든 것 사이를 흘러가는 레자르드 강 등등을 상징적으로 해석해냄으로써 안틸 고유의 문화적 의미를 그 공간에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관심은 구아들루프 출신의 프랑스 시인인 생-종 페르스(Saint-John Perse)의 시를 ‘유랑(流浪)’이라는 코드로 읽어내는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Glissant 1997b, 742-752). 글리쌍에 의하면, 마르티니크를 비롯한 카리브 지역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유혹 중의 하나로 ‘유랑’에의 유혹이라는 것이 있다. 카리브의 섬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면서 아직 어떠한 지형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바다-수평선을 향해 떠나가고자 하는 충동―그것을 글리쌍은 카리브인들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집단무의식으로 간주한다. 물론 그러한 집단무의식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예라는 혈통의 기억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카리브 지역 흑인들의 모태는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은 카리브 지역 흑인 문화의 항구적인 요소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한 장소에 뿌리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인자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생-종 페르스의 유랑은 아프로-카리브인들의 유랑과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특별히 생-종 페르스의 경우에는, 식민지에도 식민 본국에도 속할 수 없었던 식민지 출신 백인으로서의 정체성 의식이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글리쌍에 따르면, 어쨌든 ‘유랑’의 유혹에 굴복했다는 점에서 생-종 페르스는 진정으로 카리브적인 시인이다.

식민지 플랜테이션의 질서 속에서 태어난 시인인 생-종 페르스는, 플랜테이션 세계의 피억압자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동화와 거부 사이에서 불편해하는 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플랜테이션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수평선 저 너머에서 진정한 삶의 공간을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 공간을 절대적 보편성의 공간으로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프랑스어는 그에게 절대적 보편성의 언어였다. 생-종 페르스는 유랑에 이끌리는 내면의 충동을 프랑스어의 보편성이라는 원칙으로 제어해 나갔다. 그의 시의 핵심 주제들(지진, 싸이클론, 폭우, 정글, 증식, 트인 공간, 리듬, ...)을 보면 그는 카리브의 시인이었고, 프랑스어의 보편성이라는 이념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보면 그는 프랑스의 시인이었다. 그런데 글리쌍의 관점에서 보면, 생-종 페르스는 동시에 카리브의 시인이자 프랑스의 시인이었다. 요컨대 ‘크레올’ 시인이었던 것이다.

글리쌍은 식민화의 영향으로 탄생한 지역의 문화와 유럽이나 아프리카처럼 식민화 이전부터 존재해 온 문화를 구분하기 위해 ‘혼종화’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알다시피, 일차적으로 ‘크레올’은 잡종의 언어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언어로서의 ‘크레올’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져서 새로운 공동체 하나를 탄생시킨다. 그런 맥락에서 혼종화란 모든 이질적인 문화들 사이의 충돌, 그리고 그 충돌에서 비롯되는 예측불가능한 결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카리브 지역은 신대륙에서도 특히 혼종화가 맹렬하고 밀도 있게 진행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문학은 예컨대 존재, 절대, 보편성의 시학에서 출발하기가 어렵다. 반대로, 관계나 상대성, 변화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미래를 전망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플랜테이션 체제에서 생겨난 문화들. 섬의 문명(...). 밑바닥에는 인도나 힌두교의 혈통이 있고 꼭대기에는 유럽의 혈통이 있는 피라미드형의 인구 구성. 일반적 문화 현상으로서의 혼종화. 만남과 종합의 소명. 아프리카적인 현실의 지속. 사탕수수, 옥수수, 피망 문화. 리듬들의 조합이 이루어지는 곳. 구어를 사용하는 민중.”(Glissant 1981, 422) 이러한 혼종적 현실 속에서 중심과 주변이라는 전통적인 개념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글리쌍의 관점에서는, 보편성 대신에 특수성, 통일성 대신에 다양성이 지배하는 현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실 속에 닻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서 글리쌍은 ‘유랑’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확장시켜 새로운 정체성의 개념 하나를 제시한다. 타자의 배제에 기초하는 정체성의 원리 대신에(이것이 꼭 서구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타자와의 교환과 접촉에서 출발하는 정체성, 유일한 뿌리-정체성이라는 관념 대신에 다양한 접촉점들을 향해 퍼져나가는 정체성, 소위 ‘관계-정체성’이 그것이다(Glissant 1990). 그래서 탈식민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망에 있어서도, 글리쌍은 일종의 유일한 대안으로서 ‘뿌리 뽑힘’을 통한 정체성의 모색을 제안한다. 그것은 식민 지배자들이 타자와의 배타적 관계 속에서 구축한 자기 정체성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방식으로만 탈식민적 정체성의 추구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글리쌍이 제안하는 것은 타자에 대해 항상 열려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기를 발견/확립해 나가는 탐색으로서의 정체성, 떠돌이 정체성이다.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는 ‘관계의 시학’은 마르티니크나 안틸-카리브해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아메리카, 나아가서 전지구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 시학이다. 타자에 대한 승인과 거부의 모호한 관계 속에서 미지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바로 글리쌍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주에 의해 정착하게 된 땅에 서서히 뿌리를 내리는 민족의 서사시, ‘이곳에서 자신들의 다른 곳’을 되찾는 장정에 나서는 민족의 미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낯선 세계에서 표류하는 흑인들의 정신적·물질적 궁핍을 냉정하고 분석적인 시선으로 포착해내는 구아들루프 출신의 작가 마리즈 콩데(Maryse Condé)10)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주에 따른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이나 상실감은 누구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안틸-카리브해 지역의 흑인들에게는 디아스포라와 유사한 상황에서 삶이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인으로 살아가는 마르티니크 흑인의 의식은 이주민의 의식과 닮은 점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글리쌍의 정체성 담론은 디아스포라의 주제에 연결된다.

10) 특별히 안틸-카리브 지역의 흑인 디아스포라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작가이다. 기원의 땅 아프리카에 대한 뿌리 깊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낯선 세계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정신적·물질적 궁핍을 냉정하고 명석하게 분석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 세계의 특징이다.

제 3세계 출신 지식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산 작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종적·유동적·파편적인 인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의 중심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과 탈식민주의 관점 사이의 대립이 놓여 있는 듯하다. 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산 지식인들의 담론은 정체성의 근원이나 문화적·민족적 순수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한 존재·세계 인식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담론은 여전히 중심과 주변의 역학관계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없는’ 뿌리를 찾아 떠도는 영혼의 기록들이다.11)

&11) 예컨대 뒤발리에 독재 시기에 조국을 떠난 아이티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아이티의 현실을 형상화하기 위해 취한 선택들 중의 하나는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혼종성을 강조하는 마르티니크 작가들의 작품은 종종 바로크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지역의 작가들에게 그것들은 여전히 철저한 역사 의식의 산물이요 탈식민을 향한 몸짓들임에 틀림없다.


Ⅴ. 맺는 말

이제까지 우리는 아이티와 마르티니크를 중심으로 정체성 담론과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아이티의 흑인주의를 비롯한 흑인 정체성 담론을 통해서는 배타적 정체성 추구의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반대로 마르티니크의 경우를 통해서는 중심과 기원의 헤게모니를 부정하는 탈식민적 정체성의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었다.

요컨대 오늘날 카리브 지역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지역성과 특수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지역성이나 특수성의 배타적 성격보다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혼종적 특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문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카리브해 지역의 문화와 문화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합적 문화 현상에 대한 연구에 장차 하나의 모델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카리브해 지역에서 생산된 탈식민주의 정체성 담론들은 그 자체가 복합적인 상호 영향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 지역의 혼종적인 문화와 서구 유럽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화’ 자체가 서구의 입장에서는 포스트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국면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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