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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으로 가는 여행 / 카르펜티에르 2003-10-22 / 6247   

씨앗으로 가는 여행

알레호 카르펜티에르(Alejo Carpentier) / 박병규 옮김



I


    “뭐라고요, 영감님...”

    비계 높은 곳에서 몇 차례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노인은 대답 대신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화단에는 지붕에서 걷어낸 기왓장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위쪽에서는 석공이 석재를 뜯어내고 있었고, 돌덩이는 목재 홈통을 타고 내려오면서 희뿌연 석회 먼지와 돌가루를 날렸다. 그리고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벽 사이로 실내가 훤히 드러났다. 타원형 천장, 네모난 천장, 코니스, 꽃 장식, 치상 장식, 술 장식, 그리고 종이 쪼가리는 뱀허물처럼 매달려 있었다. 안마당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괴인면(怪人面) 분수대가 있었고, 그 옆으로 코가 뭉그러지고, 튜닉은 누렇고 때가 묻었으며, 머리에는 곡식을 두른 세레스 여신상이 철거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분수대로 떨어지자 물고기는 이끼투성이의 미지근한 물속에서 하품을 해대며 동그란 눈으로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집을 철거하고 있는 흑인 인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에 턱을 괴고 세레스 상 발치에 앉아서 쓸만한 물건을 통에 담아 실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아득한 소음이 들려오고, 위쪽에서는 정으로 돌을 쪼는 망치질소리와 삐걱거리는 도르래 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다섯 번 울렸다. 코니스와 중방은 이미 허물어졌다. 이제는 사다리만 남아 있었다. 다음날 인부들이 사용할 것이다. 땀방울, 욕지거리, 뿌지직거리는 밧줄, 삐걱거리는 도르래, 앞가슴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는 소리가 사라지자 공기는 한층 신선해졌다. 철거중인 집이라 그런지 황혼이 일찍 찾아왔다. 난간이 떨어져나간 위쪽 계단에는 아직도 잔광이 머물고 있었으나 집 안은 어두웠다. 세레스 여신은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실내 공간은 난생 처음 사방에 잡석만 널린 곳에서 블라인드도 없이 밤을 보낼 것이다.

     풀밭 여기저기에 기둥이 나뒹굴고 있었다. 어캔서스 무늬는 살아 있는 식물처럼 보였다. 담쟁이는 친척을 만난 듯이 이오니아식 기둥 쪽으로 촉수를 내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 집은 더욱 낮게 보였다. 어둠을 문짝처럼 달고 있는 문틀 하나가 저 위쪽에 아직 버티고 있었다.


II


     그때,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흑인 노인은 흙벽돌 더미 위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이상한 몸짓을 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리석이 날아올랐다. 돌조각이 튀어 오르더니 갈라진 벽 틈을 메웠다. 돌쩌귀가 달린 호도나무 문짝이 문틀에 끼워졌고, 나사못은 빠른 속도로 구멍을 파고 들어갔다. 화단에서는 꽃이 고개를 쳐들며 기왓장을 들어올리고, 기왓장은 한 무더기가 되어 요란한 흙바람을 일으키면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 헐린 집이 다시 세워지고, 이전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되찾았다. 세레스 상은 이전보다 더 하얗게 되었다. 분수대 고기는 많아졌다. 물소리가 들리면서 베고니아가 되살아났다.

     노인은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구두굽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촛불을 켜자 초상화 위로 노란빛이 흔들렸고,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방 저방에서 웅성거렸으며, 초콜릿 그릇에서는 숟가락이 달그락거렸다.

     카페야니아스 후작, 돈 마르시알이 임종을 맞고 있었다. 후작 가슴에는 메달이 걸려 있었다. 촛불 네 자루가 긴 촛농을 매단 채 후작을 둘러싸고 있었다.


III


     촛농이 줄어들면서 양초가 점점 자라났다. 원래의 크기가 되었을 때 수녀는 촛불을 끄고 성냥갑을 치웠다. 심지는 탄 흔적을 지우고 하얗게 변했다. 방문객들은 텅빈 집에서 나가더니 마차를 타고 한밤중에 떠났다. 돈 마르시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흐릿하고 아련하던 대들보가 분명하게 보였다. 약병, 비단 술 장식, 침대 머리맡 성모 마리아 상, 은판 사진, 야자 무늬 창틀이 또렷해졌다.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을 때, 돈 마르시알은 한결 가뿐한 느낌이었다. 몇 시간을 잤다. 눈을 떠보니 아나스타시오 신부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처음에는 솔직하고 상세하게 지은 죄를 털어놓다가 이내 더듬거렸다. 힘겨운 성사였고, 많은 것을 감춘 성사였다. 아니 도대체 무슨 권리로 신부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라는 것인가? 문득 돈 마르시알은 방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관자놀이의 압박감이 줄어들자 벌떡 일어났다. 여인은 알몸으로 비단 침대 시트 위에서 기지개를 켰고, 브래지어와 속치마를 찾아 입었다. 잠시 후, 비단 옷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고 향수 냄새가 났다. 아래쪽, 잠가놓은 승용차 시트 밑에는 돈 봉투가 있었다.

     돈 마르시알은 몸이 좋지 않았다. 화장대 앞에서 넥타이를 맬 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무실로 내려갔다. 판사와 변호사와 서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경매에 넘어간 집을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방으로 뛰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재산은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최고 가격을 제시한 경매자의 손에 낙찰될 것이다. 돈 마르시알은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떠나자 혼자 남았다. 문서에 쓰여진 글자는 미스터리 같았다. 널찍한 서류 위에서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꼬부랑 글자는 약속과 맹세와 증거와 성명과 직함과 날짜와 땅과 나무와 돌을 이어주기도 하고 풀어버리기도 했다. 잉크병에서 흘러나와 복잡하게 뒤엉킨 선들이 온몸을 칭칭 휘감아버린 지금, 법망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함부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달았을 때, 그 글자들은 목에 걸린 밧줄처럼 숨통을 조였다. 서명은 서류 무더기 속에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서 마침내 그를 배신했다. 서명이라는 덫에 걸려 살덩이를 가진 인간이 서류의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동틀 녘이었다. 방금 식당에 걸린 시계가 오후 여섯 시를 쳤다.


IV


     상(喪)을 당하고 몇 달이 흘러갔다. 날이 갈수록 돈 마르시알의 회한은 깊어만 갔다. 처음에는 집안에 여자를 끌어들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 여자를 갈망하는 마음은 점점 불안한 심정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밤, 돈 마르시알은 허리띠로 자기 몸을 후려쳐 피를 보고 말았다. 그런 욕구는 더욱 강했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날은 바로 후작 부인이 알멘다레스 강변에서[역주. 쿠바의 아바나 항 근처로 흐르는 강] 돌아온 날이었다. 마차를 끌던 말갈기에서 물기는 사라지고 땀방울만 흥건했다. 그러나 그날 남은 시간 내내 말은 마구간 판자에 발길질을 해댔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저녁 무렵, 후작 부인 욕실에서 물이 가득 담긴 물통이 깨졌다. 이윽고 오월, 비가 내려 저수지가 넘쳤다[역주. 쿠바에서 2-4월은 건기이고 나머지 달은 매일 비가 오는 우기이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비둘기와 씨암탉을 키우던 흑인 노파는 마당을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강물은 믿을 것이 못돼, 흘러가는 청춘도 그렇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콜로니아 사령관이 주최한 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파리에서 수입한 의상 위로 물 컵이 쏟아진 이후 더 이상 물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친척들이 다시 나타났다. 친구들도 돌아왔다. 커다란 살롱에서는 이미 상들리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건물의 균열도 차츰 눈에 띄지 않았다. 피아노는 클라비코드로 바뀌었다. 야자수는 마디가 없어졌다. 담쟁이는 코니스 아래로 내려갔다. 세레스 여신상의 귀는 하얗게 빛났고, 기둥은 이제 막 깎아놓은 듯 했다. 한층 열정적이 된 마르시알은 종종 부인을 껴안고 오후 내내 산책을 했다. 눈꼬리에 생긴 주름도, 축 처진 살점도 사라졌으며 피부는 탄력을 되찾았다. 어느 날, 마르지 않은 유화(油畵) 냄새가 집안에서 진동했다.


V


     그들은 수줍어서 얼굴을 붉혔다. 밤마다 병풍은 조금씩 더 펼쳐졌으며, 컴컴한 구석에 치마가 떨어졌다. 치마는 새로운 장벽이었다. 마침내 후작 부인은 등불을 껐다. 마르시알만이 어둠 속에서 혼자 이야기했다.

     그들은 커다란 마차를 타고 제당공장으로 떠났다. 밤색 말 엉덩이는 빛났고, 은제 재갈과 에나멜 구두는 햇빛에 반짝였다. 그러나 부활절 꽃장식이 임시로 거처하던 집 현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서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마르시알은 아랫사람들이 북을 치고 춤을 추도록 허락했다. 그 시절에는 오데콜롱 냄새와 안식향 목욕과 흐트러진 머리칼도 지겨웠고 또 장롱 속에서 침대 시트를 꺼낼 때 바닥에 떨어지는 나프탈렌도 조금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예배당 종소리와 함께 사탕수수 찌는 냄새가 산들바람 속에 떠돌고 있었다. 낮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소리 없는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은 후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메마른 지붕 속으로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지루한 아침 맥빠진 포옹을 나누고, 불화를 잔주르고, 상처를 치유하고 도시로 돌아왔다. 후작 부인은 여행복을 벗고 결혼식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으레 그렇듯이 교회로 갔고, 자유롭게 되었다.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소개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각자 청동제 말장식 소리도 요란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마르시알은 한동안 메르세데스 집을 들락거렸고, 어느 날인가 반지는 세공 공장으로 보내져 무늬가 지워졌다. 마르시알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창살이 높은 집안의 세레스 여신상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비너스 상으로 바뀌었고, 분수대 괴인면 돋을새김은 어딘지 모르게 더욱 두드러졌다. 아직도 등불이 켜져 있었으며, 여명이 물들었고, 밤새도록 등불이 켜져있었다.


VI


     어느 날 밤, 마르시알은 술을 많이 마셨고, 친구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 때문에 속이 메스꺼웠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집안의 시계는 다섯 시를 치고, 이어 네 시 반을 치고, 이어 네 시를 치고, 이어 세 시 반을 치고...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들었다. 밤을 꼬박 세우고 정신이 몽롱할 때 가구는 대들보에 붙어 있는 것 같고, 걸음걸이는 천장을 밟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인상이었을 뿐,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음악당에서 대규모 무도회가 열렸을 때, 미성년자가 되었다. 이제는 서명을 해도 법적인 효력이 없고, 성가신 공증 서류나 등기서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자 즐거웠다. 법률적으로 면책권을 얻게 되자 재판이라는 것도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젊은이들은 한잔 술에 얼큰해지자 벽에 걸린 자개 박힌 기타, 살테리오[역주. 중세부터 18세기까지 많이 사용한 현악기], 나팔을 집어들었다. 누군가 ‘티롤레사’를 연주하는 시계 태엽을 감았다. 진열장 붉은 양탄자 위에 스페인 아랑후에스에서 제작한 플루트와 구리 테를 두른 사냥용 뿔피리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사냥용 뿔피리를 꺼내서 불어보았다. 마르시알은 다락방에서 ‘트리필리 트라팔라’ 악보를 찾으면서 캄포플로리도에서 온 여자를 구슬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내 모두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원래의 석회 색깔을 찾아가던 다락방에 왕실 전속 사제의 옷가지와 제복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벽장에는 궁중 의상과 대사가 착용하던 장식용 칼과 망가진 갑옷과 주교의 망토, 그리고 빛 바랜 금단추가 달린 길다란 연미복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누런 속옷과 오래된 튜닉, 벨벳으로 만든 꽃, 붉은 색 허리띠가 어스름 빛에 보였다. 가면무도회에서 사용한 레이스 달린 대장장이 옷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캄포플로리도에서 온 처녀는 살색 숄을 두르고 어깨를 움츠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숄은 중요한 가족회의가 열린 어느 날 밤, 할머니가 클라라 교단을 후원하는 부호의 관심을 끌려고 사용한 것이었다.

     청년들은 가장을 하고 무도장으로 돌아갔다. 삼각모자를 쓴 마르시알이 지팡이를 세 번 내려쳤고, 왈츠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들은 딸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유행의 산실’ 새 주인이 시킨 대로 남자들은 처녀 허리에 손을 얹고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마다 하녀와 마부와 하인들로 발딛을 틈이 없었다. 이 요란한 파티를 보려고 외떨어진 행랑채나 숨막히는 지하 골방에서 빠져 나왔던 것이다. 이윽고 눈을 가린 술래가 사람들을 쫓아 다녔다. 마르시알은 캄포플로리도 여자와 함께 병풍 뒤에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여자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그 보답으로 여자에게서 향수를 뿌린 손수건을 받았다. 손수건에는 브뤼셀 산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아직도 여자 앞가슴의 체온이 묻어있었다. 처녀들은 황혼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 위에 짙은 회색으로 서 있는 등대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 때 청년들은 무용 교습소로 갔다. 교습소에서는 커다란 팔찌를 찬 흑인 여자들이 과라차 춤을 추고 있었다.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기가 막히게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카니발 기간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석류나무가 자라는 안마당 칸막이 벽 뒤에서 천둥 같은 북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마르시알은 친구들과 함께 의자 위로 올라갔다. 춤추는 반백의 흑인 여자가 너무 멋있었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고 도발적인 표정을 지을 때는 한 번 안아보고 싶었다.


VII


     마르시알 집안의 유언 집행인 돈 아분디오 방문이 갈수록 잦아졌다. 돈 아분디오는 마르시알 침대 머리맡에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르시알을 깨우려고 일부러 박달나무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르시알이 눈을 떴을 때, 알파카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옷깃에는 비듬이 묻어 있고, 소매는 닳아빠진 것으로 미루어 직책과 수입을 어림할 수가 있었다. 엉뚱한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마르시알이 산 카를로스 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형식적인 시험을 치른 뒤에 열심히 교실을 드나들었으나 갈수록 라틴어 선생님의 설명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관념적인 세계는 점점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 세계는 처음에 소매 없는 튜닉, 조끼, 갑옷 목가리개, 가발, 논객, 요설가들로 가득 찼으나 이내 활기 없는 밀랍 박물관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마르시알은 학교 수업에 만족했고, 교과서 내용은 무턱대고 받아들였다. 자연 교과서 삽화를 보고 사자, 타조, 고래, 재귀어 같은 글자를 읽었다. 또 깨알같은 글씨로 우주에 관한 지루한 해석을 늘어놓은 책장 한쪽 귀퉁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베이컨, 데카르트 같은 글자를 읽었다. 마르시알은 차츰 그런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고, 심적 부담도 덜 수 있게 되었다. 사물을 본능적으로 지각하게 되면서 정신은 한결 가뿐해졌다. 겨울철 밝은 햇빛 아래서 항구의 요새가 세세하게 드러나는데 프리즘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는 그저 한입 베어물고 싶은 과일이었을 뿐이다. 욕조에 담근 발은 욕조에 담근 발일 뿐이다. 초등학교를 떠나던 날 책이란 물건도 잊어버렸다. 해시계는 요정 나라에 있었고, 환영과 유령은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팔면체는 등에 침이 달린 갑충이었다.

     여러 차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성벽 쪽으로 서둘러 갔다. 성벽 파란 문 뒤에서 여자들이 속닥거리고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신발을 신고 귀에는 박하 잎을 꽂고 다니던 여자에 대한 기억이 무더운 오후면 아픈 어금니의 통증처럼 그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어느 날 고해 신부의 분노와 위협에 놀라 울고 말았다. 그가 지옥 같은 이 세계를 맛본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를 쏘다니는 일도, 울퉁불퉁한 보도에 등을 돌리고 화가 난 채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던 비겁함도 영원히 그만이었다.

     이제 마르시알은 신비한 세계를 살아갔다. 그 세계에서는 축제 때 잡아먹는 어린 양, 도자기로 된 비둘기, 하늘색 망토를 걸친 성녀, 금빛 색종이로 만든 별, 동방박사, 백조 날개를 단 천사, 당나귀 별, 황소자리, 가슴이 뻥 뚫린 채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서성거리는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나는 무서운 성(聖) 디오니시오 등이 우글거렸다. 마르시알은 침대에 부딪히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손에 묵주를 쥐었다. 기름통에 잠긴 심지에서 타오르던 불빛 아래로 원래의 색깔을 되찾은 성상들이 서글프게 빛났다.


VIII


     가구가 자라났다. 식탁 위에 팔을 올려놓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장롱 위쪽 장식물은 점점 높아졌다. 흉상은 길어졌으며, 층계참 무어인 동상의 횃불은 더욱 늘어났다. 안락의자는 더 깊어졌으며, 흔들의자는 뒤로 더 기울어졌다. 대리석 장식 고리가 달린 욕조에서도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마르시알은 그림책을 보다가 문득 나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밀랍 병정을 가지고 놀고 싶었다. 세면기 밑에 책을 감추고 거미줄이 쳐진 서랍을 열었다. 병정들을 배치하기에는 책상이 너무 작았다. 그래서 바닥에 앉았다. 수류탄병을 팔 열로 배치했다. 그리고 기수를 중심으로 말 탄 장교를 배치했다. 그 뒤에 대포와 포소제봉과 화승대를 든 포병을 배치했다. 피리와 심벌즈, 그리고 북 치는 호위병의 행진이 끝났다. 박격포에 장착된 용수철은 유리 포탄을 일 미터 이상 날릴 수가 있었다.

     “빵...... 빵...... 빵......”

     말이 꼬꾸라지고 기수가 넘어졌다. 북 치는 병정들이 쓰러졌다. 흑인 엘리히오가 세 번씩이나 불렀을 때, 손을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날부터 마르시알은 바닥에 앉는 버릇이 생겼다. 습관이 되고 보니 여러 가지 이점이 많은데, 왜 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은 벨벳 방석을 좋아하는데, 땀이 너무 많이 난다. 대리석 바닥에 반듯하게 드러누우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는 어른들은 공증인 -돈 아분디오 같은 사람- 냄새가 난다. 오로지 바닥에서만 방 구석구석을 다 볼 수가 있다. 아름다운 나뭇결, 벌레들이 다니는 길, 그늘진 구석 등 어른의 눈높이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르시알은 비가 오면 클라비코드 밑으로 들어갔다. 천둥이 울릴 때마다 공명통이 진동하면서 갖가지 음색을 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면 오르간 소리, 솔바람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한곳에 어울렸다.


IX


     그날 아침 마르시알은 방에 갇혔다. 집안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점심은 평소에 비해 터무니없이 풍성했다. 일요일 미사가 끝난 다음에 두 개 정도 먹을 수 있는 알라메다 제과점 케이크를 여섯 개나 갖다 주었다. 마르시알은 그림 엽서를 보며 놀았다.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을 때, 블라인드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구리 손잡이가 달린 상자를 들고왔다. 마르시알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철렁철렁 구두소리를 내며 마부 멜초르가 함박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체스 놀이를 했다. 멜초르는 말(馬)이고, 마르시알은 왕이었다. 바닥에 깔린 타일을 장기판 삼아 한 칸씩 전진했고, 멜초르는 앞으로 한 칸, 옆으로 두 칸을 건너뛰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둠이 깔리고 한참 후, 어떤 차가 소방차처럼 왱왱거리며 떠날 때까지 놀았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있었다. 아버지 병세는 호전되었다. 그리고 근엄한 태도로 아들에게 교훈적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끝도 한도 없는 질문 중간중간에 복사(服事)처럼 “예, 아버지”, “아니오, 아버지”하고 대답했다. 마르시알은 후작인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존경한 이유는 키가 크고, 밤에는 앞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무도회에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리에 찬 칼과 군인 제복이 부러웠기 때문이며, 성탄절에는 아몬드와 건포도를 넣은 칠면조 먹기 시합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또 가끔 청소하는 물라토 여자[주. 백인과 흑인의 혼혈아]를 덥석 껴안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매를 때릴 것이다. 마르시알은 커튼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여자는 미처 단추도 못 채우고 훌쩍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마르시알은 매를 맞고 나오는 그 여자를 보면서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 여자는 언제나 선반 위에 놓인 돈 항아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무섭고도 관대한 사람이었다. 하나님 다음으로 사랑해야 할 존재였다. 마르시알에게는 하느님 중의 하느님이었다. 그의 은총은 나날이 이루어지고, 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시알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더 좋아했다. 아버지처럼 귀찮게 굴지 않기 때문이다.


X


     가구가 좀 더 자라나고, 마르시알이 침대나 장롱이나 선반 밑의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남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 비밀이란 마부 멜초르가 없는 삶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느님도, 아버지도, 성체절[역주. 6월초 목요일에 거행하는 카톨릭 축제]이면 황금 옷을 입고 행진하는 주교도 멜초르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멜초르는 아주 먼 곳에서 왔다. 정복당한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 왕국에는 코끼리와 하마와 호랑이와 기린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돈 아분디오처럼 서류 뭉치가 가득 쌓인 어두컴컴한 방에서 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물보다는 영리하게 살았다. 어떤 사람은 구운 거위 열 두 마리를 꼬챙이에 꿰어, 푸른 늪에서 커다란 악어를 잡았다. 멜초르는 의미 없는 가사가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배우기 쉬운 노래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엌에서 과자를 훔치기도 했고, 허술한 문을 넘어 밤중에 도망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경찰관들에게 돌을 던진 다음 어둠이 깔린 아마르구라 거리로 사라지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멜초르는 젖은 장화를 벗어 부엌 아궁이 옆에 두었다. 마르시알은 그렇게 큰 장화를 신고 다니는 멜초르가 부러웠다. 오른쪽 장화는 칼람빈, 왼쪽 장화는 칼람반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멜초르가 두 손가락을 주둥이에 넣기만 하면 온순해졌다. 평소에는 벨벳 옷을 입고 번쩍거리는 박차를 차고 다녔지만 여름철에는 대리석 바닥이 시원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거실로 내가는 쟁반에서 슬쩍 훔친 과일이나 케이크를 가구 밑에 감춰두기도 했다. 마르시알과 멜초르는 알사탕과 아몬드를 함께 숨겨두고, 그곳을 가리켜 “우리, 우리, 우라”라고 부르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창고 밑에는 네덜란드 산 향수병이 가득한 지하실이 있으며, 하녀 침실 위쪽에 있는 다락방에는 깨진 유리 상자가 있는데, 그 속에는 곧 날개가 떨어질 것 같은 나비 열 두 마리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XI


     물건을 깨뜨리는 버릇이 생겼을 때 마르시알은 멜초르를 잊어버리고 개하고 놀았다. 집에는 개가 여러 마리 있었다. 호랑이 같이 생긴 큰 개, 젖꼭지를 바닥에 끌고 다니던 사냥개, 너무 늙어서 같이 놀 수 없는 그레이하운드, 때만 되면 다른 개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때문에 하녀들이 가둬버린 털북숭이가 있었다.

     마르시알은 ‘카넬로’를 좋아했다. 이 놈은 신발을 물어뜯거나 정원 장미밭을 파헤쳤다. 항상 숯검정이나 황토를 묻히고 다녔고, 다른 개 먹이를 넘보았으며, 괜히 짖어대거나 분수대 발치에 훔친 뼈다귀를 감추었다. 때로는 둥지에서 알을 낳는 암탉을 내쫓고 달걀을 먹어치웠다. 모두가 카넬로를 걷어찼다. 그러나 카넬로를 데려갔을 때 마르시알은 앓아 누웠다. 카넬로는 베네피센시아 저택보다 더 먼 곳에 버려졌으나 이내 꼬리를 흔들며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사냥 솜씨도 일품이고 밤새 경비도 잘 섰기 때문에 다른 개는 넘볼 수 없는 위치를 되찾았다.

     카넬로와 마르시알은 함께 오줌을 누었다. 때때로 그들은 거실에 깔린 페르시아 양탄자에다 점점 커지는 짙은 색 구름을 그렸다. 회초리로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회초리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함께 울부짖을 수 있고, 이웃의 동정심을 살 수 있는 훌륭한 구실이 되었다. 이웃집 사팔뜨기 여자가 아버지를 “야만인”이라고 했을 때, 마르시알은 카넬로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비스킷을 얻어먹으려고 좀 더 울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잊었다. 그들은 함께 흙을 먹고, 태양 아래서 뒹굴고, 물고기가 사는 분수대 물을 마시고, 그늘과 박하 향기를 찾아다녔다. 기온이 올라가면 축축한 화단은 동물들로 가득 찼다. 그곳에는 다리 사이에 주머니가 달린 회색 거위와 엉덩이가 벗겨진 늙은 수탉과 목구멍에서 붉은 넥타이를 꺼내며 “우리, 우라” 소리를 내는 도마뱀과 암컷이 없는 도시에서 태어난 실뱀이 있었고, 또 거북이 알로 입구를 막아놓는 생쥐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람들은 마르시알에게 개를 가리켰다.

     “멍, 멍”

     마르시알은 이렇게 말했다.

     마르시알은 자기만의 언어로 말했다. 그리고 절대적인 자유를 얻었으며, 손에 닿지 않는 물건을 집으려고 했다.


XII


     마르시알은 배고픔, 목마름, 더위, 고통, 추위 같은 본능적인 욕구밖에 지각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절실하게 필요한 빛도 포기했다. 이름도 몰랐다. 짭짤한 소금물로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는 후각도, 청각도, 시각도 흐릿해졌다. 두 손은 깜찍하게 말려들었다. 이제 촉각에 민감한 존재가 되었다. 우주가 숨구멍을 통해 들어왔다. 그때 그는 거대한 형체만을 짐작할 수 있던 눈마저 감고, 뜨겁고 축축하고 어둠이 가득한 몸 속으로, 이미 죽은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죽은 몸은 본체가 들어왔다는 것을 느끼자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 시간은 마지막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시간은 노름꾼이 카드를 나누어줄 때처럼 쉭쉭 소리를 냈다. 새는 깃털 바람을 일으키며 알로 되돌아갔다. 물고기는 연못 밑바닥에 비늘을 남기고 알이 되었다. 야자수는 땅속으로 사라지면서 부채를 접듯 잎을 접었다. 줄기는 잎을 삼키고, 대지는 땅위의 만물을 빨아들였다. 천둥은 복도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무 장갑에서는 털이 자랐다. 담요는 올이 풀어지고, 아득히 먼 곳에서 기르는 양털 망울이 되었다. 장롱과 선반과 침대와 십자고상(十字苦像)과 탁자와 블라인드는 아득한 근원을 찾아 밤중에 밀림으로 날아갔다. 못을 박아놓은 것은 모두 허물어졌다. 어디에 정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느닷없이 범선이 나타나 바닥과 분수대에 사용된 대리석을 싣고 이탈리아로 급히 떠났다. 무기와 연장과 열쇠와 구리 냄비와 말 재갈이 녹아내려 큼직한 쇳물 강을 이루며 땅속으로 흘러들었다.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어 처음 상태로 되돌아갔다. 벽돌은 흙이 되고, 집 대신 흙무더기를 남겨놓았다.


XIII


     날이 밝고, 인부들이 철거 작업을 하려고 다시 왔으나 할 일이 없었다. 전날 저녁 골동품 상인에게 팔기로 약속한 세레스 상을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인부들은 노동조합에 가서 항의를 하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 때, 누군가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한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오월 어느 날 오후, 토란이 자라는 알멘다레스 강에서 익사한 카페야니아스 후작 부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질 것이며, 시계 방향으로 자라나는 시간은 게으름을 피우며 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