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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 ― 시간의 미로와 담론의 미로 / 박병규 2003-10-22 / 8093   

보르헤스 ― 시간의 미로와 담론의 미로

박 병 규



I. 다시 쓰기


     보르헤스 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존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다. 이 다시 쓰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타인의 사고에 대한 다시 쓰기, 말을 바꾸면 메타비평이요, 다른 하나는 타인의 문학 작품과 자신이 상상한 작품에 대한 다시 쓰기, 이른바 메타문학이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이러한 다시 쓰기의 예를 찾는다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허구집』(Ficciones)과 『또 다른 심문』(Otras inquisiciones)이다. 『허구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은 이미 존재한다고 상정한 문학 작품에 대한 일종의 요약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메타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또 다른 심문』에 실린 많은 작품은 기존의 문학, 철학, 종교 텍스트를 비평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타비평이다. 다시 쓰기의 의의는 고갈의 문학, 양피지 이론, 바로크적 글쓰기, 간텍스트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론과 관점에서 탐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기본적으로 문화이론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는 문학이론이다. 유동적인 세계관이나 삶의 양식을 전제하지 않는 바로크가 몇 가지 수사법으로 환원될 위험을 안고 있듯이, 텔켈 그룹 중심의 텍스트성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양피지 이론이나 간텍스트성 이론은 구태의연한 영향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실 메타문학이든 메타비평이든 보르헤스 작품의 핵심은 원전도 아니고 원전과 보르헤스 텍스트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원전을 견강부회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과감한 해석, 또는 원전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상상의 질서이다. 그리고 이 상상의 질서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 보르헤스 작품이다. 보르헤스가 작품집을 ‘허구’라고 부르거나 비평집에 16세기 종교재판을 연상시키는 ‘심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책과 만리장성」(『또 다른 심문』)에서 진시황의 정치적 행위를 미학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 보르헤스의 논의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무관하다. 마찬가지로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허구집』)에서 보르헤스가 제시하는 메나르 작품의 요약은 이 작품의 실재 여부와 상관이 없다. 역사적 사실이건 타인의 텍스트이건 가상의 작품이건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자료에 불과하며, 이 자료들은 허구의 영역에서 새롭고 낯선 문맥에 위치함으로써 보르헤스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그렇다면 보르헤스가 대상을 포획하고 문학 세계를 구축하는 상상의 질서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질서는 어떤 요소로 구성되며 어떤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가? 우리는 이를 위해 몇몇 보르헤스 작품에 나타난 시간의 문제부터 논의하여 작품 세계의 특징적인 얼개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이 세계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풀어보련다.


II. 시간의 미로

     이야기 문학(narrative fiction)에서 시간을 다룰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분석 수준을 구별하는 일이다. 이 수준은 세 가지다. 하나는 쥬네트나 채트먼을 비롯한 이야기 이론(narrative theory)에서 다루는 시간으로 줄거리와 작품에 나타난 이야기의 순서, 지속, 빈도를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의 구성과 관련된다. 다른 하나는 미하일 바흐찐의 시공간 형식(cronotopo)처럼 허구 세계의 지형학을 결정하는 범주로서 시간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 문학의 장르와 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마이어호프의 유명한 책 『문학과 시간현상학』이나 일부 보르헤스 비평에서 보듯이 시간 문제 자체를 천착함으로써 문학 작품을 논의하는 방법이다.

     우선 이야기 이론에서 말하는 시간은 보르헤스 작품의 성격에 비추어 보아 우리의 논의에서 제외할 수 있다. 보르헤스 작품은 이야기 이론이 기본 공리로 가정하고 있는 시간관, 이른바 근대적 시간관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이야기 이론의 분석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시간 자체를 다룰 수도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이 『또 다른 심문』을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철학적 관점으로 시간 문제를 성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도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르헤스 작품에서 극화되거나 언급된 시간관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므로 하나로 뭉뚱그려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영속하는 현재라는 신화적 시간관, 에붐이라는 중세 기독교적 시간관, 순환과 영겁회귀라는 고대인의 시간관뿐만 아니라 「두 갈래 오솔길의 정원」에서 보듯이 “분산하고 수렴하고 평행하는” 시간도 등장한다. 이처럼 보르헤스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시간 계열을 굳이 정의한다면 직선적이고 단선적이고 비가역적이고 역사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부정의 형태로서 복합적이고 다선적이고 가역적이고 비역사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이다. 우리는 이러한 보르헤스의 시간을 통칭하여 미로적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상적인 정의 자체는 보르헤스 작품에 대하여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으며, 또 개개의 작품을 읽고 즐기고 평가하는 데 필수적인 요구 사항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모두들 공감하는 평범한 얘기가 되었지만, 보르헤스 작품은 시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시간 조작에 기초한 문학적 담론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 작품에 도입된 미로적 시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허구 세계의 지형도를 바꿔놓는 서술 전략으로, 바흐찐이 규정한 시공간 형식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미로적 시간은 허구 세계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인 시간을 문제 삼음으로써 이야기 문학의 사실성을 부정하고 허구성을 강조하려는 방편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실주의는 우리가 일상 현실을 구성하는 방식에 기초한 문학이다. 사실주의 문학이 현실을 재현하고 있다는 문학적 환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시공간 개념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시작된다. 이야기 문학에서 독자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시공간의 명시는 상세한 인물 묘사에 못지 않게 허구성의 색채를 약화시키고 문학적 환상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사실주의 이야기 문학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적어도 『돈키호테』 이후의 서구 이야기 문학은 대부분―호프만과 네르발 같은 낭만주의 작가의 작품이나 이른바 괴기소설(black novel)을 예외로 한다면― 이러한 시공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근대 소설은, 알레고리 같은 중세 문학의 근간을 형성하던 이원적 시공간 구조가 파괴되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시공간관이 인식론적 근거를 획득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실과 비현실이 혼합된 『돈키호테』는 최후의 기사 로망스이자 최초의 근대 소설이며,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은 『돈키호테』로부터 시작된 근대 소설 미학의 정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르헤스 문학은 바로 이러한 근대 소설 미학의 반명제이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환상 소설 『모렐의 창조』(1940) 서문에서 보르헤스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사실주의 소설은 “우리들로 하여금 언어로 만든 인공물이라는 성격을 잊게 만들며, 갖가지 쓸모 없는 정확성을 기함으로써 [...] 새로운 개연성의 색채를 덧입힌다”.(Bioy Casares 1953, 12) 즉 사실주의로 대변되는 근대 이야기 문학은 역사적․객관적 현실의 재현이라는 명제를 추구함으로써 이야기 문학의 본성인 허구성을 감추고 있는 가짜 사실주의이고 거짓부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보르헤스의 혁신적인 면은 반(反)사실주의 선언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시간조작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있다. 널리 알려진 작품 「원형의 폐허」(『허구집』)를 보자.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동인물 마법사의 존재와 행위는 겉보기에는 현실적이다. 비록 무대는 애매하고 행동은 수수께끼 같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전개는 일반적인 단편 소설과 다름없이 전개된다. 마침내 신전에 화재가 발생하고 주동인물은 놀라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만 뜨겁지도 않고 타 죽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인물의 꿈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장자의 호접몽이나 중세 기독교의 자유의지나 불교의 마야(maya)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종교 교설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을 동원하여 숨겨진 깊은 뜻을 패러프레이즈할 수 있다. 그러나 성급하게 작품의 의미를 주조하기 앞서 풀어야 할 과제는 작품에 가로놓여 있는 시간 조작의 메카니즘이다. 이 작품에서 마술사의 계기적 시간은 일종의 무시간 속에 위치하고 있다. 마술사의 시간은 흐르면서도 동시에 흐르지 않는다. 다르게 설명하면, 이야기의 전개라는 측면에서 시간은 경과하지만 얘기되는 사건 자체는 시간 영역 바깥에, 무시간에 위치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시간 계열이 작품의 지형도를 결정한다. 작품에서 전개되는 세계는 역사적 현실 세계와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는다. 오히려 이중적인 시간 계열이라는 지평 위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시간을 문제 삼는 대부분의 보르헤스 작품에서 공간의 이미지는 추상적이며 몽환적이고 신화적이지 결코 사회적이지 않다. 이는 틀뢴이나 바벨의 도서관과 같은 상상의 세계는 물론 특정 국가, 특정 도시, 특정 장소를 지칭하는 경우에도 공간의 이미지는 모호하고 흐릿하다. 시공간은 분리될 수 없으며 공간의 이미지는 시간의 변전에 상응하여 유동하므로, 보르헤스의 말처럼, “사건이 일어난 곳의 정확한 지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Borges 1960, 143) 그 모두는 역사 세계에 속하지 않고 가상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헤스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영역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콘도(Macondo)나 오네티의 산타마리아(Santa María)와 다르다. 마콘도나 산타마리아는 현실에 존재하는 않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는 지리적인 대응물이 없으며 허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므로 상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마콘도는 중남미 현실을 빗댄 곳이며 산타마리아는 우루과이의 축약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반면에 보르헤스 작품에서 구현되는 가상의 영역은 다양한 시간 계열로 짜여진 복잡한 미로이다. 정태적인 공간이 아니라 역동적인 공간이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현실의 공간과 상응하지 않으며, 비유적인 해석이 들어설 여백이 없다. 예를 들어, 『알렙』에 실린 명작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아스테리온이 살고 있는 집은 “두 갈래 갈라지며”, “우주 만한 크기를 갖고 있는” 무한한 시간의 미로이자 동시에 공간의 미로이다.(Borges 1960, 69) 우리는 이와 같은 형태의 미로를 「두 갈래 오솔길이 정원」에서도 볼 수 있다. 취펭이 만들어 놓은 수수께끼 미로이다. 아스테리온의 집이건 취펭의 미로이건 모두 유동적인 시공간상을 전제하는 구성물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분리하기가 불가능하며, 공간의 이미지 또한 시간의 이미지만큼 가변적이고 상상적이라 현실적 대응물이나 유사물을 찾기 어렵다.

     플로베르는 1852년 콜레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책 이외의 다른 어떤 외부세계에 관한 언급이 없고, 마치 지구가 아무런 보조도 없이 공중에 떠 있듯이 그 자체의 문체의 내적 힘에 의해서만 존립하는 책”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역사 소설 『살람보』를 쓰려고 역사적 현장까지 답사한 플로베르에게는 이상적인 꿈이었다. 실제로 언어의 지시성을 완벽하게 배제한 작품을 쓴다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일부 포스트모던 작품에서 보듯이 정신분열적인 텍스트로 변질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르헤스의 시공간 조작은 허구 세계를 내재하는 법칙으로만 존립할 수 있게 만드는 근간이다. 즉, 작품 세계를 현실과 완전하게 유리된 가상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가장 기본적인 메카니즘이다. 이 영역에서 언어는 해묵은 지시성을 어느 정도 상실하고 새롭게 형성되는 의미작용을 통해 일상에 파묻힌 우리로서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선뜻 어림하기 어려운 세계를 형성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틀뢴이고 알렙이고 바벨의 도서관이다.


III. 인물과 분신의 문제

     일찍이 보르헤스 문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었던 것은 인물의 문제이다. 조지 슈타이너는 보르헤스의 작품 전체에서 「엠마 순스」(『알렙』)를 제외하면 여자가 없다고 했고(Steiner 1973, 46) 옥타비오 파스는 여자가 없으므로 남녀간의 사랑 또한 없다고 했다.(Paz 1991, 71) 보르헤스의 작품이 소설답지 않게 느껴지고 시간에 대한 에세이처럼 보이는 까닭도 인물이 특징이 없고 지나치게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견해는 통념적인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보르헤스 작품이 기존 소설과 얼마나 다른가를 증명할 뿐, 등장인물의 존재론적 성격이나 관계에 대한 분석은 아니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인물의 이미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단어이며, 존재라기보다는 행위이다. 일상 삶의 경험은 인간의 마음에 기억이라는 형태로 고착되면서 한 인물에 대한, 한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인물의 존재는 역사적 좌표,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에 위치함으로써 그 존재의 유일성과 확실성이 보장되지만, 보르헤스의 인물은 일상적 시간 선상에서 움직이는 역사적 인간들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두 갈래 오솔길로 만들어진 정원」에서 앨버트가 얘기하듯이,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는 시간망이 있다면,


그 대부분의 시간들에서 우리는[앨버트와 유춘]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시간들에 있어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들에서 우리 두 사람 모두 존재합니다.


    이처럼 인물의 존재론적 성격은 시공간의 메카니즘에 종속된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인물은 주체성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전형적인 문학적 환상을 형성하기보다는―이는 보르헤스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선뜻 머리에 떠오르는 특징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시간에 종속된 꼭두각시이며 주어진 역할만을 연기하는 행위소이다.

     따라서 보르헤스 작품에서 근대적 주체 개념은 부정된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나’라는 하나의 실체를 전제하는데, 이 실체 개념은 아무런 근거가 없이 도입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다.(Borges 1979, 40) 바꿔 말해, 모든 가능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공연속체를 상정한다면 존재는 하나이며 동시에 전체이고, 한시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하고, 유(有)이면서 동시에 무(無)이다. 「죽지 않는 사람」(『알렙』)은 서기 전 8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28세기 동안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상당히 복잡하다. 우선 화자는 카르타필루스의 책에서 문서를 발견한다. 이 문서는 원래 루포라는 죽지 않은 사람이 작성한 것인데, 카르타필루스가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놓은 것이다. 이야기 마지막에 화자는 ‘1950년에 쓴 후기’를 덧붙임으로써 작품은 완결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주요인물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호머, 루포, 카르타필루스, 화자이며,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무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Borges 1960, 20) 호머는 루포이고 카르타필루스이며 화자이고 “신이고 영웅이고 악마”가 됨으로써 이들은 이른바 분신 관계를 유지한다.(Borges 1960, 21)

     그러나 보르헤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18-19세기 서구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분신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구 문학의 분신은 연원을 따지면 병리학적인 개념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보듯이 분신은 자아 분열을 통해서 인간의 양면성이나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을 극화하는 문학적 장치다. 그러나 보르헤스 작품의 인물들은 심리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니마(Anima)나 아니무스(Animus)라는 개념처럼 주술적이고 신화적이고 무의식적 세계를 형상화하는 수단도 아니다. 오히려 보르헤스 작품의 인물들은 분신이나 범신론의 개념보다는, 굳이 예를 든다면, 중세의 피구라(figura) 개념에 더 가깝고 할 수 있다. 보르헤스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체현하고 있는 개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피구라와 보르헤스 우주의 법칙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무시간적 존재인 하느님의 눈을 통해 본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독자성과 통합성을 설명하는 메카니즘이라면 후자는 일원적인 시간 계열을 해체함으로써 생겨난 상상세계의 작동 원리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앞서 언급한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아스테리온과 테세우스의 관계, 앨버트 박사와 유춘의 관계를 비롯하여 나와 타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는 인과론이 아니라 우연이며, 필연성이 아니라 확률이며, 동일율이 아니라 모순이다. 선후관계로 연결되는 계기적 시간이 없으므로 인과율이 작동하지 않으며, 다양한 시간 계열이 교차하므로 동일율은 성립할 수 없다.


IV. 가능 미학

     이상에서 보았듯이 시간 조작에 기초하고 있는 보르헤스 작품은 경험세계 또는 역사세계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관념적이고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세계에 대한 문학적 담론이다. 흔히 말하듯, 환상문학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사항은 이러한 언명 하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암묵적인 전제이다. 보르헤스의 시공간의 특성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시공간관을 기준으로 삼을 때만이 가능하며, 환상문학이라는 용어도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문학이 환상문학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할 때만이 논의가 가능한 상대적인 개념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용인하는 시간관과 현실관을 판단 기준으로 삼을 때만이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흔히 말하듯이 보르헤스 문학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있다는 견해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혹은 초자연적인 것이 공존하므로 환상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보르헤스 문학은 대부분 시간 조작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환상문학과는 구별된다. 19세기 고딕소설이나 그리고 20세기 중남미 환상문학은,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몇몇 작품을 제외한다면, 시간 조작보다는 공간 조작에 의존한다. 월폴의 『오트란토 성』이나 포우의 『어셔가의 몰락』이나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비롯하여 에르난데스 펠리스베르토의 「발코니」나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환상 단편,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같은 작품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들 작품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은 특정 공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다. 독자는 이 사건이 어떤 메카니즘으로 작동되는지 알 수 없으며 단지 이 세계의 법칙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고 추측할 따름이다. 반면에 보르헤스 작품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사건은 대부분 작품이 가정하고 있는 시간의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비록 우리가 이 시간 계열은 현실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작품에서 제시된 시간관을 용인한다면 초자연적인 세계의 문법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가 앞서 예를 든 보르헤스의 작품이 모두 그렇다. 마찬가지로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유명한 작품 「씨앗으로 가는 여행」(Viaje a la semilla)은 역행하는 시간을 다루고 있는 환상 단편인데, 이 작품도 시간의 가역성을 수용하면 아무런 논리적 곤란을 느끼지 않고 사건의 성격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것이지만,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은 공포와 전율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러브크래프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환상문학 이론가들은 공포를 환상문학의 필수조건으로 열거한다(Lovecraft 1995, 7-18). 이들과 이론적 지평이 다른 토도로프 역시 공포를 환상문학의 부수적인 조건 인정한다(Todorov 1996, 151). 공간조작에 기초한 환상문학에서 느닷없이 분출하는 초자연적 사건은 독자에게 섬뜩한 두려움을 안겨주며, 나아가서는 일상 세계의 두터운 지각을 깨뜨리는 미학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시간, 공간, 인물, 인물의 행동 즉 사건은 작품에서 제시된 나름의 가정과 법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고유한 우주를 구성한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처음에는 틀뢴이 단순한 혼돈(caos), 제멋대로 발휘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틀뢴은 우주(cosmos)이며, 잠정적이나마 이 세계를 지배하는 내적 법칙이 있다고 알고 있다.”(Borges 1992, 20) 이 법칙이 앞서 지적한 우연, 확률, 모순이다. 다시 말해서 보르헤스의 세계는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개연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Borges 1992, 20) 낯선 세계이지만 고유한 작동 메카니즘을 갖고 있으며, 개연성은 없지만 상상 가능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반아리스토텔레스 문학, 반재현 문학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학을 일컬어 가능 미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지금까지 보르헤스 작품의 얼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대강은 상상 가능한 세계의 구축이라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르헤스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나는 보르헤스 작품은 문자 그대로, 허구로, 가상 질서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과감하게 얘기하면, 보르헤스 작품은 역사적 현실에서 살고 있는 인간과 세계와 우주에 대한 모종의 진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이나 의미도 없다. 일찍이 바라네체아가 말했듯이 보르헤스 문학의 핵심은 놀이다.(Barrenechea 1957, 71) 시간의 놀이며 상상력의 놀이며 담론의 놀이다. 문학이 순수한 놀이라는 주장이 곧 문학의 위상과 가치를 끌어내리는 일은 아니다. 19세기 낭만주의로부터 20세기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작가와 이론가들은 지나치게 과도한 의미를 문학에 충전하려고 시도해왔다. 문학이 종교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거나 문학을 통해 영원불변한 진리의 흔적이나마 포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특정 문학관에 불과하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문학관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그의 세계에서는 “형이상학마저도 환상문학의 일종이다”.(Borges 1992, 24)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세계의 의미나 진리도 결국 인간이 꾸며낸 상상의 질서라는 점에서 문학과 다를 바가 없다. 보르헤스 문학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정당화된다.


V. 담론의 미로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를 둘러싸고 있던 괄호를 풀고 보르헤스 문학이 함축하고 있는 문학 외적인 의미를 살펴보겠다. 서구에 의해 주도되어온 근대성의 핵심을 절대적 시공간에서 찾고,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 원리로 주체 개념을 든다면 보르헤스의 작품은 서구 중심의 근대성에 대한 반명제로 읽을 수 있다. 시공간을 조작하고 현실의 맥락을 제거해버린 보르헤스의 세계는 담론의 미로이다. 이 세계에서는 근대성의 담론을 비롯하여 그 어떤 담론도 상상 가능한 담론 가운데 하나일 뿐으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말을 형이상학적인 관점이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일상 세계의 유한성과 덧없음 뒤에 감춰진 우주의 다차원성과 초월적 진리에 대한 논증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무엇은 실제로는 환(幻)이며, 진여(眞如)는 저 너머에 존재한다고 패러프레이즈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라프의 주장처럼 보르헤스 작품은 “부재를 부재로 극화함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의미를 긍정한다”고 할 수 없다(Graff 1979, 71) 이는 전도된 해석이다. 오히려 보르헤스는 현실의 확실성을 해체하려고 다른 세계, 상상의 세계를 적극적인 방식으로 창조한다. 한편, 보르헤스는 서구의 이성중심주의 이야기 구조를 재조직하고 글쓰기를 포함한 갖가지 체계를 가지고 유희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곧 “행복한 정신분열증”의 징후라는 린콘(Rincón)의 견해는 내가 보기에 지나친 외삽이다(Beverley 1995, 228). 보르헤스의 허구 세계에서 경합하는 담론은 진위 판단이나 가치 평가의 범주를 벗어난다. 판단하고 평가하려면 기준이 필요한데 보르헤스 작품은 모든 정태적 확실성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기준점을 잡을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행복한 정신분열증”은 바로 자신의 미학 세계를 역사 세계로 번역할 때 드러난다. 역사 세계에서는 문학적 담론이건 정치적 담론이건 진위 판단과 가치 판단을 수반한다. 그러나 현실의 보르헤스는 현실과 문학을 동일시하려고 한다. 돈키호테처럼 삶과 예술을 구별하지 않고 삶을 예술처럼 살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이차 페론 정권을 무너뜨린 최악의 군부독재가 시작되던 1976년 보르헤스는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를 방문했다. 그리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발행되는 《메르쿠리오》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리부터 독재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도 마찬가진데,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도 비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피노체트 정권의 잔혹한 학살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도 나름대로는 정당성을 갖고 있으며, 중남미 지식인들이 흔히 비판하는 서구 제국주의도 그렇게 부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모두가 세계에 대한 하나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보르헤스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후회했다고 변호하지만, 사실 이는 보르헤스의 실수라기보다는 그의 문학적 사고와 정치적 사고 사이의 논리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담론의 다양성을 주장했던 모든 중남미 작가가 보르헤스처럼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코르타사르는 문학 작품과 정치적 참여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진보적 견해를 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르헤스의 견해는 보수적 정치관, 특히 페론에 대한 반감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장이 곧바로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거의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 칭찬하는 보르헤스의 문학과 많은 비평가들이 되도록 침묵하거나 외면하려고 드는 그의 정치적 행위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사유의 일관성을 부정하는 논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바토의 말처럼 보르헤스는 “가차없는 현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Sábato 1991, 70)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죽지 않는 인간」에 등장하는 카르타필루스가 말하듯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말(言語)뿐이다”는 언명에 드러나 있다. 즉 인간도 시간도 역사도 현실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담론만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사물의 윤곽마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시력을 가진 보르헤스에게 현실은 관념의 그림자였는지도 모르며 자신의 귀에 들리는 언어로 조직된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악한 전쟁’이 끝나고 부모, 남편, 아내, 자식의 행방을 찾지 못해 광장에서 통곡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현실 삶에서 질곡받고 상처받고 고통받는 인간들의 생생한 감정과 의지와 행동마저도 시간과 더불어 빛이 바래고 마침내는 언어로만, 담론으로만 남을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즉, 문학적 상상의 세계에서 담론은 존재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으나 현실 세계에서 진리치를 갖지 못하는 담론은 그 어떤 매끄러운 수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상의 논의는 현실의 보르헤스가 취했던 정치적 태도에 비추어 보르헤스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우리는 특정 역사 세계에서, 20세기 중남미처럼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정치․사회 현실에서 보르헤스 문학이 담고 있는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한 결과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았을 뿐이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이 결과가 부정적이라고 해서 곧 완벽하고 투명한 논리로 구성된 보르헤스 작품의 미학적 가치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보르헤스 미학 세계를 현실 세계와 관련지어 이해하고 해석하고 비평함으로써 무언가 심오한 메시지를 끌어내려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보르헤스 문학을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규정하고 중남미 세계의 우화로 해석하고 우주의 참모습이나 초월적 진리의 현시로 이해하고 또 보르헤스를 20세기 사상의 디자이너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이 지점에 이르러,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보르헤스 작품의 유희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문학을 다시 한번 괄호 속에 넣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