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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학가’ 보르헤스 / 우석균 2003-10-22 / 6217   

‘민족문학가’ 보르헤스

우 석 균



1. 보르헤스에 대한 기존의 시각


     보르헤스가 민중의 역사나 사회에 관심이 없는 귀족적인 작가라거나, 아르헨티나적 뿌리가 없는 작가 혹은 현실을 초월한 환상문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작가라는 평가는 젊었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닌 고정 관념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조차 이미 1933년 엔리케 앤더슨 임버트(Enrique Anderson Imbert)가 보르헤스는 국가 정신과는 동떨어진 인물이라고 비판했으며, 1948년 무레나(H. A. Murena)는 보르헤스 청년기의 작품 세계가 옛날의 영화에 대한 아르헨티나 과두계층(oligarquía)의 향수를 내포한 과거 지향적이라는 점을 문제삼아 당대의 민족적 정서를 공유 못하는 작가라고 비난하였다. 또 1954년 아돌포 프리에토(Adolfo Prieto)는 「보르헤스와 새로운 세대」(Borges y la nueva generación)라는 평론에서 보르헤스에게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1957년 최초의 심도 있는 보르헤스 연구서를 쓴 바레네체아(Ana María Barrenechea)는 비록, 보르헤스가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피상적이라는 프리에토의 지적에 반박하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이 “비현실성”(irrealidad)이라고 규정하여 그녀 역시 보르헤스를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연관시키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보르헤스가 서구에 처음 소개될 때 ‘서구적’, ‘보편적’이라는 일반화된 평가는 전략적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가 세계적 명성을 얻기 훨씬 전인 1944년 이미 프랑스어로 작품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글을 썼던 네스토르 이바라(Néstor Ibarra)는 아르헨티나에서 보르헤스를 국적불명의 코스모폴리탄 작가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보르헤스를 아르헨티나 작가가 아닌 ‘보편적’인 작가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라틴아메리카 작가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던 터라 아르헨티나 작가임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서구에서의 본격적인 보르헤스 연구의 시초라 할 수 있을 1964년 《레르느》(L'Herne)지의 특집은 보르헤스 수용의 일대 전환이었다. 이제는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적 작가냐 서구적 작가냐 하는 뿌리를 둘러싼 논쟁에서 탈피하여 근대라는 커다란 틀과의 연관성에서 조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쥬네트를 비롯한 소위 ‘열린 구조주의자’들은 ‘닫힌 구조주의’에 아직 잠재해 있는 과거의 근원과 중심 및 절대적 진리에 대한 유토피아적 향수를 극복하고 탈구조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보르헤스에게서 찾았다. 그의 텍스트가 근대에 대한 서구의 자체 비판과 반성의 길잡이로 수용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90년대 벽두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더불어 고조되었던 보르헤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근대를 해체하려 했던 쥬네트, 푸코, 데리다의 보르헤스 독법의 연장으로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면서도 다소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는 작업이 있다면 보르헤스와 동양 사상의 관계에 대한 천착이다. 그 결과물의 결정판은 보르헤스가 만년에 알리시아 후라도(Alicia Jurado)와 공동 저술한 『불교란 무엇인가』(Qué es el budismo, 1976)를 번역한 『보르헤스의 불교강의』(김홍근역)일 것이다. 번역본에 포함된 보르헤스, 불교,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짚어 본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글은 근대적 자아에 대한 서구인들의 맹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르헤스의 불교적 사유에 귀기울여함을 역설한다. 이는 곧 근대 이래의 서구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중심부와 주변부의 사유를 대등시함으로써 주변부 사유의 주체성의 복원을 모색한 일종의 탈식민주의적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보르헤스에 대한 새로운 지평

     서구와 국내의 이런 수용 방향은 심각한 결핍을 내포하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를 낳았던 아르헨티나적 맥락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고찰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르헤스를 서구적 작가, 보편적 작가, 나아가 국지성보다 근대라는 커다란 틀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접근법이 일반화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보르헤스의 독특한 텍스트에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보르헤스의 대표작인 『픽션들』(Ficciones, 1944)과 『알렙』(Aleph, 1949)의 단편들은 아르헨티나적인 냄새를 철저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서구인이나 국내 독자들로서는 배후의 맥락을 짚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아르헨티나적 맥락과 연관시킨다는 것은 언뜻 보아 보르헤스의 풍요로운 작품 세계를 국지적인 문학으로 축소하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보르헤스에게서 아르헨티나를 지워버리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가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처럼 유럽이나 미국에 거주하기를 택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에 살기를 고집했다는 사실이나, 하루에도 몇 시간씩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산책하였고, 아르헨티나와 가문의 역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풍경과 사람들에 애착을 지녔다는 전기적 사실이나 작품 주제 및 소재를 들먹이는 실증주의적 비평의 유혹을 뿌리치더라도, 보르헤스 초기 텍스트의 국민 문학 창출에 대한 관심, 아르헨티나 문학을 ‘근대화’하고 세계화시키고자 했던 청년기의 열망, 주변부 작가라는 존재적 조건이 산출한 특이한 사유와 글쓰기 방식 등이 서구에서도 비교적 최근까지 등한시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은 보르헤스에 대한 연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탈구조주의니 하는 일종의 ‘유행’에 편승하여 이루어진 것일 뿐 그의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해보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실제로 국내에서 보르헤스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연관시켜 수용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무렵 아르헨티나와 서구에서는 이미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한 해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었다.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실비아 몰로이(Sylvia Molloy)의 『보르헤스의 문학』(Las letras de Borges, 1979)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녀는 보르헤스를 환상 문학가로 단순히 정의하는 일반적인 평가를 반박하여 보르헤스는 현실과 환상을 끊임없이 오가는 작가임을 부각시켰다. 그 뒤를 이어 보르헤스에게서 좀더 구체적인 아르헨티나적 맥락을 발견하려는 노력들이 속속 결실을 맺어왔다. 다니엘 밸더스턴은 “보르헤스라도 현실적 맥락에서 벗어난 글쓰기를 할 수는 없었다”(Borges, even Borges, cannot but write out of context)라고까지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비록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다른 연구들이 보르헤스에게서 아르헨티나적 맥락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초기 텍스트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보르헤스가 서구적 작가라는 인상을 결정적으로 남겼던 『픽션들』과 『알렙』의 단편들까지 분석 대상을 넓혔지만, 텍스트에 파편적으로 널려 있는 아르헨티나적 ‘정보’를 수집하는 데 그쳤다는 인상을 준다. 만일 보르헤스에게 아르헨티나성(argentinidad)을 복원시키는 작업이 정보의 나열에 그친다면 그것은 다분히 문헌학적이고 민속지학적인, 따라서 어떻게 보면 국수적이고 지엽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아트리스 사를로(Beatriz Sarlo)를 필두로 라파엘 올레아 프랑코, 호세 에두아르도 곤살레스(José Eduardo González)의 연구들은 보르헤스의 아르헨티나성을 복원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근대성이라는 전(全)지구적 경험과 아르헨티나적 맥락을 연관시키는 거시적인 시각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에 보르헤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 사를로의 연구서 한 권은 금년 들어 『보르헤스와 아르헨티나 문학』(김한주역, 서울: 인간사랑, 1999)으로 번역되었다. 사를로는 문학사회학과 비판적 리얼리즘에서 출발하여 근대성의 문제에 천착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또 다른 주요 저서인 『주변부적 근대성: 1920, 30년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Una modernidad periférica: Buenos Aires 1920 y 1930)는 롤랑 바르트, 레이몬드 윌리엄스, 벤야민,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영향도 추적할 수 있지만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마샬 버만(Marshall Berman)의 『현대성의 경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의 몇몇 장과 칼 쇼르스케(Carl Schorske)의 『세기말의 비인』(Fin-de siècle Vienna)이 시도했던 것처럼 아르헨티나라는 주변부에서의 근대성의 본질과 여러 가지 발현 양상을 규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를로에게는 “보르헤스만큼 더 아르헨티나적인 작가는 존재하지 않고”(“No existe un escritor más argentino que Borges”), 그의 ‘민족주의적’인 색채는 아르헨티나를 충실히 재현했느냐의 문제라기보다 “문화적으로 주변부에 속한 나라에서 어떻게 문학을 할 것인가?”(cómo puede escribirse literatura en una nación culturalmente periférica?)라는 고민을 심도 있게 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사를로에게 아르헨티나의 근대성은 중심부와 주변부의 긴장 관계를 가장 커다란 특징으로 하고 보르헤스는 그 긴장을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시킨 작가인 것이다.

     R. O. 프랑코의 『또 다른 보르헤스. 초기의 보르헤스』는 비슷한 작업이기는 하나 근대성이라는 범주보다는 라 플라타 연안 및 아르헨티나의 문화적, 문학적 맥락에 초점을 둔다. 보르헤스의 세계성 혹은 보편성(universalidad)이 그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취향 때문이 아니라 라 플라타 지방의 역사적, 문화적 소산임을 강조하면서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를 재정의 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그에 따라 이 연구는 사를로처럼 서구 문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주변부 문학의 태생적 딜레마에 관심을 갖기 보다 대략 1940년대 초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맥락, 특히 민족주의의 발흥이 문학에 끼친 영향, 크리오이스모(criollismo)와 보르헤스의 관계, 그의 초기 텍스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담고 있다.

     J. E. 곤살레스의 『보르헤스와 근대성의 담론』(Borges and the discourse of modernity)은 근대성에 대한 고찰과 문화 비평을 두 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의 사회의 변화가 보르헤스 작품의 내용에 투영되지는 않았지만 글쓰기 형식의 변화를 낳았다고 결론짓는다. 이 연구는 사회 변동과 형식 변화를 기계론적으로 대응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거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어째서 보르헤스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필요한 지 분명한 문제 의식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 하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종속에 대한 이론적 작업이 여태껏 턱없이 부족했다는 반성이다. 그래서 프레드릭 제임슨이나 레이몬드 윌리엄스 등의 이론도 검토하지만 앙헬 라마(Angel Rama), 진 프랑코(Jean Franco), 훌리오 라모스(Julio Ramos), 알레한드로 로사다(Alejandro Losada), 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Néstor García Canclini) 등 라틴아메리카인이거나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의 이론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J. 프랑코, 라모스,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관점을 받아들여 라틴아메리카는 선험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모스와 J. 프랑코는 라틴아메리카는 여러 외래 문화와 지역 문화의 복잡다단한 상호 작용(transaction)으로 인해 “문학 이전부터 이미 포스트모던적”(postmodern avant-la-lettre)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가르시아 칸클리니는 전근대와 근대가 공존하는 라틴아메리카에는 혼종의 문화(heterogeneous culture 혹은 cultura híbrida)가 착종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곤살레스가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본질이 포스트모던적이라거나 혼종의 문화라는 논의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보르헤스가 자생적이고 시대를 뛰어 넘은 조숙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일반적인 고정 관념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오히려 서구에 비해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공존이 두드러지는 특이한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 특히 20세기 전반기 그 어느 라틴아메리카 지역보다도 급진적인 근대화 과정을 겪은 아르헨티나적 맥락의 산물이 보르헤스의 텍스트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아르헨티나성을 복원시켜 주고 나아가 근대성과 문화 비평의 맥락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이상의 논의는 새로운 이론을 바탕으로 한 비평의 유희라고만은 볼 수 없다. 보르헤스가 청소년기를 외국에서 보내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귀향했을 때 아르헨티나는 문화적 민족주의(nacionalismo cultural), 보수 우익의 민족주의, 경제적 민족주의 등 각양각색의 민족주의가 강박관념처럼 사람들을 엄습하고 있었고, 보르헤스 또한 아르헨티나의 국민 문학의 방향성에 대해 고뇌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민족주의 분출의 배후에는 해일처럼 주변부 곳곳을 강타하고 있던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제2차 산업 혁명인 운송 혁명이 야기한 대규모 이민으로 전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즉, 근대화가 야기한 제문제가 민족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이고 서구적이라 할 수 있을 아방가르드의 영향으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쇼펜하우어나 버클리 같은 서구의 철학적 사유에 지적인 희열을 느꼈던 보르헤스로서는 서구적 사유 및 글쓰기 방식과 민족주의라는 양극단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느껴야 했던 내면적 갈등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주변부 지식인과 서구와의 관계 설정 문제로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3. 민족, 근대성, 배타적 민족주의

     우리 나라에서 민족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해서 민족이라는 것이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납득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 비해 민족적 실체가 불분명한 다른 나라의 경우도 흔히들 민족은 언어, 종교, 혈통, 문화 등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보았던 낭만주의적 민족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 우리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 데에 잠재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인 원형민족주의(protonationalism)의 존재를 아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이래 세계 지도의 부단한 변화는 원형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히려 국경이라는 테두리가 일단 정해진 후 국가가 같은 경계 내의 사람들을 결속시킬 목적으로 민족 의식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것이 소위 민족주의의 일반적인 경우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고대성을 지닌 것 같지만 역사가들의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는 민족들은 근대성을 가졌다는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는 원형민족주의적 특징과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고 주창할 수 있는 엄연히 근대적 현상인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민족주의는 이런 현상의 극단적인 경우다. 아르헨티나는 애초에 민족 국가를 이룰만한 기반이 취약했다. 독립 전 아르헨티나에는 원형민족주의라고 부를 만한 공동체 의식조차 희박했다. 원형민족주의를 형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도 특정 정체(政體)에 지속적으로 속해있다는 역사 의식의 형성이 가장 중요한데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의 모태가 된 라 플라타 부왕청은 독립 직전인 1776년에야 설치되었으니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소속감이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나의 민족 국가를 형성하기에는 계층, 인종, 문화, 경제, 지역간 격차가 너무 컸다. 이 갈등이 기나긴 내전과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 독재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최초로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한층 광범위한 흡인력을 발휘하며 아르헨티나인들을 결속시킨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서 재탄생하였다.

     최초의 상상의 공동체를 탄생시켰던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 엘리트들은 결국 로사스 독재를 타파하고(1852), 1862년에서 1880년 사이에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이 안정기에 이미 상상의 공동체는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1862년에서 1880년 사이에 차례로 대통령을 역임했던 미트레(Bartolomé Mitré),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 아베야네다(Nicolás Avellaneda)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정책은 서구 이민자를 대거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 결과 독립 후 1880년 무렵까지 유지되었던 “크리오요 아르헨티나”(“Argentina criolla”)는 이민자들로 점차 이질화되어 갔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통 문화와 순수 아르헨티나어의 보존, 심지어는 피의 순수성까지 거론하였다. 마누엘 갈베스(Manuel Gálvez), 리카르도 로하스(Ricardo Rojas), 레오폴도 루고네스(Leopoldo Lugones)로 이어지며 고양된 소위 문화적 민족주의는 당시의 이러한 문화적, 언어적, 인종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민족주의의 고조는 아르헨티나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제2의 산업혁명인 교통과 통신 분야의 획기적 발전이 가속화시킨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대두에 수반된 전 지구적 현상이었다. 또한 근대화가 야기한 급격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 역시 민족주의 논의의 불씨를 지폈으며 또한 그것은 다분히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급격한 도시화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70년대이래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도 민족주의가 유행하였는데 E. J. 홉스봄은 당시 민족주의 고조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근대성의 쇄도로 위협을 받게 된 전통적인 사회집단들의 저항, (2)선진국가의 도시화에 의해 급격히 성장한 새롭고 상당히 비전통적인 계급 및 계층, (3)전세계에 걸쳐 다양한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인구이동.


     아르헨티나의 문화적 민족주의도 사실 문화적 갈등은 피상적인 문제일 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격변에 따른 현상이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아르헨티나는 밀과 양모를 공급하는 생산 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기득권층과 이민자들은 이해를 달리했다. 지주들은 값싼 노동력을 구했지만 이민자들은 자영농이 되기를 원했다.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을 때 이미 아르헨티나의 거의 모든 토지가 소수의 과두 계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양자간의 피할 수 없는 경제적 갈등을 불러 일으켰고 사회 불안 요소가 되었으니 기존의 아르헨티나인들이 이들에 대해 경계심을 지니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원래 아르헨티나의 이민 정책은 ‘교양’ 있는 유럽인들을 유치하여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 ‘고급’ 문화를 이식시키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일부 이민자들은 아르헨티나의 농목축업 발전, 특히 밀농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상황은 과두 계층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민자들은 대체로 유럽의 후진 지역에서 몰려 왔고, 대다수 이민자는 도시에 정착하여 빈민층을 형성하였다. 고급 노동력의 유입을 기대하며 농목축업에 이미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놓은 상황에서 이민자들의 도시 유입은 어이없게도 아르헨티나의 전통적 수출 기반인 목축업과 곡물 재배를 마비시켰다. 뿐만 아니라 급격한 도시 팽창은 각종 사회 문제를 야기했고, 이민자 중에는 유럽에서 도망친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섞여 있어서 소요를 주동하였기에 이들에 대한 과두 계층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한편 기존 크리오요 중산층은 이민자들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이들과 합세하여 과두 계층이 독점하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할애를 요구하였다.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구는 1916년 대중 후보인 이리고옌(Hipólito Yirigoyen)의 대통령 취임으로 과두 계층에게서 정권을 빼앗을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이 시기를 경제적 민족주의 시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물론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반발이 대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르헨티나 국내적으로도 중산층과 서민층의 경제적 분점 욕구가 컸기 때문이다. 중산층과 서민층이 과두 계층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대응에 있어서 이렇듯 이민자들과 보조를 같이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양측 사이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통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불안감을 느끼고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상류층이나 자국 중산층, 서민층에 공통된 태도였다.

     문화적 민족주의는 나름대로 근대화와 이민자로 이질화된 아르헨티나 사회를 통합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려는 갈망의 소산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이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전 사회 계층의 합일점을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화적 민족주의는 애초에 배타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하층 계급 및 장차 아르헨티나 국민으로 편입될 이민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음은 물론, 나아가 외래 문화에 대한 국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것은 싫든 좋든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있는 아르헨티나가 필요로 하는 서구와의 유기적 연관의 필요성을 원천 봉쇄한 시대착오적인 선택이었다. 또 주변부 어느 지역보다도 중심부와 밀착된 역사적 경험을 지닌 라틴아메리카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해방과 통합의 이념으로 탄생한 민족주의의 이상을 저버린 것이었다.


4. 아르헨티나성에 대한 청년 보르헤스의 관심

     유럽에서 8년여의 청소년기를 보낸 뒤 1921년 귀국한 보르헤스에게 아르헨티나 문단은 너무 낙후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표현주의와 울트라이스모(ultraísmo)라는 아방가르드의 영향 아래 글쓰기를 시작했던 보르헤스로서는 아르헨티나 문학을 근대화하는 일을 시급한 당면 과제로 생각하였다. 모데르니스모의 대표자 루고네스(Leopoldo Lugones)에 대한 치기 어린 비판이나 대자보 형식으로 담벼락마다 붙인 잡지 《프리스마》(Prisma)의 발간, 울트라이스모 소개와 옹호 등이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곧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매혹에 빠져들어 아르헨티나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돌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풍경, 가문과 아르헨티나의 역사에 대한 고찰을 주요 주제로 삼은 첫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Fervor de Buenos Aires, 1923)에서는 이미 울트라이스모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일종의 애향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감성이 진하게 배어 있다. 두 번째 시집 『정면의 달』(Luna de enfrente, 1925)에 포함된 작품들은 사전까지 뒤져 가며 아르헨티나적 어휘를 최대한 사용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시들로서 국수주의적 태도, 즉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론적으로는 아르헨티나 문단의 근대화를 주장하면서도 작품에서는 아르헨티나적 감성과 어휘에 집착하는 이런 모순된 태도는 청년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서구적 기법 수용과 국민 문학의 창출을 조화시키는 것이 너무도 벅찬 일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적어도 그가 지향해야 하는 최종 목표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달』처럼 아르헨티나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 눈길을 끄는 수필집 『내 희망의 크기』(El tamaño de mi esperanza, 1926) 중의 동명의 글은 아르헨티나 문학을 크리오이스모(criollismo)의 국지성을 극복하고 세계성을 담지한 문학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보르헤스가 국민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담지한 문학을 크리오이스모를 통해 이룩하려 했던 것은 이 사조가 이미 그 역사적 기능을 다하고 쇠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크리오이스모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크리오이스모는 아르헨티나성을 가장 내면화시킨 사조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한때는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집단들이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후안 모레이라의 이미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수입한 아방가르드 정신을 크리오이스모와 접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크리오요식 아방가르드”(una vanguardia criolla)라 부를 수 있을 이런 태도, 즉 서구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그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잡지 《마르틴 피에로》(Martín Fierro)와 『남부』(Sur)의 노선과 일치한다. 1924년에서 1927년까지 발간된 《마르틴 피에로》는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극단적인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특유의 자의식을 지닌 잡지로 이를 기점으로 하여 남미의 문화적, 예술적 표현의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고 혁신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피에로》는 아르헨티나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이 잡지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이었던 올리베리오 히론도(Oliverio Girondo)는 서구식 아방가르드를 선호했으나 아르헨티나 국민 문학의 상징인 ‘마르틴 피에로’를 잡지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보르헤스 외에도 아르헨티나성에 관심을 갖는 일단의 작가들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마르틴 피에로》는 국수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진정한 지방성(localismo)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했고 에바리스토 카리에고(Evaristo Carriego)처럼 도시 대중적 주제를 크리오이스모와 아방가르드를 결합시켜 다루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르헨티나 문학과 서구와의 접합점을 찾으려는 이런 노력은 빅토리아 오캄포가 주도하여 1931년 창간되어 이후 몇십 년간 아르헨티나 지성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남부》(Sur)지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했다. 서구와 자국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때로는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내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기득권층만을 옹호하고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모든 것을 거부하였던 문화적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하여 아르헨티나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모두에 유연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생산적인 국민 문학을 건설하려 했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는 곧 문학을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을 상상의 공동체로 결속시키고,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에도 사대주의적 이데올로기에도 구애받지 않는 통합과 해방의 민족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5. 보르헤스는 민족문학가인가?

     1930년에 출간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Evaristo Carriego)를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의 텍스트에서 아르헨티나와 관련된 직접적인 관심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픽션들』과 『알렙』은 아르헨티나적 맥락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 장님이 되고 난 후 발표한 시집이나 『브로디의 보고서』(El informe de Brodie, 1970)의 몇몇 단편에서 다시 아르헨티나적 주제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럼 1930년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가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일까? 1919년의 경제적 위기, 1928년 재취임한 이리고옌의 무능력이 몰고 온 사회 혼란과 환멸, 1929년의 경제 대공황 등등이 야기한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혼란은 1930년의 군사 쿠데타로 귀결되었다. 이 쿠데타는 이리고옌의 처음 임기 중이었던 1919년부터 조직적으로 반격에 나선 과두 계층의 민족주의 운동을 등에 업었다. 문화적 민족주의자들보다 훨씬 배타적으로 계층의 이해를 옹호하는 이 극우 보수 반동적 민족주의자들의 등장으로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현실에 깊이 실망하게 된다. 1943년 페론의 등장과 파시즘의 전횡은 그로 하여금 현실에 등을 돌리고 형이상학, 문학, 지적 유희의 세계를 더욱 탐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픽션들』과 『알렙』을 나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흔치 않은 정치성을 띈 「추측의 시」(Poema conjetural, 1943)는 아르헨티나를 혼란에 빠뜨린 이들을 화적(火賊 montonero)으로 비유하고 있고, 그런 현실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체념적으로 “남미의 운명”(destino sudamericanono)이라고 표현하였다.

     미래적 전망을 상실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듯한 보르헤스의 이런 태도는 그를 민족문학가로 정의하는데 심각한 걸림돌이다. 민족주의 혹은 민족문학론은 대개 뚜렷한 이념성과 역사 의식을 바탕으로 미래로 향한 유토피아적 출구를 열어놓음으로써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관점은 가까이는 민족해방운동 주체로서의 민족을 상정하는 1960년대이래 주변부 민족주의의 특수함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외세로부터의 정치적 해방과 봉건 잔재, 식민 잔재 청산 등을 유토피아로 설정하는 미래적 전망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우리 나라의 민족문학론이나 쿠바 혁명 후의 제3세계론 혹은 범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사회참여적 성향이 민족주의에 대한 그런 개념을 낳았다. 그리고 멀리는 근대 민족주의를 태동시키고 확산시킨 자유주의자의 준거틀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그리고 자유주의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가 보여주듯- ‘민족’ 개진의 논거는 민족이 인류 역사발전의 한 단계를 대표하는 데 있으며, 특정 민족국가의 형성 논거는, 관련 구성원의 주관적 감정이나 관찰자의 사적 동의와는 별도로, 국가형성이 역사 발전과 진보에 상응하는가 또는 그것을 촉진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전망을 요구하는 민족주의는 애초에 보르헤스의 문학관이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불멸의 도시로 만들 수 있을 시, 음악, 회화, 종교, 형이상학을 창조해야 한다는 미학적 전망에 의거하여 미래를 꿈꾸었을 뿐이다. 문학을 통해 아르헨티나적 감성과 미학을 추구하여 아르헨티나인을 상상의 공동체로 결집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분명 보르헤스는 민족문학가인 것이다. 물론 1930년대 초기까지의 보르헤스가 때로는 지나치게 아르헨티나의 지방성에 집착하는 국수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소속감이 부족하고, 이민자들로 그나마의 공동체 의식도 깨져 가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시기에 통합을 추구하는 미학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야말로 아르헨티나 국민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고히 제시한 진정한 민족문학가이다.

     또 보르헤스의 대표작들로 꼽히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의 단편 소설에서 아르헨티나적 맥락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 그래서 보르헤스를 보편적 혹은 서구적 작가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은 사실 1930년대 보르헤스의 방향 전환 이전과 이후를 아르헨티나성 추구/포기라는 대립적 구도로만 파악하는 견해에 불과하다. 진정한 아르헨티나 국민 문학의 창출에 있어서 아르헨티나적 주제를 다루느냐 아니냐는 지엽적인 문제로 보고 서구와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고 글쓰기를 할 것인가를 고뇌할 필요성을 역설한 보르헤스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코란에는 낙타가 나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코란과 아랍의 관련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아르헨티나적 주제에 집착하는 태도를 평가절하하면서 그 자신도 크리오요식 아방가르드의 시기를 극복하고 서구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하였을 뿐이다. 서구와의 관계 설정에서 보르헤스가 목표로 했던 것은 그 어느 문학 전통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넘나드는 자유이다. 아르헨티나인은 애초에 유태인이나 아일랜드인처럼 주변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현실인식이었다. 게다가 보르헤스는 근대의 속성상 모든 국가가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서구와의 관계를 단절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누구보다도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70, 80년대를 풍미했던 민족해방 주체로서의 민족문학론이 90년대 접어들어 편협하게 느껴지고 극복의 대상으로 지탄받으며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르헤스의 선택은 분명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족문학론이 흔히 빠져들었던 배타성과 편협성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6. 결론

     시대에 따라 그리고 비평적 방법에 따라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보르헤스를 서구적이고 보편적인 작가로 규정하든, 서구의 근대를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대안을 제시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혹은 탈근대적 작가로 보든, 아니면 동양 사상의 독창성과 주체성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작가로 정의하든 그것은 해석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단지 지적인 만족이나 재미를 위해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경우를 제외하고 보르헤스에게서 무엇인가 인문학적 사명을 추론하려고 한다면 보르헤스를 주변부적 근대성의 맥락에 연관시켜 고찰하는 작업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태까지 보르헤스를 서구적 혹은 보편적 작가로 규정하면서 등한시했던 아르헨티나적 맥락을 복원하여 보르헤스 작품 세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재검토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끌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작업이다. 설사 보르헤스가 주변부적 근대성의 경험과 아무 연관이 없는, 다시 말해 아르헨티나인이면서도 라틴아메리카적 혹은 아르헨티나적 시대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독특한 작가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은 적어도 텍스트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겸허한 자세이다.

     보르헤스와 주변부적 근대성의 연관성을 고찰하는 것은 또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미 근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임은 틀림없지만 “근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현 상황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인 것이다. 성숙된 근대를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시대를 맞을 수밖에 없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변부 국가들이 커다란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근대를 재조명하고 반성하는 작업은 새로운 시대를 확실한 발걸음으로 디딜 수 있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대한 대부분의 고찰이 서구적 시각에서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치중했기 때문에 그것은 주변부적 근대성을 경험했던 우리나 라틴아메리카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점에서 보르헤스의 태도는 주목할 만 하다. 보르헤스는 1920년대의 아르헨티나 문단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불멸의 도시로 승화시킨 문학 작품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결핍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추측의 시」의 예에서 엿볼 수 있듯이 1930년대 이후의 아르헨티나 현실에 대해 냉소를 보내며 주변부적 근대성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였으면서도 콤플렉스나 절망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오히려 아르헨티나 문학과 세계 문학이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날을 꿈꾸고, 아르헨티나인이야말로 그 주변부적 특수성으로 인해 서구 문화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했다.

     보르헤스가 유연하면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국민 문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관점 때문에 가능하였다. 대부분의 민족주의가 그렇듯 문화적 민족주의를 필두로 하는 아르헨티나의 민족주의도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따라서 국민 문학은 모국의 것을 다루는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 방식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서구의 근대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주변부 작가로서 아르헨티나 국민 문학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모국의 것을 주제로 하는 글쓰기를 하기 보다 중심부에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유연하게 맞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의 서구 문화에 대한 자유의 문제가 다시 대두되는 것이다. 자유를 바탕으로 서구와의 관계 설정을 한다면 해일같이 밀려드는 중심부적 근대에 얼마든지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아 보르헤스를 민족문학가로 정의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우리 나라의 70, 80년대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60년대의 민족문학론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보르헤스를 민족문학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민족해방 주체로서 봉건 잔재를 청산하고, 정치적, 경제적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며, 외세를 배격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는 그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분명 보르헤스는 미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작가이다. 그러나 해방의 주체로서의 민족이나 미래적 전망의 강조는 처음부터 보르헤스가 걸었던 길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는 어떻게 하면 아르헨티나,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문학적으로 불멸의 존재로 형상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미학적 전망을 제시하고자 했고, 궁극적으로 문학을 통해 아르헨티나인들을 상상의 공동체로 결속시키기를 원했을 뿐이다.

    보르헤스를 민족문학가로 재평가하는 작업은 90년대 들어 우리 나라에서 민족문학론을 비판하는 일련의 비평적 담론 앞에 민족문학론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을 되돌아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분단 현실과 식민지적 상황을 타파하고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 몰두했던 우리 민족문학론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군부 통치 종식,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등과 더불어 국민 문학을 주도할 수 있을 담론을 생산하지 못했다. 만약 보르헤스와 같이 미학적 전망을 포괄하는 유연한 민족문학론이 존재했었다면 변화된 현실에 훨씬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보르헤스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신들을 반성하기 위해 보르헤스를 수용하는 서구적 태도일 것인가? 아니면 보르헤스 같은 세계적인 대문호도 동양 사상에 심취했으니 우리도 동양 사상의 주체성 회복을 통해 서구 담론과 대항하는 담론을 형성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부 작가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중심부 전통이든 주변부 전통이든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는 자세를 배울 것인가? 비록 서구인들이 보르헤스를 서구 근대에 대한 반성의 단초를 제시한 대문호로 극찬하고 있지만 그 시각을 국내에 수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구인들이 자신의 근대를 반성하는 시각은 우리 나라같이 주변부적 근대성을 살았던 이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와 동양 사상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시도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 보르헤스를 통해 그 동안 폄하되어 왔던 동양 사상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자는 것이라면 그 작업은 ‘타자’인 보르헤스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인 역량을 결집하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 보르헤스 같은 세계적인 문호가 동양 사상을 극찬했으니 이를 서구 근대의 여러 담론에 맞서는 주체적 사유로 대립시키는 시도는 국수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태도일 뿐이다. 보르헤스가 동양 사상을 예찬했다는 사실보다 우리한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떠한 문화라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이다. 보르헤스가 자유로운 사고를 강조했듯이 우리도 동양과 서양을 가르기보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고 추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에만 세계화가 가속화되어 가는 현재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편협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속에서의 보편적 민족주의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