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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사리오 페레의 『호숫가의 집』 / 김창민 2007-08-28 / 13699   

로사리오 페레의 『호숫가의 집』
- 푸에르토리코의 탈식민주의 글쓰기 -

김 창 민



1. 서문


      로사리오 페레는 푸에르토리코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녀의 페미니즘 작품은 서구의 페미니즘 작품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스페인 식민지였다가 독립도 못해보고 바로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아직도 반식만 상태에 놓여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상황은 그 나라 여성작가에게 서구 여성작가와는 다른 관점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여성해방의 문제도 역사, 정치, 문화적 문제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사리오 페레는 초기 작품들부터 이러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글을 써 온 작가이다.

      그녀는 1976년 첫 작품집 『판도라의 글들 Paperers de Pandora』에서부터 성차별의 문제를 푸에르토리코의 역사적, 인종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루어 왔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페미니즘 문학의 경계를 넘어 탈식민적 페미니즘의 성격을 띄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서구 중심적 페미니즘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페미니즘의 이론화가 있기 전부터 그것들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하려는 소설 『호숫가의 집 La casa de la laguna』(1996)은 페레의 문학이 추구해 왔던 것을 종합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미 10년 전 발표된 중편 『개 같은 사랑 Maldito amor』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의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전 작품과는 전혀 다르지만, 작품의 구조와 기법이 아주 유사하다.1)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을 통해 기존의 날조된 신화와 역사를 허물고 새롭게 푸에르토리코의 역사와 현실을 조명하려는 의도 또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영역을 넘어 푸에르토리코 사회와 문화가 지니는 주요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보다 포괄적인 시각으로 조망해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바로 작가가 허물고자 하는 날조된 신화와 역사, 그것이 낳은 왜곡된 현실은 무엇이며, 작가가 제시하는 역사적 진실과 바람직한 미래상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그런 작업을 요즘 흔히 말하는 ‘탈식민주의 글쓰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문제를 포함해서 이 작품에서 화자가 문제 삼는 모든 것들은 푸에르토리코의 피식민 역사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식민주의 이후’, 혹은 ‘탈식민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 colonialism)’이라는 용어가 유럽 중심적 역사관을 은연중 받아들이는 것이고, (신)식민지적 현실을 간과하거나 은폐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2) 고려할 때, 제3세계 문학과 관련해 이 용어를 사용할 때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직도 반(半)식민 상태에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문학을 논할 경우 더욱 조심해야 할 용어이다. 오히려 푸에르토리코의 현 상황에서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엔티콜로니얼리즘(anti-colonialism)’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날 탈식민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특히 푸에르토리코의 경우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탈식민주의’로 번역하는 데에 있어 갈등의 소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나아가 ‘탈식민주의’의 의미를 수 세기에 걸친 제국의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으로, (신)식민적 현실 속에서 정신의 탈식민화를 실천하려는 저항 의지로 규정한다면 이 글의 취지와 잘 부합되는 용어라고 보기 때문이다.


2. 스페인 문화: 탐욕과 폭력성

      이 작품은 8부 4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제1부가 시작되기 전 「이사벨과 킨틴의 약속 El pacto entre Isabel y Quintín」이라는 서문 형식의 글에서 화자인 이사벨은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이 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두 사람의 약혼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화자를 짝사랑하던 청년이 자기 마음을 전하고 싶어 화자의 집 앞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 때 킨틴은 달려 나가 가죽 혁대를 휘둘러 그 청년을 실신시키고, 그 후 그 청년은 자살을 한다. 화자는 충격을 받고 킨틴과 거리를 두지만, 킨틴이 후회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를 용서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각 집안의 폭력성의 원인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것을 피해감으로써 선조들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폭력성의 세습 고리를 끊겠다고 서로 다짐한다.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분들은 모두 정복자들을 관통해 온 기질을 이어 받았다. 더 잘못 된 점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 유전 인자는 그 이를 증오스런 그 정체의 늪으로 빠뜨리고 말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으면.(17) 3)

      이 첫 장에서 명백히 보여지듯 푸에르토리코 사회의 폭력과 그 원인에 대한 화자의 관심은 지대하다. 이 소설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서술하면서 화자는 킨틴의 폭력성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폭력성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언급을 여러 차례 한다. 이사벨이 폭력적인 킨틴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 아비(Abby) 역시 스페인의 전근대성 대해 자주 비난을 퍼붓는다.

- 스페인은 한번도 정치적 혁명이나 산업혁명을 이룩한 적이 없어. -할머니는 내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식민통치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스페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한탄하셨지.(17)

      이처럼 폭력성을 스페인 식민역사가 남긴 잘못된 유산으로 파악하는 화자이기에 모든 백인 남성인물들을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화자의 시아버지인 부에나벤투라는 자기 부인 레베카의 예술적 취향과 행동이 여성의 전통적 행동기준을 넘는다고 생각되자 초대된 손님들 앞에서 부인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81)

      이러한 폭력성은 그의 아들 킨틴에게 이어진다. 그는 이사벨의 소설이 출판되면 자기 집안의 명예가 추락할까 봐 이사벨에게 소설 쓰는 일을 그만 두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까지 한다. 결국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집안의 불행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이사벨에게 돌리며 그녀를 구타하기에 이른다. 킨틴의 동생 이그나시오는 자기 아버지의 반대로 에스메랄다와 결혼을 못하게 되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날 찾아가 권총을 난사하면서 울분을 푼다.

      아리고이티아 가문과 멘디사발 가문의 남자들은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부에나벤투라는 결혼 초기 과거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샘 위에 자기 집을 짓고, 그 물을 이용하여 스페인 선박과 거래를 하였고, 독일 군에게 섬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밀무역을 하고, 부도덕한 상행위를 일삼았다.

      킨틴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동생 이그나시오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기자 거래 선들과 공모해 회사를 파산에 이르게 하고, 자신이 새로운 회사를 만든다. 실업자가 된 동생이 몇 백 불만 빌려 달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거절해 결국 죽음으로 몰아간다.

      대부분의 남성 인물이 지닌 탐욕과 폭력성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남성중심주의로 이어진다.4) 부에나벤투라는 자기 부인을 강압적으로 대하는가 하면, 흑인 여자들을 돈 몇 푼을 주고 성 노리개로 삼는다. 흑인 여성들에 대한 그의 행실 또한 킨틴에게 이어진다. 자기 아이들의 보모처럼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흑인 소녀 카르멜리나와 성관계를 맺어 서자를 낳는다. 한편 이사벨의 외조부인 비센소 안톤산티 또한, 비록 자기 부인의 암묵적 허락 아래서라고 하지만,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다.

      이 작품에서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여성인물의 대응은 세대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레베카는 남편의 야만적 폭력 앞에 평소에 갈망하던 자유 여성상을 포기하고 전통적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서, “때에 따라서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도 때론 완벽한 반항이 될 수 있다”(135)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하고 만다.

      레베카의 며느리인 이사벨은 킨틴과 결혼식을 올릴 장소로 한 명의 정복자도 묻혀있지 않은 성당을 택한다.(219) 킨틴과 조상들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을 단절하겠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킨틴이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고, 마침내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동생을 파멸로 몰아가고, 급기야 자신과 아이들에게도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고는 남편과 결별해 버린다.

      더욱이 이사벨의 며느리에 해당되는 코랄은 남녀관계에 있어 보다 더 진보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대학을 나와 언론사에 근무를 하다가 독립단체로 옮긴다. 그리고 부르주아 집안에서 자란 마누엘을 의식화시켜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게 만들고, 그와 동거를 한다. 특히 코랄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사실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소외된 존재였던 푸에르토리코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 탄생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백인이 아니라 혼혈이라는 점은 그 상징적 의미를 더욱 확장한다고 할 수 있다.5)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대부분의 남성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중심주의는 폭력과 비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바로 스페인의 식민지배가 남긴 잘못된 유산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여성의 해방뿐만 아니라, 평등과 관용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청산되어야 할 주요 대상으로 암시된다.


3. 인종차별주의

푸에르토리코의 부르주아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종 편견이 심한 사람들 중 하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적 편견을 교양과 품위로 숨긴다. 하지만 회사의 중역이나 정부의 고위직에서 흑인을 찾는 것은 흰색 앵무새를 발견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360) 6)

      푸에르토리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의 실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구절이다.

      부에나벤투라가 빈손으로 푸에르토리코에 와 부르주아 집안의 레베카와 결혼을 하고 손쉽게 부를 축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올 때 가져온 낡은 가계도 덕분이었다. 그것에 의하면 그는 잉카 문명을 정복한 페르난도 피사로의 후손이었다.

      그 당시 푸에르토리코 부르주아 사회는 결혼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순수혈통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그 가계도 하나로 쉽게 부르주아 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사회에서는 혼인관계를 기록하던 두 개의 호적이 있었다. 하나는 백인들의 결혼을, 다른 하나는 흑인의 결혼을 기록하였다. 성직자들은 그것을 ≪순수혈통 기록부≫라고 불렀다. 그 풍습은 과거 스페인에서 순수 기독교인의 혈통을 유지하려던 관습에서 유래된 것인데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누가 흑인 피가 섞였는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34) 7)

      혈통에 대한 시대착오적 허위의식을 조롱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서 드러난다. 부에나벤투라는 자기 딸들이 성년이 되자 스페인으로 가, 재산을 앞세워 부르봉 왕가의 일족인 청년들을 사위로 맞이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위들이 오직 가문만을 내세울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젊은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허세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271)

      킨틴의 경우 결혼 초기에는 혈통 문제에 있어 개방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마침내 자기 아들 마누엘이 흑인 피가 조금 섞인 코랄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연필 깎던 칼로 자기 손가락을 그어 흐르는 피를 보이며 결사반대한다.

마누엘, 이 피 보이니? 아랍인이나, 유태인, 흑인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 이렇게 구아다라마 산의 눈처럼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수천 명이 목숨을 바쳤단 말이야. 아랍인들과 전쟁을 했고, 1492년엔 스페인에서 유태인과 함께 아랍인을 몰아냈단 말이야.(367)


      이와 같이 순수혈통주의를 내세우는 인물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희화화된다. 여성 노동운동가로서 푸에르토리코 사회의 낡은 관습과 가치들을 공격하는 에르멜린다는 “부에나벤투라 멘디사발 집안이 대단한 가문인 것처럼 으스대지만, 사실은 스페인에서 햄을 팔고 다니던 행상 집안이었다”고 폭로한다.(359)

      혈통에 대한 멘디사발 집안 가장들의 거만한 태도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들의 비열한 행동이다. 지배층으로서 도덕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비열한 행동 앞에 그들의 순수혈통주의는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동시에 순수혈통주의를 내세우는 백인들이 인종차별을 통해 얼마나 잔인하게 흑인들을 착취해 왔는지 보여주면서, 흑인들의 비참한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페트라의 할아버지 베르나베 아빌레스(Bernabé Avilés)는 앙골라의 고원지대에 사는 부족장이었는데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잡혀와 구아야마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토지를 몇몇 지주가 다 차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74) 더구나 그에게 “자기의 신과 언어 대신 기독교 신과 스페인어를 강요하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언어였던 반투어는 그에게 종교나 부족의 자존심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언어는 육체 그 자체였다.”(75)8) 그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 앙골라와 콩고에서 끌려온 동료들과 반란을 도모하다 실패해서 혀가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77) 반항적인 노예라는 낙인이 찍힌 탓에 그의 자손들까지 가난하고 고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흑인 여성의 경우 인종 차별과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성적으로도 유린당하기 때문에 3중 억압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페트라를 제외하고 모든 흑인 여성인물들은 정상적인 혼인을 통해 아이를 낳지 못하고, 흑인 남성이나 백인 남성의 성폭력의 희생물로 아이를 낳게 된다.

      피식민지의 흑인 여성이라는 3중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들의 비극적 삶을 백인 여성들의 삶과 대비시키고 있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흑인 여성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우선 페트라의 증손녀인 카르멜리나는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카르멜리나는 킨틴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고 그 대가로 학교에 다니면서 성장해 간다. 자신의 인종적, 계급적 조건을 의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키워간다. 그래서 흑인 패션잡지에 모델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다.(329) 비록 킨틴의 서자를 낳게 되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기를 페트라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이처럼 자기 어머니, 할머니와는 달리,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꿋꿋이 나가는 대범하고 강한 여인으로 그려진다.9) 작가는 이 인물을 통해서 젊은 세대 흑인여성의 희망을 그리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 여성의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은 물라타 여성인 코랄과 그녀의 외할머니 에르멜린다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에르멜린다는 미국 하청기업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미국 자본이 푸에르토리코의 여성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앞장섰다가 좌절당한 뒤, 의상실을 열어 성공한다. 그 후 그녀는 푸에르토리코 사회의 인종편견에 당당하게 맞서 나간다.

      물론 그녀가 완전한 흑인이 아니라 물라타이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사회에서 물라타 여성 역시 인종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그녀의 이미지와 행동에는 인종차별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과 함께 물라타 여성 역시 역사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조차 못하는 ‘타자’에 불과했던 물라타 여성이 이 작품에서 역사적 격변기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내용 자체가 인종과 역사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인종 차별 없이 모두가 민족의 주체가 되는 푸에르토리코 사회가 되길 원하는 작가의 희망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 흑인문화: 유대와 사랑, 영적 세계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작품에서 백인 지배계층은 탐욕과 폭력, 인종차별과 가부장적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그에 반해 흑인들의 세계는 유대와 사랑이 가득한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백인들이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힌 정복자로 섬에 와서 분쟁과 착취를 일삼아 살아 갈 때, 노예로 잡혀 온 흑인들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아간다. 흑인들이 살던 아프리카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푸에르토리코와 대조적인 곳으로 묘사된다.

앙골라, 콩고, 은동고에서 끌려 온 노예들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다. […]; 족장의 의무는 부족민의 육체와 정신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었다. […]마을 주위에 있는 밀, 옥수수, 그리고 다른 곡식이 자라는 밭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 소유였다. […] 베르나베가 구아야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마을 주변에 있는 모든 토지를 몇 안 되는 지주들이 다 차지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빈곤하게 살아야 하는지를.(74)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는 백인들과는 달리 흑인들은 피안의 세계와 소통한다. 페트라가 지배하는 호숫가의 집 지하층에는 흑인들의 수호신 엘레구아(Elegguá)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엘레구아 신은 섬에 사는 흑인들에게는 신 이상의 존재(“Aquél que es más que Dios”)이었다. 그녀는 이 엘레구아 신을 통해 조상들과 소통하면서 신비한 능력을 보여준다.(79)10)

      흑인들의 초자연적 세계와의 소통은 페트라의 죽음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녀가 백 살 가까이 되어 임종하는 날 새벽, 라스 미나스에 사는 친인척들은 이미 그녀의 죽음을 예감하고 수많은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호숫가의 집으로 온다. 그리고 라스 미나스로 향하는 그녀의 운구를 따르는 배들의 기나긴 불빛은 호수의 양안을 연결했고, 처음으로 호숫가의 집과 라스 미나스를 잇는 다리가 된다.(405) 이처럼 살아서 백인 지배층과 흑인 피지배층을 모두 돌보아 주던 그녀의 죽음은 이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을 잇는 사회통합의 계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초자연적 일화들은 흑인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이로운 사실들이다. 그것은 중남미 정체성의 발견과 회복을 위한 미학적 전략으로서 ‘경이로운 사실 lo real maravilloso’을 주창하는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글쓰기 방식에 가깝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경이로운 사실’이라는 미학은 서구의 초현실주의에 대한 ‘대항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전통적 사실주의와 비교해 볼 때 비모방적 서술 양식이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형식상 특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 발생과 기능의 측면에서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페트라는 여러 가지로 상징적 인물로 해석될 수 있다. 백인 가부장에 대립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주는 인물로서, 족장이었던 자기 아버지처럼 그녀는 호숫가의 집 지하층에서 여가장의 지위를 차지한다.11) 비록 남편과 함께 있었지만 지하층 거실의 가운데 가장 큰 의자는 그녀가 사용하였고, 하인들의 모임은 그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페트라’라는 말은 돌을 뜻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호숫가의 집을 받쳐 온 바위였다.”(406)라고 화자가 은유적으로 표현하듯, 그녀는 푸에르토리코를 있게 한 기초였다. 마치 흑인들의 노동력으로 푸에르토리코 사회가 지탱되어 온 것처럼.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 부에나벤투라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의 탐욕과 폭력성을 누그러뜨리고 만다. 그는 매일 페트라가 제공하는 약초 물에 목욕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임종하는 순간에도 욕조에서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민중들의 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것을 후회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페트라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식체계에 도전하는 대안적인 전통의 소유자이자 실천자, 나아가 대항담론의 가능성”을12) 지닌 인물로 제시된다.

      킨틴이 자기 서자인 윌리(Willie)가 혼혈이라는 이유로 재산 상속을 거부하자 페트라는 그에게 가서 정면으로 대응한다.(39장) 자신이 호숫가의 집 가족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앞으로 부당한 대우가 계속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그녀는 푸에르토리코 하층민의 당당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과거 30, 50세대 작품에서 항상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흑인 하층인물들과 대조된다.13) 결국 페트라는 아프리카 문화가 지닌 자연과의 소통능력과 포용력을 체현하는 인물이고, 인고의 역사를 살아 온 흑인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화해와 평등이 실현되는 미래를 열어 가는 상징적 인물이다.

      호숫가의 집 역시 상징적인 장소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그 집은 탄생부터 비도덕적이었다. 위층은 폭력과 탐욕으로 가득 찬 백인 문화의 세계인 반면, 아래층은 사랑과 의리가 지배하는 흑인 문화의 세계이다. 위층은 가부장적 권위로 다스려지는 세계이고, 아래층은 모성애적 이해와 포용으로 유지되는 세계이다. 그 집은 아래층 흑인 민중들의 노동에 힘입어 위층의 백인들이 풍요와 안락을 누리는 곳이다. 이는 곧 푸에르토리코의 사회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혼혈아 윌리는 푸에르토리코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몸엔 호숫가의 집 지하층에 사는 흑인의 피와 위층에 사는 백인의 피가 섞여있다. 피지배자인 흑인 어머니와 지배자인 백인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태어난 그의 비정상적 탄생 과정은 푸에르토리코의 역사적 탄생 과정과 인종적, 정치적 현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 종교적 측면에서도 그는 두 세계를 결합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에서 대학교육을 받았다. 동시에 고조할머니 페트라의 보호 아래 자라면서 아프리카 문화와 토속신앙의 영향도 받았다. 두 문화와 종교를 조화롭게 한 몸에 받아들인 인물이다.14)

      마누엘 역시 이복 동생 윌리와 피부색도, 성격도 달랐지만 깊은 우애를 유지하였다.15) 그것은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보여준 탐욕적이고 배타적인 행동과는 대조적인 태도이다. 이 처럼 두 형제의 관계는 인종과 계급의 문제와 관련해 작가가 희망하는 푸에르토리코 사회의 미래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5. 역사 다시 쓰기

      이 소설을 통해 푸에르토리코의 근대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16)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멘디사발 가문과 몽포르트 가문의 이야기를 20세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개시킴으로써 소설은 푸에르토리코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직후부터 1982년 국민투표까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사건과 상황이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17) 물론 그 역사적 사건들은 주인공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각 시대별 도시의 모습과 대중문화, 계층별 생활 풍습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어 2장에서는 가족 이야기 보다는 미서전쟁 이전 카리브해의 정치 상황에서부터 1917년 윌슨대통령 시절 존 법(Ley Jones)을 통해 푸에르토리코인이 미국 시민권을 받는 과정을 보다 상세하고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시민권 획득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당시 민중들의 옷차림과 음식, 거리의 풍경, 미국에 대한 기층민중들의 태도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그 당시의 풍속도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부분에서 푸에르토리코 민중들은 미국의 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더구나 젊은이들은 서슴지 않고 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지원하고, 민중들은 가난하지만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일화를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25-33) 이처럼 당시의 생활상과 사회의 분위기를 많이 담은 것은 이 작품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의 역할도 함께 하기를 작가가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묘사들은 단순히 사료로서의 가치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작가 나름대로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지배 초기 민중들의 태도와 분위기에 대하여 과거 30세대나 50세대의 소위 ‘민족주의 문학’에서 다루어졌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미국지배에 대한 기층민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과거 민족주의 문학에서는 미국 자본의 수탈과 민중들의 고통, 미국의 강제적 문화이식 정책과 민중들의 적대감 등이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와 동시에 스페인 문화의 전통적 가치들을 이상화하고 미국 문화의 비인간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미국지배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민중들은 미국지배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기보다는 세계 일등 국가의 시민권을 얻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자신들도 미국 시민으로 전쟁에 기여하기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난 세대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작가들이 그리던 민중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모습이다. 섬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의 지배로 넘어간 것은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민중들의 시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대목이다.(35)

      이 부분은 푸에르토리코의 대표적 지식인 중의 하나인 호세 루이스 곤살레스가 미국의 점령에 대해 내리는 해석과 유사하다. 그는 수필 『4층으로 된 나라 El país de cuatro pisos』(1980)를 통해 처음으로 미국의 점령에 대해 민중적 입장에서 평가를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점령할 1898년 무렵,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를 원하던 사람들 중에서 반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국인 미국으로의 편입을 원했고, 많은 지주들도 미국의 침공을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에 편입되는 서곡이라고 간주하고 환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이어 미국의 수탈과 압제가 드러나자 그들은 환상에서 깨어나 보수적 민족주의자로 돌아섰다고 주장한다.18)

      한편, 하층계급은 미국의 침입을 자신들의 입지를 향상시키고 지주계급을 비롯한 상류층과의 관계를 청산할 기회로 생각하고 환영했다고 곤살레스는 주장한다.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상류계급 내에서도 소외당하던 부류, 특히 여성들은 푸에르토리코 문화의 미국화를 기존 지배문화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난한 계층과 흑인들 사이에서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독립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었다고 주장한다.19)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 푸에르토리코의 문화는 인종, 사회, 경제적으로 동질한 하나의 문화였고, 대지주들은 항상 반제국주의자였다는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곤살레스의 이런 주장은 이미 1978년에 출간된 그의 소설 『도착: 허구가 섞인 연대기 La llegada: crónica con ficción』를 통해서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미국 군대가 푸에르토리코 섬을 침공하는 사건을 다루는 작품인데, 당시 미군의 도착과 스페인 군대의 패주를 바라보는 사회 각계각층의 태도를 그린 소설이다.20) 스페인 지배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정치적 지배세력이나 지주계급을 비롯해 19세기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그리고 소수의 독립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당시 대부분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미국의 침공을 자유와 삶의 향상을 가져 올 긍정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소설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해체하고 새롭게 역사를 쓰려는 작가의 의도는 소설의 메타픽션적 형식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각 부마다 들어있는 “킨틴”이라는 제목의 장들은 소설을 쓰는 동기와 집필과정, 소설의 의미 등이 드러나는 곳이다. 또 이 소설에 대한 킨틴과 화자의 태도가 나타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소설의 진행과 나란하게 전개되면서 소설의 본 내용과 대립적 대화관계를 지속적으로 형성한다. 작가는 이런 형식을 통해 자신의 소설관과 역사관을 부각시키고 있다.

      킨틴은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역사학 석사를 획득한 인텔리이다.21) 그는 이사벨이 몰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소설이 조금씩 쓰이는 과정 동안 몰래 원고를 훔쳐본다. 처음에는 이사벨이 자기 집안의 이야기를 왜곡하고, 역사를 날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이사벨의 소설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점점 입증되어 간다. 오히려 킨틴이 집안의 과거를 미화하고 사실을 왜곡해 왔다는 것을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결국 관련된 에피소드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통해서 킨틴의 이야기와 이사벨의 소설 사이의 대립적 긴장관계는 갈수록 균형을 잃어가고, 동시에 지배계급의 시각과 언어로 만들어진 역사와 신화는 허물어져 간다.

      반대로 이사벨의 소설은 진실성을 담보하는 새로운 역사로서 부각된다. 다시 말해, 역사학도로서 역사적 진실을 믿고 역사는 진실만을 얘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킨틴의 입과 행동을 빌어 기존 지배계층이 쓴 역사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상반된 이야기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통해 자기 소설의 역사적 진실성을 확인시키는 교묘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메타픽션적 장치를 통해 이제 이 작품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푸에르토리코의 현대사로 자리 잡게 된다.22)

      비록 작가가 메타픽션적 글쓰기를 통해서 지배계층의 역사와 스페인 문화와 백인 중심의 왜곡된 민족주의를 해체하고 있지만,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해체의 대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목표로 삼는 ‘모든’ 역사와 ‘주체’가 아니라 과거 식민주의에 의해 구성된 역사이고, 왜곡된 ‘주체’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민족 주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의 중심은 이제 더 이상 스페인계 백인 남성이 아니다.


6. 맺음말

      로사리오 페레의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의 문화적 유산을 청산하려는 작업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된 제1세계의 자기 반성적 탈식민주의가 아니라, 아직도 리얼리즘의 저항정신을 계승하면서 부정되고 소외된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탈식민주의 문학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달리 아직도 소설의 ‘모방성’과 ‘지시성’을 유지하면서 저항적인 진리를 찾고 주장하는 탈식민주의 문학인 것이다.23) 따라서 그녀의 탈식민주의 글쓰기의 뿌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구조주의에서 찾기보다는 유럽의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범아프리카주의를 주창했던 뒤봐(W. E. B. Du Bois)와, 흑인 정체성 회복 운동을 전개했던 세제르(Aimé Cesaire)와 셍고르(Leopold Sedar Senghor), 그리고 정신의 탈식민화와 민족해방 운동을 펼쳤던 파농(Frantz Fanon) 등의 반식민주의적 대항담론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반제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자기반성적인 작품이다. 제국주의가 낳은 폐해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정하려는 의도가 담긴 민족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에는 메타픽션 기법 같은 해체적 글쓰기 전략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처럼 푸에르토리코의 역사를 해체하지만, 여기서 해체된 역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목표로 삼는 ‘모든’ 역사가 아니라 과거 식민주의에 의해 구성된 역사이기 때문에, 목적이 해체 자체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역사적 주체로서 민중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메타픽션 기법과 ‘경이로운 사실’주의 기법이 탈리얼리즘적이고 형태상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이는 탈리얼리즘은 탈식민주의를 추구하는 탈리얼리즘이다. 서구의 식민지배를 통해 왜곡된 자아에서 탈피하고, 진정한 주체를 발견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별되어야 한다. 과거 푸에르토리코의 30세대와 50세대의 리얼리즘 문학에서 보였던 백인 지배계층 남성중심의 민족주의를 탈피하고, 흑인과 여성을 동등한 자격으로 포함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만들어 가는 탈식민주의적 탈리얼리즘인 것이다.

      소설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고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이 독자에 따라서 소설의 미학적 완성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직도 진행 중인 반(半)식민의 현실을 생각할 때, 또 작가가 지성인으로서 소설을 통해 현실 개혁의 의무를 다하려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취한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푸에르토리코의 탈식민주의 글쓰기에서 아직도 정치적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역사적 당위인지도 모른다.●


각주

1) 이 소설은 전 작품과 비교해 볼 때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성취도가 보다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영어본은 미국에서 ‘전국 도서상’ 최종심사 대상에 올랐다.

2) 이경원(2003),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 『탈식민주의 이론과 쟁점』(고부응 역음), 24-25.

3) 앞으로 Rosario Ferré(1996), La casa de la laguna, New York: Vintage Books에서 인용한 부분은 쪽수만 표시하기로 한다.

4) 이 부분에서 푸에르토리코의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이 긴밀하게 결합된다. 70년대 이후 에드가르도 로드리게스 훌리아(Edgardo Rodríguez Juliá), 호세 루이스 곤살레스(José Luis González) 등 많은 남성작가들이 스페인의 문화유산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글쓰기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범주를 간과해 왔다면, 로사리오 페레, 아나 리디아 베가(Ana Lydia Vega)를 비롯한 여성작가들은 탈식민주의를 페미니즘화하는 작업을 전개해 왔다. 즉 이들은 “인종, 계급의 문제에 젠더를 일관되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 오면서 ‘다중적 주체’ 개념을 구체화”시켜 왔다. (태혜숙(2001),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45.)

5) 이와 같이 가부장적 권위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여성들의 태도가 세대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개 같은 사랑』에서 데 라 바예(De la Valle) 가문의 여성들의 변화 과정과 동일하다. 전통적인 남성 중심적 가치에 매몰되어 살았던 20세기 전반의 여성에서부터 그 전통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20세기 후반의 신세대 여성들의 모습까지 보여줌으로써 작품의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6) 푸에르토리코는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늦은 1873년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 각 분야에서 인종차별은 은밀하게 유지되었고, 지배계층에 의해 은폐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과 인종차별반대 운동의 영향으로 인종문제에 대해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푸에르토리코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최초의 본격 연구서는 1975년 출간된 이사벨로 제논 크루스(Isabelo Zenón Cruz)의 『나르시스는 자기의 엉덩이를 발견한다 Narciso descubre su trasero』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푸에르토리코의 역사와 문화에서 흑인과 아프리카의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살피면서, 푸에르토리코 사회 전반에 걸쳐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인종차별 현상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고발한다.

7) 이 소설은 오늘날 푸에르토리코에서의 인종차별은 스페인 식민통치의 잔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화자에 따르면 이러한 관습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고 초기에는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정치, 경제적 위상이 과거와 달리 많이 쇠퇴해져 사회적 통제력이 상실되어 사제들 스스로 포기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을 국시로 삼는 미국의 시민이 된 푸에르토리코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류층 사람들이 미국에 여행을 하면서 사실 미국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인종차별이 노골적으로 더 심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푸에르토리코에 돌아와 보다 더 스페인 통치시절의 풍습과 사고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나온다.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서 위선적인 미국의 모습을 폭로하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8) 이 부분은 1902년, 미국에서 파견된 통치자의 이름을 딴 이스턴 법(Ley Easton, 혹은 Ley de Idiomas Oficiales)을 통해 학교에서 영어로만 교육하도록 강요하고, 영어를 푸에르토리코 공식어로 결정한 것이 비인도적인 처사였음을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언어 문제가 여러 번 언급된다.(104, 162, 412-3쪽) 사실 푸에르토리코의 언어 문제는 국가의 정치적 정체성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민감한 문제다. 예를 들어 자치주 상태를 지지하는 민주대중당(Partido Popular Democrático)은 1991년 영어를 제외하고 스페인어만을 공용어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미국에 완전합병을 주장하는 신진보당(Partido de Nuevo Progreso)이 집권하자 다시 영어도 공용어로 선포했다. 작가는 현실적으로 푸에르토리코인 중 300만 명이 미국과 섬을 오가면서 살고 있고, 영어의 실용적 가치를 고려할 때 영어를 완전히 배제하는 언어 정책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412-3쪽) 이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는 영어로 이 작품을 쓴 이유에 대해 작가 스스로 한 대답과 일치한다. 그녀는 미국에서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작가들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비해, 스페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섬 작가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로 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Lydia Margarita González-Quevedo(1996), A Postcolonial Approach to a Colonial Literature?: The Case of Puerto Rico, 261.
결국 그녀에게 영어로 쓴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언어를 통해 주인에게 저항하고 자신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데니스 엑포의 용어를 빌자면 ‘이중적 게임’을 하는 것이다. “철저히 주인의 게임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 그는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여 그 게임의 주인을 몰락시키기 위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숨은 동기에 의해 인도된다.” Denis Ekpo(1995), “Towards a Post-Africanism: Contemporary African Thought and Postmodernism”, Textual Practice 9.1, 133.

9) 프란츠 파농은 흑인 여성은 열등감으로 인해 흑인 남성을 기피하고 백인 남성과 결합함으로써 백인의 세계에 진입하여 자신의 흑인성을 부정하려 하는데, 결국 이러한 백인이 되려는 흑인의 소망은 좌절되고 흑인 고유의 정체성으로부터도 소외된다고 한다. (Frantz Fanon,(1967), Black Skin, White Masks, 17, 60, 100) 카르멜리나의 경우 이러한 열등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비록 백인 킨틴과 육체적 관계를 가졌지만 그것을 이용하거나 유지할 의사가 없었고, 평소에도 자신의 인종적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인물이다.

10) 마술적 리얼리즘의 탈식민성에 관련하여 상가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역사적 형성에 근거한 인식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마술적 리얼리즘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주의 역사와 그로 인한 문화적 ‘동시성(simultaneity)’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동시성‘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인종집단의 물리적 공존에서 나타난 역사적 침전물이며, 이들 사이의 갈등, 모순, 문화적 왜곡뿐만 아니라 혼교, 동화, 융합의 기나긴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술적 리얼리즘에 나타나는 ‘의미’ 혹은 ‘사실’의 지연 및 불가해성이란 ‘사실’이 (신)식민주의, 봉건적 잔재, 그리고 반동적 민족주의와 같은 여러 가지 억압기제들에 의해 굴절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Kumkum Sangari, “The Politics of the Possible”, 158.) 이런 맥락에서 유럽과 미국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의미와 사실의 미끄러짐’과는 전혀 달리, 제3세계에서의 ‘의미’와 ‘재현’의 불가능성 문제는 ‘사실’의 존재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차원의 사실성을 추구하며 보다 변증법적인 장에서 의미를 제시하고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118-119) 이러한 상가리의 주장은 이 작품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나타나는 ‘마술적’ 효과들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가끔 사용하는 과장기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카르펜티에르가 주장하듯 기이한 현실 그 자체를 묘사하는 데서 얻어진다.

11) 벨 훅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여가장’을 둘러싼 흑인여성 이미지가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고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백인 남성, 백인여성, 흑인남성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Bell Hooks(1981), Ain't I Woman?, Boston: South End Press, 71-86, 태혜숙, op .cit., 52-53에서 재인용.
이 작품에서 페트라를 여가장으로 설정함으로써 흑인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속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작품 전체에서 페트라가 차지하는 역할과 상징적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그런 비판은 단견이라고 판단된다.

12) 베니타 패리가 스피박의 『제인 에어 Jane Eyre』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석을 비판하면서, 흑인 여성들의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크리스토핀을 평가하는 표현이다. 패리는 스피박이 이런 저항적 인물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은 하층민은 말할 수 없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Benita Parry(1987), “Problems in Current Theories of Colonial Discourse”, Oxford Literary Review 9. 1-2, 39.

13) 『개 같은 사랑』에 하녀로 등장하는 티티나 역시 사십여 년을 데 라 바예 가문에서 일하고 주인 우발디노로부터 자신이 살던 함석집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하지만 우발디노 부부가 죽은 뒤 그 자식들이 농장을 통째로 미국 농장주에게 팔려고 하자 직접 항의하지 못하고, 그 가족의 변호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읍소한다. 이러한 티티ㅏ와 비교할 때 페트라는 한층 더 당당하고 저항적인 인물이고, 과거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회복한 흑인여성이다.

14) 윌리 뿐 아니라 화자와 부에나벤투라도 페트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흑인 문화와 종교를 친숙하게 여기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백인 지배문화에 의해 외면당하고 폄하되어 온 흑인 문화와 종교가 푸에르토리코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서 차지해 온 비중과 의미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려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요즘 카리브의 문화담론과 관려해서 흔히 거론되는 ‘혼종성’과 ‘다양성’을 카리브 해의 정체성이자 미래지향적 가치로 여기는 다문화주의에 가까운 태도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아직도 미국의 반(半)식민상태에서 온전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푸에르토리코 민중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독립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161쪽), 다문화주의가 다국적 기업을 앞세운 신식민주의에 은연중 기여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경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5)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누엘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고 동료들과 함께 복면을 하고 자기 집을 약탈한다. 그 때 집이 화염에 휩싸이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쓰러진 동생 윌리를 안아 배에 까지 데려다 준다.

16)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화자와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간극은 아주 작다고 할 수 있다. 작가와 화자는 공히 백인 소설가이고, 페미니스트이며, 독립을 지지하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제할 때, 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작가의 정치적 입장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자기 아들 마누엘의 행동에도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에 합병되기를 바라는 킨틴과 그의 선조들의 언행을 조롱하는 어투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1982년 국민투표를 앞두고 각 정파가 펼치는 선전에 대한 묘사에서도 당시 미국에 합병을 주장하는 신진보당의 주지사를 희화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킨틴은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독립주의자의 선전물이라고 폄하한다.

17) 1917년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시민권을 얻게 된 일(2장), 1926년 섬의 주요 생산물이었던 설탕 값의 국제가격 폭락과 그에 따른 민중 경제의 궁핍과 대지주들의 쇠락(69쪽), 1936년 스페인 내전(82쪽), 1937년 민족주의자 알비수 캄포스(Albizu Campos)의 무장투쟁과 경찰의 잔인한 진압(12, 13장), 1940-50년대의 중산층 가정의 소비생활의 양상과 정치적 성향의 관계(18장), 1960년대의 경제 사정(320쪽), 1982년 푸에르토리코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보이는 국론 분열상과 투표 결과 (42, 43, 44장) 등은 구체적인 숫자와 지명, 실제 역사적 인물 등과 함께 제시되어 마치 역사서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다.

18)곤살레스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1930-40년대 푸에르토리코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알비수 캄포스를 들고 있다. 그는 과거 스페인 식민시대를 “모두가 행복했던 과거 la vieja felicidad colectiva”라고 불렀다고 한다. (José Luis González(1982), El país de cuatro pisos, 13.)
하지만 역사학자 마누엘 말도나도 데니스는 알비수 캄포스는 보수적 민족주의자라기보다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Manuel Maldonado Denis (1982), “En torno a El país de cuatro pisos”, Casa de las Américas, Año XXIII, 135, 158-159.)

19) José Luis González(1982), op. cit., 30.

20) 미국의 침공을 다루는 첫 번째 소설은 루이스 에르난데스 아키노(Luis Hernández Aquino, 1959), 『죽음은 구아시오에서 배회하였다 La muerte anduvo por el Guasio』이다. 이 작품 역시 전투에 참여한 세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화자는 독립주의자들에 대한 애정 어린 묘사를 통해서 은연중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미국 군대에 동조하는 세력에 대한 반감을 노출하고 있다. 결국 『도착 La llegada』은 이전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두 작품은 각각 50세대 민족주의 작가와 그 이후 세대 작가의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1) 작가가 킨틴을 대학원까지 역사학을 전공했던 백인 부르주아로 설정한 것은 바로 킨틴에게 백인지배계층의 시각과 언어로 쓴 역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개 같은 사랑』에서 데 라 바예 집안의 이야기를 미화하던 낭만주의 소설가 에르메네힐도와 같은 역할이다.

22) 잘못된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반영된 듯, 소설의 결말에서 화자의 손에 의해 지배층의 언술을 대변하는 킨틴이 죽게 되고, 그의 아들 마누엘에 의해 푸에르토리코 사회와 역사를 상징하는 호숫가의 집은 화염 속에 사라진다. 이처럼 과격하고 단호한 결말은 『개 같은 사랑』에서도 동일하다. 그 중편의 결말에서도 혼혈인 글로리아는 흑인 몸종 티티나와 함께 온갖 차별과 위선의 온상이었던 대지주의 농장을 불 지르고,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소설가 에르메네힐도는 그 화염 속에 갇힌다.

23) Stephen Slemon(1990), “Modernism's Last Post” 7. 그래서 슬레먼은 탈식민주의 문학이란 “리얼리즘을 향해 작동해 가는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이 리얼리즘은 지시성의 미끄러짐을 인식하는 리얼리즘이다”라고 말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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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스페인어문학 34호(2005). 원문의 경음 표기 대신 격음을 사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