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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프」와 『백년 동안의 고독』 : 두 개의... / 맥머레이 2003-10-22 / 5774   

「알레프」와 『백년 동안의 고독』 : 두 개의 현미경적인 우주

조지 맥머레이 / 송병선 옮김



     1940년대 이전에 대다수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들은 전통적인 리얼리즘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토착적인 대지를 묘사하면서, 자기들 세계의 여러 비참한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항하여 사회 저항적 성향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194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이런 지역주의 소설은 일련의 변화를 겪었고, 마침내는 오늘날의 역동적인 아방가르드 예술 형식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현대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문학적 ‘혁명’의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다. 그의 형이상학적 주제와 문체 혁명은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리얼리즘에 집착했던 선조들과는 달리, 발전하는 사회의 현실을 세계 보편적인 가치와 미학적 가치에 의거하여 탐구하는데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이유로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기록 문학의 차원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상상력을 복구시켰다고 종종 일컬어지는 것이다. 비록 그가 존경받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지만, 그는 특히 독창적인 단편들 ―1940년도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수록된 『픽션들』과 『알레프』―로 인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존경받는 작가로 추앙 받는다.

     아마도 보르헤스의 『픽션들』과 『알레프』의 영향을 받은 세대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가는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일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보르헤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 콜롬비아 작가는 1967년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출판하는데, 이 작품은 문학적· 상업적으로 중남미 전체를 강타한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현대의 대작으로 인정했으며, 독자들은 이런 의견을 확인시키듯이 새로이 찍어낸 책이 나올 때마다 모두 품절 시켰던 것이다. 가령 초판본은 나온 지 1주일만에 바닥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 덕택으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축구 선수나 우상화된 유행가 가수처럼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 소설의 성공은 수많은 상을 받으면서 확인되었고, 서구 비평계는 이 소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책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몇 달 후에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는 진 기록을 달성했던 것이다.

     비록 『백년 동안의 고독』이 보르헤스 작품을 회상케 하는 문학적 메타포와 모티브가 넘쳐흐르지만, 이 글의 목적은 아르헨티나 작가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알레프」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비교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강박 관념 중의 하나는 인간이 혼돈의 현실을 보다 다루기 쉬운 규모로 축소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런 강박 관념은 보르헤스의 「알레프」에 반영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언어라는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매체를 통해 세상의 모든 관점을 동시적으로 종합하는 미학적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보르헤스이자 작가로 지칭되는 1인칭 화자가 그가 사랑했던 베아트리스 비테베르보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비극적인 날 이후, 매년 보르헤스는 그녀의 사촌인 카를로스 아르헨티노 다네리를 방문하여 그녀의 생일을 기념한다. 보르헤스가 마음속으로 혐오하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를 방문한 어느 날, 그는 보르헤스에게 자기가 「대지」라는 장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 시가 끝나면 아마도 지구의 모든 구석을 묘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몇 주 후에 카를로스는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어 격앙된 목소리로 집주인들이 술집을 확장하기 위해 자기 집을 헐어 버리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이 커다란 재앙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집 지하실에는 자기가 쓰던 장시를 완성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알레프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당황해 있는 보르헤스에게 알레프란 모든 점을 포함한 공간 속의 점이며, 세상의 모든 장소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장소이고, 따라서 동시에 모든 각도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 준다 (또한 알레프는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이며, 신비주의자인 카발리스트들에게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신적인 것이다). 그러자 호기심에 찬 보르헤스는 당장 카를로스의 집으로 달려간다.

     보르헤스가 도착하자 카를로스는 지하실로 기어 내려가 아홉 번째 계단에서 누운 채로 위를 쳐다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지하실 문을 닫는다. 보르헤스는 카를로스가 완전히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실제로 알레프를 보게 된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말한 대로 직경이 2센티미터나 3센티미터 정도 되는 조그마한 구체는 “상상 불가능한 우주”를 담고 있었다. 보르헤스는 빛나는 이 구체를 어느 정도 자세히 묘사하지만, 그는 알레프 속에서 두 개의 비밀을 보고 상심한다. 이 두 개의 비밀은 다름 아닌 베아트리스가 카를로스에게 보낸 몇 통의 음탕한 편지와 베아트리스의 시체의 “썩은 먼지와 뼈”(28면)였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집과 알레프는 파괴된다. 보르헤스는 알레프를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베아트리스의 사랑스런 얼굴에 대한 그의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레프는 허구적 보르헤스(작품 속의 등장 인물로서의 보르헤스)나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언어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마술적인 비전이다. 카를로스의 시는 현학으로 점철된 터무니없는 작품이다. 또한 조그만 구체를 묘사하려는 허구적 보르헤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며, 그는 그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내 이야기의 핵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작가로서의 내 절망이 시작된다. 모든 언어는 상징들의 알파벳이며, 그 알파벳의 사용은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편들이 공유하는 과거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겁에 질린 내 기억이 겨우 간직하고 있는 무한한 알레프를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내 눈은 모두 동시에 그런 행위들을 보았다. 나는 차례로 그것을 옮겨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것은 차례차례 적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26면)


    차례차례 순서대로 적는 알레프에 대한 묘사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시처럼 완전히 쓸데없는 것이다. 그것은 굉장한 대상에 훨씬 못 미치는 가시적인 현실을 닥치는 대로 조각조각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와는 달리, 허구적 보르헤스는 예술의 매체로서 언어의 한계를 깨닫고 알레프에 대한 설명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 복잡한 이야기는 아마도 알레프와 베아트리스를 비교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레프처럼 죽기 전의 베아트리스는 예리한 일련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알레프는 보르헤스가 그 안에서 죽은 베아트리스의 뼈를 보고 난 후 얼마 안되어 파괴된다. 또한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의 얼굴 생김새는 알레프처럼 보르헤스의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진다.

     비록 화자(허구적 보르헤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베아트리스를 잊지만, 그가 그녀를 묘사한 초상화는 실제 보르헤스(작품 바깥에 있는 작가)와 독자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제공한다. 알레프(세계)의 동시적인 이미지를 연속적인 언어로 결코 포착할 수 없었던 허구적 보르헤스가 행했던 방법대로, 실제의 보르헤스도 알레프의 메타포로써 베아트리스의 개성을 포함한 다양한 면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가 작품을 끝마쳤을 때, 각 부분들 모두가 전체적인 동시적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서 직관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전달하는 베아트리스의 총체적인 인상은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지하실에서 알레프가 전달한 완전한 세계에 대한 메타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메타포적인 알레프(베아트리스의 이야기)는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자기 지하실에서 알레프를 보면서 영감을 받은 끝없는 현학적인 시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알레프(이야기)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논리의 장애를 뛰어넘는 동시적이고 영원한 시각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알레프의 이야기는 문학의 메타포로 등장한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문학의 목적은 객관적 현실을 뒤엎고 자체의 상상적이고 말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레프」는 『신곡』에 대한 패러디로 읽힐 수도 있다. 카를로스의 두 번째 성(姓)인 다네리는 단테 알레기에리(Dante Aleghieri)라는 이름의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를 결합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과장되고 형편없는 아르헨티노를 이탈리아의 문학 거장과 아이러니컬하게 연결짓고 있다. 카를로스가 자기의 식당 지하에 있는 알레프를 보도록 보르헤스를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지옥을 통해 단테를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베아트리스 비테베르보는 단테의 이상적인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그녀의 이름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국에서 경멸적으로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베아트리스가 보르헤스를 경멸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묘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미학을 대표하는 알레프의 메타포 역할을 하는 그녀는 신비적인 절대자를 향해 영혼의 여행을 떠나는 단테의 알레고리를 회상케 한다. 이런 상호텍스트적인 비교는 보르헤스의 단편 작품의 구조를 풍요롭게 하며, 이런 관점에서 읽을 때 알레프가 완벽한 세계를 축소판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거대한 예술 작품의 축소판이 된다.

     비록 수많은 문학 작품이 총체적인 허구적 우주를 창조하려고 노력했다고 혹자는 주장할지 모르지만,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만큼 이런 면에서 성공한 작품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에덴부터 요한 묵시록까지의 복잡한 역사를 서술하며, 또한 소우주의 형식으로 세계의 역사를 그린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카펫을 타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기적들이 주관적인 영역과 객관적인 영역의 경계선을 지워 버린다. 총체성이라는 전반적인 인상은 지금까지 언급된 이 작품의 순진해 보이는 문체와 문학 기법 및 구조적인 장치뿐만 아니라, 참담한 비극과 재미있고 엉뚱한 유머로 더욱 강화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독창적인 시간의 사용도 그의 소설이 전달하는 총체성의 인상을 주는데 한 몫을 한다. 마콘도의 설립과 발전과 경제적인 부흥 및 쇠퇴와 파괴에 대한 직선적인 역사는 주기적인 순환과 원형적인 패턴에 대한 신화적이자 시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것은 선적인 시간 진행을 수정하고, 보다 통합된 내적 구조를 확립하며, 보다 위대하고 풍부한 주제와 문체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신화의 비이성적 요소들은 일상 생활의 현실이 차지하는 좁은 차원을 확장시키고 이야기가 보편적 의미를 갖도록 이끌고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의 1장과 2장은 부엔디아 가계(家系)의 시작을 서술한다. 다시 말하면, 근친 상간을 저지른 선조들의 죄(이것은 아마도 원죄를 나타내는 것 같다)와 그것이 돼지 꼬리가 달린 아기를 탄생시킨다는 것, 에덴과 같은 마콘도의 설립, 늙은 집시인 멜키아데스의 도움으로 과학의 경이에 눈을 뜨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현대 문명의 기초를 외치며 마콘도에 도착하는 장사치들과 곡예사들에 관해 언급한다.

     1장과 2장의 전환점인 3장에서 서술되는 불면증이란 전염병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 소설에서 가장 황당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레베카가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사람들은 이상한 병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병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기억 상실증까지도 초래하는 것이었다. 사물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모든 물건에다 이름을 써서 붙여 놓는 방법을 생각하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전에 알았던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회전식 사전의 형태로 순진한 기억의 기계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그가 그 기계에 입력할 14,000개의 기재 사항을 완성했을 때, 늙은 집시인 멜키아데스가 그 병을 치료할 기적적인 물약을 갖고 마콘도로 돌아온다.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기억의 파괴와 쓰여진 말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선사 시대의 원시 부족이 역사적 과거를 자각하는 사회로 변모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의미한다. 선사 시대 사회의 특징은 모든 것이 반복되고, 모든 사건이 신화 속에 가려져 있거나, 아니면 신화 의식을 통해 정기적으로 재현되는 순환적 시간이다. 반면에 그런 사회가 뒤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직선적인 시간에 진입하면, 그 과거는 역사가 되고, 이것은 기억이란 것을 허용치 않으므로 글로써 보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2부를 구성하는 4장부터 15장은 콜롬비아의 역사적 현실을 아주 분명히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즉,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일어난 시민 전쟁과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직후에 발생한 바나나 붐을 다룬다. 여기에서는 과학적 발전,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인간적 이상의 타락의 결과로 마콘도에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 과정을 서술한다. 2부와 3부의 전환점이 되는 16장에서는 4년 11개월 2일간 내리는 비가 거의 모든 마콘도를 파괴하며, 모든 바나나 농장들을 쑥밭으로 만들고, 마콘도에 살았던 원래의 주민들 중에 몇 명만의 생존자를 뺀 나머지 사람들을 마콘도에서 내쫓는다. 성경의 대홍수를 회상케하는 이 비바람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을 내쫓으며, 타락한 물질 숭상주의를 근절하고, 순수성을 회복하며, 사랑과 상호 이해를 복구하면서 일시적으로 영혼을 정화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3부에 있는 마지막 네 장들은 과거의 생명력에 다시 불을 붙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몰락해 가고 마침내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마콘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인 종말은 전쟁의 참화와 경제 침체와 부엔디아 가계의 특성인 비이성적 행동의 결과로 보여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순환적인 시간은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역사를 보완하고, 소설의 시간적 차원을 확장시키며, 새로이 생명력 있게 펼쳐지는 확장된 현재의 꿈을 묘사한다. 이런 점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부엔디아 가족 내에서 이름과 특성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가령 호세 아르카디오들은 충동적이며 모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우렐리아노들은 명민하며 은둔적인 성질을 띤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인 우르술라는 그녀의 자손들이 각 세대에 재출현하는 이런 행동 패턴을 지켜보면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모양으로 도는 것이라고 말한다. 텍스트의 순환적 리듬은 수많은 사건들이 근친상간과 연결되어 일어나면서 더욱 심화된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극적인 순간을 유지하고, 원죄의 신화를 고이 간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예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필라르 테르네라는 부엔디아 가계의 역사 ―소설의 시간적 메커니즘―를 “끝없이 반복되는 톱니바퀴, 다시 말하면 축이 손을 댈 수 없이 점차로 마모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계속해서 돌아갔을 수레바퀴”(364면)라고 설명한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시간의 톱니바퀴는 순환적 주기를 상징하고, 축은 직선적인 역사를 상징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역사의 위압적인 무게는 신화적 부활의 리듬을 손상시키며, 점차로 허구적 세상을 엔트로피의 상태로 이끌어 간다.

     시간의 톱니바퀴는 일련의 순환적 단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구조에 의해 은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령 1장의 첫 문장은 그 예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총살 집행 부대 앞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그 아득한 오후를 회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는 얼음을 가르쳐 주려고 그를 데려 갔었다.”(11면) 여기에서 미래의 사건(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총살 집행 부대와 직면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얼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옮겨가며, 이것은 이 장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제시된다. 아래에서 자세히 보여지겠지만, 소설의 내용을 시사하는 이런 순환적 단위들은 소설 마지막에서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일 이미지로 집약된다.

     현실과 환상을 교묘히 융합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방법은 총체적 허구의 세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인상적인 기법이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모든 것이 현실적이다. 그의 숙모 중의 한 사람에 관해 말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일화는 이런 서사 기법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 숙모는 모든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대답이 진리라고 믿게 하는 능력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어느 날 어떤 여자아이가 이상하게 생긴 알을 갖고 그녀에게 다가와서는 왜 혹이 있느냐고 물었던 장면을 회상한다. 그러자 그 숙모는 주의 깊게 그것을 살펴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얘야, 이 알에 왜 혹이 있는지 알고 싶어? 그건 전설에 나오는 도마뱀 알이라 그런 거야. 그러니 마당에 불을 지펴서 태워 버려.” 그래서 그들은 불을 지펴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 알을 태워 버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일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내게 『백년 동안의 고독』의 핵심을 제공했습니다. 이 소설 안에는 가장 놀랍고, 가장 특이한 것들이 도마뱀 알을 정원에서 태워 버리라고 말한 이 숙모의 무표정한 얼굴과 똑 같은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하지만 나는 실상 그 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일상적인 것은 환상적으로, 또한 환상적인 것은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필체와 서사적 관점을 교묘하게 사용한다. 그리하여 허구적 세계의 실제적 요소들을 환상적 요소들과 융합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멋진 예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의 장남인 호세 아르카디오가 불가사의하게 죽는 장면이다. 어느 날 호세 아르카디오는 사냥을 한 후, 아내인 레베카와 함께 살고 있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안뜰에 사냥개를 매어 놓고, 부엌에 죽은 토끼들을 걸어 놓고서, 나중에 소금에 절이기로 마음먹고 나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간다. 얼마 후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것은 그가 죽었다는 신호였다. 그리고는 그 죽음이 미친 이상한 여파를 이렇게 묘사한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흘러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왔고, 울퉁불퉁한 테라스를 향해 곧장 가더니 다시 난간을 타고 내려와 층계로 올라가 터키인의 거리를 따라 갔고,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다른 길모퉁이에서는 왼쪽으로 돌았고, 부엔디아 가족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돌아 닫힌 문 아래로 통과하여 카펫을 적시지 않기 위해 벽 쪽으로 달라붙어 응접실을 가로지르고는 다른 거실로 향했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식탁을 피했으며, 베고니아 화분들이 놓인 복도로 나아가서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쳐 주던 아마란타의 의자 아래로 눈에 띄지 않게 지났고, 그런 상태로 곡간으로 들어가더니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36개의 계란을 깨려고 하던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느님 맙소사!” 우르술라가 소리쳤다. (129-130면)


     이 대목과 마찬가지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그의 피가 오른쪽 귀에서 흘러나왔으며, 아무런 무기도 없었으며, 그의 신체에서는 어떤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호세 아르카디오의 죽음은 완전히 환상적이지만, 아주 정교하고 정확한 문체와 현실적인 언어, 그리고 이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일상 생활의 세부적인 묘사로 인해 거의 믿을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와 반대적인 효과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두 아들을 서커스에 데려가서 얼음을 처음 본 장면에서 발견된다. 그는 우선 집시들에게 멜키아데스에 관해 물어 보며, 그의 오랜 친구가 열병으로 싱가포르에서 숨을 거두었고 자바 해의 가장 깊은 곳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상심한다. 이런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아이들은 멤피스의 현인의 신제품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 솔로몬 왕의 소유였다고 추측되는 근처의 텐트로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 세 장의 입장권을 산 후, 그들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구리 코걸이를 하고 발목에는 무거운 쇠사슬을 찬 거대한 몸집의 집시가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들어 있는 해적선의 보물 상자를 연다. 이 현상은 석양의 햇빛처럼 여러 색깔의 별로 부서진 무수한 바늘을 가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이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야”라고 외친다. 마치 성경에 손을 얹고 증거 하듯이 그 얼음덩이를 만지면서 그는 “이것은 우리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야”(26면)라고 단언한다.

     이 대목에서 일상적인 사물인 얼음은 상상적이고 감정적인 언어와 이국적인 풍부한 세부적인 설명을 통해 마술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에게 ‘미스터리’에 대한 강한 반응을 야기한다. 호세 아르카디오의 죽음과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얼음을 발견하는 장면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어떻게 환상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고, 또한 현실적인 것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통해 그는 객관적이고 상상적인 현실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총체적인 허구적 우주를 창출한다.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실용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우르술라는 자기 아들의 믿을 수 없는 죽음을 현실적인 리얼리즘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엉뚱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남편은 얼음을 경이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것을 통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현실이란 상대적이며, 그것의 신빙성은 현실이 우월하게 제시되느냐, 아니면 열등하게 제시되어 있느냐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마콘도의 족장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생애는 여러 면에서 서양 문명의 전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마콘도를 설립하기 전날 밤에 거울 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의 현란한 도시를 꿈꾼다. 이런 꿈은 물질적인 번영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보여준다. 멜키아데스가 가져온 과학의 미스터리와의 접촉은 지식과 부를 얻기 위해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술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노력은 현대의 회의주의를 암시하며, 그의 관심을 끄는 태엽 감는 춤추는 인형은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적 모델인 이성적이고 완벽히 정돈된 세계를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치게 되고, 후에 오랫동안 밤나무에 묶여 있게 되는데, 이런 그의 운명은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 죽기 직전에 그는 거울의 미로를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젊은 시절의 유토피아적인 꿈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시사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인간의 비이성적 세계관에 대한 메타포이다. 세상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려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싸움은 그를 신화적 존재로 부각시킨다. 이런 그의 신화성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 이슬비 내리듯이 떨어지는 노란 꽃송이와 죽기 직전에 마콘도의 설립자로서 그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귀환하는 프루덴시오 아길라르의 유령에 의해 획득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서사적 관점도 총체성의 인상을 주는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소이다. 소설 전체를 통해 독자는 행위와 분리된 비인칭 전지자적 화자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고 믿게끔 유도된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주요 작중인물인 멜키아데스가 화자이며, 그의 양피지와 소설은 동일한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런 순진한 장치를 통해 허구적 세계는 소설 바깥에 있는 실제 세계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가정된 전지자적 화자 혹은 실제 작가를 소설 내에 포함시키면서 소설 내에서 또 다른 허구적 세계를 창출한다. 이 이외에도 멜키아데스의 방은 시간성이 없는 신화적인 영역으로 등장하며, 이것은 집의 나머지 부분을 파괴하는 힘과 맞선 불굴의 창조력을 보여주는 성역의 중심이 된다.

     ꡔ백년 동안의 고독ꡕ에서 가장 멋진 부분인 마지막 세 페이지는 보르헤스가 사용한 문학적 모티브로 가득 차 있다. 부엔디아 가족의 최후의 생존자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개미떼에 의해 끌려가는 갓 태어난 자기 아들의 몸을 보는 순간,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힌 “이 가족의 첫 번째 사람은 나무에 묶여 있고, 마지막 사람은 개미에 먹히고 있다”(381면)라는 제사(題詞)를 갑자기 떠올린다. 자신의 운명이 양피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멜키아데스의 방을 나무 판자로 모두 막아 버린다. 그리고 그 방에 처박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멜키아데스의 모국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백년 전에 쓰여진 부엔디아 가족의 역사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보르헤스를 어느 정도 회상케 하는 그 늙은 집시는 “짝수 행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적인 암호로, 홀수 행은 스파르타의 군대식 암호로”(382면) 쓰고 있었다. 또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멜키아데스가 사건들을 인간들의 전통적인 시간 순서대로 차례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1세기 동안의 일상사를 압축시켜 그것들이 마술적인 순간에 공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 역시 「알레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계속 양피지를 번역하면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멜키아데스가 아르카디오에게 들려준 노래로 된 교황의 회람들(이것은 보르헤스가 좋아하는 단어이다)을 커다란 소리로 읽는다. 그리고는 뒤로 건너 뛰어 자기의 잉태 상황을 발견한다. 이 순간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보르헤스적인 혈통의 미로 속에서 자기의 이모인 아마란타 우르술라와 조우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문에 종지부를 찍도록 운명지어진 돼지 꼬리 달린 아이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양피지(혹은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마치 그가 말하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자기가 살고 있는 순간을 목격하는데, 이것은 보르헤스가 종종 사용하는 모티브이다. 바로 이 순간 그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마음속에 그렸던 ‘거울의 도시’ (혹은 신기루)가 바람에 휩쓸려 갈 것이며, 영원히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된다.

     멜키아데스는 수많은 언어의 근원인 인도· 유럽어 계통의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위한 이상적인 매체로 작용한다. 과거의 목소리로 가득 찬 허리케인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번역하는 말의 홍수로 이루어진 역사를 파괴하는 힘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양피지를 해석하는 순간에 응시하는 말하는 거울은 이상적 독자를 대표하는 박식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허구의 창조자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시상(詩想)에 해당하는 멜키아데스와의 완벽한 의사 소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작가보다 마술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술사에 대한 그의 사랑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탐지되는데, 이 허구적 세계는 마치 창조주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요술에 의해, 요술 속에서, 요술로부터 생성되고 파괴된다. 또한 이와 동일하게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는 심지어 자체의 독자(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를 발아시키는 모체라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가 사라지는 현상은 그가 소설을 마쳤을 때 상상의 왕국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제거되는 독자의 외부적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인다.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알레프」와 『백년 동안의 고독』은 총체적인 허구적 우주를 묘사하려고 애쓴다. 현실을 전달하는 언어의 힘에 항상 회의를 느꼈던 보르헤스는 15페이지 분량의 단편 속에서 마술적인 알레프를 묘사하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한다. 그 대신에 그는 베아트리스 비테베르보의 얼굴을 통해 알레프의 메타포를 창조한다. 이것은 독자들이 이 작품이 완료될 때 직관적으로 포착해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메타포로써 등장하지만, 알레프가 우주의 축소판인 것처럼 단테의 『신곡』에 대한 축소판 패러디로 읽힐 수도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훨씬 방대한 규모이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에 대한 많은 층위를 요약하는데 성공한다. 즉, 역사와 신화, 논리와 환상, 비극과 유머,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소설의 구조는 가족, 도시, 국가, 대륙과 사실상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나선형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형상화되고 있다. 소설의 주춧돌로 사용되는 신화는 이런 형식적 구상을 재확인시키며, 예술적 통일성을 고양하고, 일상의 경험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인정한다.

     보르헤스의 알레프는 욕심 많은 두 사업자가 자기들 술집을 확장하기 위해 옆집인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집을 소유하면서 파괴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세계는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몽타쥬하는 것으로 축소되며, 이것은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나서 이 세계는 역사의 거대한 힘에 의해 무너진다. 돼지 꼬리 달린 아이와 거울의 도시의 파괴는 인간이 꿈꾼 유토피아가 인간들이 자체 내에 지닌 악의 씨로 말미암아 성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거울의 도시(혹은 신기루)’는 알레프처럼 보르헤스의 허구적 상징, 즉 독자가 작품을 끝마쳤을 때 자취를 감추는 환각적인 세계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동그란 구체(球體) 모양의 환상적인 알레프와 마찬가지로, 부엔디아 가족의 연대기는 궁극적으로 망각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속에는 직관적으로 포착된 것이 남아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베아트리스의 총체적 이미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문명의 시적인 요약인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문학이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최고의 장난감임을 알게 된다. 나는 보르헤스가 아마도 이런 정의를 찬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보르헤스가 그의 작품들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백년 동안의 고독』은 지금과는 다르게 되었을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걸작처럼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