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구비평 > 문학비평
 
 
  코르타사르의 소설 『팔방놀이』와 메타픽션 / 박병규 2003-10-22 / 5351   

코르타사르의 소설 『팔방놀이』와 메타픽션

박 병 규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ázar, 1914 - 1984)의 소설 『팔방놀이』(Rayuela, 1963)는 20세기 중남미 문학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부적절한 비평관의 척도로 왜곡된 부분도 적지 않다. 이 작품은 소설이란 현실을 재현하며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거나 구성 방식은 해석학적 순환에 따른 완결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통념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이처럼 『팔방놀이』는 기존의 문학적 사고에 철저하게 도전하면서 새로운 소설 미학을 선언한 작품이었으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적절하지 못한 비평 개념으로 접근함으로써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놓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무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지금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이 모두가 해프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적 소설에 매료되었던 당시 독자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었으며, 중남미 문학사에 자리매김하기가 곤란한 소설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은 1920년대 아방가르드 문학에서부터 최근의 새로운 역사소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대 중남미 문학의 한 가지 특성, 즉 허구 창작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메타픽션으로서 소설은 이런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예단하지 않는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우리의 논의에서 메타픽션은 작품의 일반적인 성격 규명에 필요한 논의이므로 예비적으로 현대 소설에서 메타픽션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개괄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코르타사르의 언어관과 작품세계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팔방놀이』의 ‘독서 방법’을 중심으로 구성 방식과 몇 가지 핵심적인 테마를 기술하겠다.


1. 메타픽션과 근대소설

     메타픽션은 정의하는 사람의 문학관에 따라 다소 편차를 보이고 있으나 퍼트리샤 워에 따르면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문제삼기 위해 인공물이라는 작품의 위상에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관심을 갖는 허구적 글쓰기를 지칭하는 용어이다.”(Waugh, 2) 다시 말해서, 허구적 세계의 결을 흐트러뜨리는 직접적인 논평, 주석, 패러디를 비롯하여 갖가지 문학적 장치를 동원하여 작품이 형성하는 문학적 환영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독자에게 지금 상상하는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의식을 일깨우는 작품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추상적이므로 몇 가지 보완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는 작품에 개입하는 화자의 논평과 관련된 문제이다. 19세기 소설을 보면 화자가 직접 등장하여 이야기의 사실성을 강조하거나 등장인물의 도덕성을 판단하거나 이야기 전개에서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므로 독자 제현은 앞으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믿어달라”든지 “이제 우리의 주인공을 잠시 여기에 두고 이전에 이야기하다가 그만 둔 부모 집으로 돌아가 보자” 등등, 갖가지 유형의 논평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논평은 메타픽션에서 사용하는 논평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9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독자의 도덕적 판단을 확인하고 강화하거나 단절된 이야기의 맥락을 밝히는 장치로서, 결국 문학적 세계의 현실성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반면에 메타픽션의 목소리는 허구 세계의 존재론적 위상을 문제 삼으며, 허구 세계는 하나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가상이라는 유동적인 이중성을 고의적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모든 소설은 ―영화나 연극도 마찬가지지만― 근본적으로 이러한 이중성을 전제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일반 소설은 독자가 일상 현실을 잊고 허구 세계에 완벽하게 몰입하도록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고, 메타픽션은 허구 세계의 현실성과 가상성을 부단히 의식하도록 만든다.

     다음은 메타픽션과 근대소설의 관계이다. 로버트 앨터는 고전적인 메타픽션 연구서에서 르네상스기의 스페인 소설, 예컨대 『돈키호테』부터 현대의 프랑스, 미국, 중남미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주요 작품을 살펴보면 픽션은 결코 실제 사물이 아니라는 작가의 인식이 두드러지며, 사실주의 문학은 감질나는 모순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메타픽션은 근대소설에 내재한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주장한다.(Alter, 21~22)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소설을 포괄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 앨터의 얘기에 따르면, 1830년대에 이르러 소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역사적 현실을 상상력으로 포착하면서 자의식적 면은 쇠퇴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소설은 발작의 작품에서 보듯이 덧없고 일시적인 도시생활의 혼란을 언어예술로 정복하려고 시도할 뿐, 소설 자체의 내재적인 모순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Alter, 89~95) 그러나 『돈키호테』로부터 시작되는 근대소설의 완숙체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소설에서 메타픽션이 쇠퇴했다는 사실은 곧 메타픽션이 근대소설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타픽션은 근대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했다. 『돈키호테』, 『트리스트람 샌디』 등에 나타나는 자의식은 기독교적 우주 질서에서 유리된 개별자가 당면했던 고뇌의 표현이다. 개체적이고 세속적이고 덧없는 대상을 임의로 선택하여 재현하는 작업이 과연 이 세계, 나아가서는 인간과 우주의 진리를 내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천착하고, 나아가서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반면에 20세기 초엽부터 등장한 메타픽션은 근대적 주체, 그리고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회의와 반문에서 연유한다. 즉 인간의 지각행위와 의식은 결코 중립적이 아니며, 따라서 근대 소설의 현실 재현이란 결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확신의 표명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형식적, 논리적, 패턴적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양자가 문제삼는 세계관과 지향점은 완전히 상이하다. 초기 메타픽션은 중세적 보편성에서 근대적 개별자로 나아가면서 근대성을 지향했다면, 20세기 메타픽션에서는 근대적 주체의 안정성과 확실성에 대한 의문,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는 회의적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메타픽션은 근대 소설의 본성이 아니라 반대로 근대 소설의 본성에 대한 물음표, 현실 재현이라는 명제에 대한 물음표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장르 규정이다. 위에서 논의했듯이 메타픽션은 근대 소설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므로, 근대 소설의 하위 장르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 문학(narrative fiction) 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경향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비교적 장시간 지속되면서 문학적 관례로 자리잡으면 장르를 구성하기도 한다는 유보 조건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 메타픽션은 소설의 기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메타픽션 이론서를 펼쳐보면 서술 관점의 조작, 패러디 등 기법 분석에 치중하기 때문에 메타픽션은 어느 이야기 작품이나 적용 가능한 형식적인 요소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 문학 작품으로 보더라도 20세기 몇몇 작품은 이러한 기법을 무반성적으로 차용하여 고도로 형식적인 글쓰기의 유희를 보여주면서 최첨단 유행을 걷는 작품이라고 과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타픽션은 단순한 서술 차원의 기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메타픽션은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지배적인 문학적 전통에 도전하기 위해 언제나 작품에서 다루는 대상을 문제삼는다. 이 대상은, 예를 들면, 인간의 실존적인 고뇌일 수도 있고, 진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재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언어의 문제일 수도 있고, 소설의 관례일 수도 있고, 인간의 심리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안정성과 확실성을 의문시함으로써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려는 시도에서 메타픽션 작가들은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여러 가지 서술 전략과 기법을 동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타픽션은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 문학이 처한 조건과 위상에 대한 반성이며, 근대 소설의 한 지류라기보다는 새로운 형식의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코르타사르의 『팔방놀이』가 현재에도 의미가 있다면 바로 독자적인 문제 의식을 통해서 이야기 문학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독자적인 문제 의식이란, 이제부터 논의할 테마인데, 환상문학이 내포하고 있는 서술의 간극과 여기서 비롯된 언어체로서 문학이라는 인식이다.


2. 언어와 담론

     언어의 문제를 천착하지 않은 현대 작가는 없다고 할 정도로 언어는 20세기 문학, 나아가서는 인문학과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코르타사르 또한 초현실주의적 언어관을 받아들인 이후 작품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천착했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독창적인 결론에 도달했다기보다는 20세기 일반적인 흐름과 경향을 잘 소화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결과론이야 어떻든 코르타사르 작품에서 언어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문체적인 색채를 무시한다면 작품의 반을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의 문제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코르타사르 비평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유희는 대부분 단어 차원에 국한된다. 코르타사르 자신도 한때는 언어의 문제를 단어 차원의 문제로 생각했으며, 작가의 일차적인 임무는 단어에 묻어 있는 문화의 때를 벗기고 마술적이고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여 인간 전체를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론적 정향점이야 어떻든 실제 작품에서 코르타사르가 구사하는 언어 유희의 방법은 기표와 기의의 분리하여 기의를 삭제하거나 기표에 새로운 음운을 첨가함으로써 정상적인 의미작용을 왜곡하는 것이다. 『팔방놀이』에서 예를 찾는다면, 양군 유네스코 대표단의 이름을 나열하여 시적인 율격을 만들어내고 있는 ‘히탄하포라’(jitánjafora, 41: 280), 철자법을 무시하고 소리나는 대로 적는 ‘이스파메리카 언어’(49: 345), 모음으로 시작되는 단어 앞에 묵음 ‘h’를 첨가하여 어휘에 풍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아치스모’(hachismo, 19: 98) 등이다. 아마도 68장의 글리글리코(glíglico)는 이러한 언어 유희의 정점일 것이다. 글리글리코란 음성학적 유사성에 기초한 신조어를 열거함으로써 결코 확실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에로틱한 암시만을 남겨놓는다. 코르타사르는 이러한 언어 유희를 통해서 이야기의 심각성을 완화시키고, 무거운 주제에서 비롯된 억압적인 긴장을 털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코르타사르 작품에서 단어 차원의 언어 유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담론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학적 담론의 재현성과 논리성이다. 코르타사르가 문학적 담론에 관심을 기울인 동기는 환상문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비밀무기』(Las armas secretas, 1959)라는 단편집에 실린 작품 「악마의 침」(Las babas del diablo)과 「추적자」(El perseguidor)는 좋은 예이다. 「추적자」에서 주동인물 쟈니 카터는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얘기한다. 일상적인 문자 언어(verbal language)로는 자신의 경험을 전달할 수가 없다. 그 경험은 언어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예로 코르타사르가 언어 바깥의 그 무엇을 믿었다고 말한다면 성급한 결론이다. 그리고 코르타사르라는 자연인이 신비적인 현실관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는 문학적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얘기하는 바가 없다. 언어 바깥의 그 무엇이든, 아니면 환상문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초자연적 현상이든 작가로서 당면하는 문제는 언어적 형상화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즉 일상적인 의미와 논리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여 비일상적인 의미와 초논리적인 현상을 기술할 때 발생하는 간극이다. 「악마의 침」의 첫 부분을 보면 화자는 구문론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장을 열거하는데, 이를테면 “나는 달이 뜨는 것을 그들이 보았다든가, 우리는 그의 눈 안이 아프다”는 식이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이 문장은 모순어법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악마의 침」이라는 작품 속에서는 수사법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문학적 담론의 재현적 성격과 논리적 성격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자가 얘기할 사건이 이와 같은 성격의 문학적 담론으로는 포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다.

     환상문학은 이처럼 문학적 담론의 질서에 위배되는 현상을 다루기 때문에 암암리에 소설 창작에 대한 자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환상문학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담론의 세계가 마치 현실 세계처럼 작동한다는 것은 세계와 현실이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어가며, 환상문학의 세계는 일상적 논리가 멈추어버린 상상적 질서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담론은 일상적인 논리를 관철하고 있다는 것은 사유의 논리가 언어 의존적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문학의 형식와 질서는 인생의 모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형태와 질서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상문학은 일반 소설과는 달리 재현, 현실 그리고 매체로서 언어와 문학적 담론의 성격에 관한 고도의 자각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코르타사르 메타픽션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3. ‘독서 방법’과 비유기적 구성

     1963년 『팔방놀이』가 출판되었을 때 중남미 독서계에서는 적지 않은 파문이 일었다. 이 소설 앞에서 독자들은 당황했고, 평론가들은 망설였다. 코르타사르는 아방가르드 문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충격 효과를 적절하게 이용한 셈이나 소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식, 평론가들의 관점을 바꾸는데는 실패했다. 당시 일반 독자들은 난해한 작품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평론가들은 위대한 형이상학적 소설이라고 추켜세웠다. 이후에도 이 소설을 수많은 비평과 연구서가 쏟아져 나왔으나 아직까지도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의 글만큼 작품 전반을 잘 아우르고 있는 압축적인 비평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팔방놀이』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별할 수 없다는 진단은 명쾌하고 정확하다. 왜냐하면 장편 소설에서는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전제 아래 몇몇 비평은 이 소설의 한 측면만을 고찰하면서 문체, 어조, 구성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있는데, 이럴 경우 비평의 논리는 매끄러울지 모르겠으나 국부적이고 편파적이고 종종은 오독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사실 코르타사르는 『팔방놀이』에서 다루는 모든 대상을 문제 삼을 뿐 그 어떠한 종국적인 결론도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고 과정적이다. 이곳에서 개진한 주장은 저곳에 가면 부정되며 조금 후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마감된다. 이처럼 소설을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핵심 인자 가운데 하나는 독특한 구성 방식이므로 여기서는 ‘독서 방법’(Tablero de dirección)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팔방놀이』는 모두 3부 15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쪽에서”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1부는 1장에서 36장까지로, 주동인물 오라시오 올리베이라(Horacio Oliveira)의 파리 생활을 다루고 있으며, “이쪽에서”라는 제목의 2부는 37장에서 56장까지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주동인물의 행적을 다룬다. 나머지 57장에서 155장까지가 “배제할 수 있는 장”이라는 제하의 3부인데, 여기에는 1, 2부에서 누락된 부수적인 사건 및 신문, 잡지, 서적의 인용문, 그리고 모렐리(Morelli)라는 이름의 소설가가 남겨놓은 메모 등이 순서 없이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주동인물 오라시오 올리베이라를 중심으로 이 작품의 줄거리를 구성한다면 3부는 핵심적인 사건의 지위를 점하지 못하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독서 방법’을 읽어보기로 한다.


이 책은 읽는 방법에 따라서 여러 권의 책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다음 두 권이 된다. 독자는 다음의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 번째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다가 56장에서 끝내면 된다. 이 장 말미에 조그마한 별표 세 개가 있는데, 이는 ‘끝’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독자는 56장 다음에 계속되는 장에 개의치 않아도 된다.
두 번째 책은 73장부터 읽기 시작해서 각 장 말미에 표시된 순서에 따라 독서를 하는 것이다. 혼동이나 망각을 예방하기 위해 아래에 순서를 적는다.

73-1-2-116-3-84-4-71-5-81-74-6-7-8
93-68-9-104-10-65-11-136-12-106-13
59-41-148-42-75-43-125-44-102-45-80
46-47-110-48-111-49-118-50-119-51-69
52-89-53-66-149-54-129-139-133-140-138
127-56-135-63-88-72-77-131-58-131-

해당 장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 쪽의 위쪽에 해당 장의 번호를 붙인다.



     약간은 과장되고 약간은 우쭐거리는 어조로 쓰여진 이 ‘독서 방법’은 독자에게 『팔방놀이』라는 소설 세계를 지배하는 고유한 법칙을 밝히고 있다. 사실 모더니즘 소설 이후 거의 모든 현대 소설은 한결 같이 작품에서 고유한 법칙을 밝히고 독자에게 이 법칙에 따라 작품을 읽도록 요구하므로 코르타사르의 ‘독서 방법’은 맥아담의 주장처럼 진부한 기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 첫머리에 도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정보 제공의 차원을 넘어 소설은 첫쪽부터 순서대로 진행된다는 기존 관념에 대한 의도적인 도전일 뿐만 아니라 소설 창작에 대한 자의식의 표현이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팔방놀이』라는 제목 아래 한 권으로 묶인 소설이 여러 권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은 이 작품을 구성하는 개별 장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으며, 허구 세계 전체에서 개별 장이 차지하는 위상도 필수적이 아니라 선택적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작품의 완성도란 작품의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를 형성하는 데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준의 삼는다. 그러나 『팔방놀이』는 이러한 유기적 구성 대신에 비유기적인 방식을 주장한다. 작품이란 자료 모음이며, 개별 장들 사이의 인과관계란 사건의 시간적 순서일 뿐이고, 전체성이란 무모순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취사 선택한 요소들을 작위적으로 통합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 실제 독서에서 독자가 이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조립하든지 간에 유기적 구성의 관점에서 보면 필요한 정보는 누락되고 불필요한 정보가 상당 부분 삽입된다. 이 글처럼 우리가 작품을 재구성할 때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정보를 배제함으로써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지만 『팔방놀이』의 구성 방식은 모순과 분열과 열림이므로, 배제된 부분은 입안에 박힌 가시처럼 저편에 남아서 담론의 정합성, 총체성, 완결성이란 사실 허구에 불과하다고 증언한다.

     『팔방놀이』에서 이러한 소설의 형식과 구성에 대한 논의는 흔히 이 작품의 주제라고 얘기하는 주동인물의 고뇌와 탐색과 분리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파리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회하는 주동인물 오라시오 올리베이라는 “칸트의 범주를 쫓다보면 우리는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14: 72)면서 사구 사유 전반에 걸쳐 의문을 제기하고,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한꺼번에 포용할 수 있는 “만화경적 비젼”(visión caleidoscópica)을 추구한다.

     여기서 이러한 비젼이 가능하냐는 물음은 흥미 있지만 지나치게 목적론적인 사고 방식이다. 코르타사르 소설에서 만화경적 비전은 어디까지나 서술 전략이다. 즉, 일관성과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사유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일 뿐, 논리를 넘어서서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나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스즈끼가 서구에 소개한 선불교라든가 티베트 밀교의 경전 「중음신 천도 밀법」같은 책을 언급하면서도(28: 187) 서구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여담이지만, 코르타사르는 인터뷰에서 동양적 사유는 서구 사유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면서 자기로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어설픈 지식으로 낯선 사고를 얼버무리거나 회칠하고 싶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동양을 도피처로 삼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팔방놀이』에서 코르타사르는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명목으로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서구 사유의 폭력성을 비판하면서도 비서구적인 사유를 대안으로 여기지 않고 서구의 사유의 틀 내에서 서구 사유를 문제 삼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광기를 통해서 새로운 이성, 광기의 반대가 아닌 그런 이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18: 94)는 올리베리아는 말은 곧 “ló(gi)ca”(141: 602)이다. 논리(lógica) 안에 광기(loca)가 포함되어 있고, 광기 속에 논리가 있다는 뜻으로,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논리를 해체한다. 따라서 올리베이라의 추구는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비판의 연속적 과정일 뿐 그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글쓰기 방식, 사유 방식은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면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처럼 보이고 자크 데리다가 말한 해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비록 이 소설의 출판 연대가 데리다의 유명한 저작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지만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50년대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면서 유네스코에서 번역사로 일했고, 매우 폭넓은 독서량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당시 프랑스 지성들의 사고에 익숙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으며, 이 작품에서 감지할 수 있는 자크 데리다적 중심의 해체와 미셸 푸코적인 담론의 권력에 대한 논의는 프랑스 현대 철학적 사유의 차용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확하게 입증할 수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코르타사르의 놀이 개념이 의미생성 과정에 대한 데리다의 기술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코르타사르는 초기부터 니체가 말한 건설적 파괴의 방법을 수용하여 언어를 통해 언어를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추구하는 『터널 이론』(Teoría del túnel)이라는 평론을 집필했다. 또한 『제왕』(Los reyes, 1949)이라는 작품에서는 미노타우루스 신화를 뒤집어 보임으로써 ―보르헤스의 「아스테리온의 집」과 마찬가지다― 신화적 담론의 권위와 정통성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하며, 환상문학을 통해서는 근대적 주체의 확실성과 부르주아적 세계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소설 『복권 당첨자들』(Los premios, 1960)에서는 진리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 ‘중심’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문제 삼고, 이성을 통해 이성을 비판하고, 중심의 부재를 통해 중심을 추구하는 방식은 단순한 모방과 영향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코르타사르 문학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시 ‘독서 방법’으로 돌아가 두 번째 단락을 살펴보면 『팔방놀이』는 적어도 두 개의 텍스트로 구성된다. 하나는 1장에서 56장까지만 포함하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73장에서 시작해서 55장을 제외한 전체 장을 포괄하는 텍스트이다. 일부 비평가는 이런 충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작품을 두 가지 텍스트로 읽고 줄거리의 상이점을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 텍스트와 두 번째 텍스트를 비교 분석하기 위해 작품을 두 번씩 읽을 필요는 없다. 두 번째 텍스트 내에 첫 번째 텍스트가 고스란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두 번째 텍스트는 첫 번째 텍스트에 대한 메타 비평이므로 양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텍스트의 이야기는 주동인물 오라시오 올리베이라가 파리에서 겪는 일과 마가(Maga)라는 여인을 찾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다음 친구 츄레블러(Traveler)와 친구 아내 탈리타(Talita) 사이에서 겪는 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번째 텍스트에서는 다양한 인용문과 더불어 모렐리(Morelli)라는 소설가의 소설 이론이 삽입되면서 첫 번째 텍스트에서 형성된 문학적 환영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종종 『팔방놀이』 비평을 보면 모렐리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모렐리 이론의 문학적 기능을 명확하게 밝혀둘 필요가 있다. 모렐리는 일차적으로 등장인물이며, 그가 남겨 놓은 메모는 어디까지나 『팔방놀이』라는 작품의 일부이다. 비록 모렐리의 이론이 소설 구성의 문제를 비롯해서 많은 경우 『팔방놀이』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며, 이 등장인물이 62장에서 말한 “비개인적인 드라마”에 기초하여 『62. 모형조립』(62. Modelos para armar, 1968)을 창작했다고 하더라도 『팔방놀이』는 모렐리의 이론에 따라 쓰여진 작품은 아니다. 모렐리는 근본적으로 실패한 작가이다. 왜냐하면 그의 반소설론은 대안이 아니라 상상 가능한 소설에 대한 기술, 실제 창작에서는 적용 불가능한 이상적인 소설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렐리의 이론은 『팔방놀이』를 실제로 지배하는 소설 이론을 논증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따른다. 모렐리의 주장은 소설은 무엇이며, 소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성찰이다.

     코르타사르는 화자의 목소리를 빌어 재현된 세계의 허구성을 직설적으로 공격하거나 폭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론과 창작을 통합함으로써,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렐리가 남겨 놓은 메모를 통해서 기존의 소설의 문학적 관례 그리고 독자의 태도를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탐색함으로써 우회적으로 『팔방놀이』라는 문학적 담론의 인위성과 허구성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팔방놀이』는 미학적 고려 없이 지나치게 기법적 실험에 몰두하거나 이론만을 나열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메타픽션과 구별된다.

     이밖에도 『팔방놀이』에서는 메타픽션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법들, 즉 사실주의 소설에 대한 패러디, 현현(epiphany)의 패러디, 등장인물의 이름 조작, 분신 등을 통해서 소설의 제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너무 명확한 사항이고, 자칫 도식적인 이론의 적용으로 장황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다음에서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놀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4. 세계 구성의 놀이와 놀이로서 문학

     『팔방놀이』는 제목이 말하듯이 놀이다. 문학적 놀이다. 호이징하나 카이유와나 오이겐 핑크의 놀이 이론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문학 작품과 놀이의 형식적 유사성은 직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놀이는 고유의 규칙에 따라 진행되며 일상적인 이해타산을 넘어선 활동인데 문학작품 또한 내적인 규칙 혹은 관례에 따라 작동하는 무목적적인 활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앞서 인용한 ‘독서 방법’은 『팔방놀이』의 놀이 규칙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놀이를 이해하려고 한다. 즉, 이 작품에서 놀이는 진지한 놀이, 세계의 중심을 찾는 놀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팔방놀이가 원래는 미로였고, 기독교적 세계관의 유입과 더불어 땅과 하늘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주동인물 오라시오 올리베이라의 행적은 하늘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즉 올리베이라가 정신병원 2층 창문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56장의 대단원 해석은 작품 전체의 의미를 좌우한다. 만약 올리베이라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면 탐구가 실패로 끝났다는 것으로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는 작품이 되며, 이와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면 탐구가 성공했다는 것으로 고독한 인간이 전체와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견해이다. 우선, 『팔방놀이』의 대단원은 56장이 아니다. 물론 첫 번째 텍스트는 1장에서 시작해서 56장으로 끝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끝”일 뿐 작품 초두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되는 전형적인 의미의 대단원은 아니며, 첫 번째 텍스트는 여러 가능한 텍스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두 번째 텍스트의 끝은 58장과 131장의 상호참조로 마감된다. 독자는 58장과 131장을 번갈아 가며 계속 읽든지 아니면 둘 중 어느 곳에서 책을 덮어야 한다. 이론적으로 『팔방놀이』는 아무 곳에서나 시작하여 아무 곳에서나 끝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소설 구성의 개념에 들어맞는 시작도 대단원도 없다. 이러한 열린 구성은 허구 세계와 현실 세계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설의 틀을 형성하는 시작과 대단원이 인위적인 장치일 뿐이라는 것으로, 문학적 관례의 패러디이다.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56장 바로 뒤에 오는 135장에서 올리베이라가 자살하려고 시도했으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정보가 제공된다. 이로써 올리베이라의 탐구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이고 목적론적인 판단 범주를 벗어난다. 사실 『팔방놀이』의 초점은 탐구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주동인물 올리베이라의 사고와 경험의 궤적에 맞춰져 있다.

     이처럼 완결되지 않은 작품, 과정으로서 작품, 만들어가는 작품, 형성되는 문학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은, 코르타사르가 ‘독서 방법’과 독자 이론을 통해서 누차 암시하고 있듯이, 독자이며, 독자의 역할은 놀이하는 것이다. 흔히 독자의 놀이를 두 번째 텍스트를 읽는 방법에서 찾는다. 이를 테면 73장에서 1장과 2장을 지나서 다시 116장으로 건너 뛰는 방식은 마치 팔방놀이에서 깨금발로 방에서 방으로 넘어가는 동작과 같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아날로지는 재미난 발상이지만, 『팔방놀이』에서 놀이는 어디까지나 비유(metaphor)이다. 그리고 장과 장을 건너 뛰는 구성은 독자가 유희하는 팔방놀이라는 궁색한 비유가 아니라 작품의 구성이란 예술적 자의성일 뿐이라는 작가의 선언이고 독자에게 작품을 읽고 있다는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정리하면, 『팔방놀이』에서 놀이의 주체는 독자이고 놀이의 대상은 문학작품이며, 놀이의 목적은 허구 세계 만들기다. 독자는 저자가 권위적으로 제시한 문학 작품이라는 완결된 세계를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중심,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에 제시된 자료를 조직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수동적인 담론의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담론의 창조자이다. 이런 까닭에 『팔방놀이』는 결정적이고 확실하고 완결된 형식이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각각의 독자가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며, 각각의 세계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는 절대적이며, 수많은 세계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는 상대적이다. 결국 다양하고 이질적이고 모순적이고 무한한 만화경적 비전이란 작품 심층부에 주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외부에 존재한다. 즉 독자가 만드는 허구 세계의 총합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코르타사르가 메타픽션을 통해서 문제삼는 것은 문화적 지배 담론이며, 기존의 담론 생산, 유통, 수용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서 세계 구성의 놀이를 제시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서 남는 한가지 질문이 있다면 코르타사르의 소설관이다. 코르타사르가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는 매우 무겁고 진지하다. 실존적 상황과 허망의 정열을 다룬 『복권 당첨자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했듯이 형이상학적인 탐색을 얘기하는 『팔방놀이』, 피구라(figura)라는 덧없는 이미지들의 모음인 『62. 모형조립』, 정치와 인간의 고뇌를 다룬 『마누엘의 책』(Libro de Manuel, 1973)이 그렇다. 그러나 코르타사르가 이 문제들을 서술하는 방식이나 문체를 보면 언제나 자기비판적이고, 모순적이고, 아이러니칼하고, 유머가 넘친다. 작가의 이러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은 『기인과 속물 이야기』(Historias de Cronopios y de Famas, 1962)이나 『팔방놀이』도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이 터널을 뚫다가 지표로 나와서 며칠을 고심한 다음에 다시 터널을 팠는데 이번에는 가정집 목욕탕으로 나와버렸다는 얘기를 한 다음에 “웃음 혼자서 지상의 모든 눈물보다 유용한 터널을 뚫었다”(71: 434)고 평가한다. 이 뿐만 아니라 『팔방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장, 즉 23장의 베르트 트레파 일화, 36장 파리 다리 밑에 거주하는 거지 이야기, 41장 판자 다리 이야기는 심각한 긴장으로 시작해서 언제나 웃음으로 끝난다. 이러한 웃음은 일상적 사고 패턴의 단절에서 연유하며, 코르타사르는 정상적인 것에서 엉뚱한 것으로 비약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의 용어를 빌려 “파타피시카”(Patafísica)라고 부르는데 『팔방놀이』에서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129장 우루과이 사람 세페리노 피리스(Ceferino Piriz)가 구상한 범세계적인 기구 조직표이다.

     이와 더불어 앞서 언급한 언어 유희를 고려하면 코르타사르가 다루는 주제는 무겁지만 주제를 다루는 기법, 문체, 기술 방식 때문에 논의의 무거움은 급속도로 경감된다. 언젠가 이탈로 칼비노는 “점점 화석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문학은 생명이 호흡할 수 있는 가벼움(levedad)을 지향해야 한다고 썼는데, 코르타사르의 문학관에 대한 적절한 기술로 해석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코르타사르에 따르면, 문학이란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것, 인간이 답답한 현실에서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의 환상문학과 소설을 고려하면, 코르타사르가 생각하는 문학이란 심각하고 무겁고 둔중한 평면적인 담론이 아니라 가볍고 경쾌하고 정확하고 투명하면서도 다양한 담론이다. 거의 모든 중남미 독자들이 문학이란 무언가 진지하게 고려할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담론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코르타사르는 문학이란 경쾌한 놀이일 수 있다고 『팔방놀이』라는 메타픽션을 통해서 주장하고 증명했다.

     결론적으로, 코르타사르의 『팔방놀이』는 중남미 문단에서 소설 미학의 방향 전환을 이룬 작품이다. 이를 기존의 소설에서 ‘새로운 소설’(nueva narrativa)로 전환이라고 불러도 되고, 중남미 최초의 포스트모던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명칭이나 용어보다 한결 중요한 것은 이 작품으로 인해 중남미 현대 소설의 지형도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세계이며, 소설은 무엇보다도 언어 구성물이고 소설은 무엇보다도 놀이라는 개념은 이후 바르가스 요사, 카를로스 푸엔테스, 카브레라 인판테,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속에서 한결 심화되고 구체화되면서 중남미 현대 문학의 주요한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