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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이론들 / 우석균 2003-10-22 / 7473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이론들: 통문화, 혼종문화, 이종혼형성

우 석 균



1. 서론



     본고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연구의 몇몇 중요한 텍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앙헬 라마(Angel Rama)의 『라틴아메리카의 서사적 통문화화』(1982), 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Néstor García Canclini)의 『혼종문화들: 모더니티에 들어가고 나오기 위한 전략들』(1989), 안토니오 코르네호 폴라르(Antonio Cornejo Polar)의 『허공에 글쓰기: 제(諸) 안데스 문학의 사회문화적 이종혼형성에 대한 에세이』(1994)이다.

     오늘날 ‘문화’는 인문학적 교양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여기에는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를 필두로 한 영국의 신좌파 그룹의 영향이 크다. 이 그룹은 1960년대 중반 설립한 〈버밍햄 현대문화연구소〉(Center for Birmingham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를 산실로 하여 정치경제학적 관점 일변도의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문화연구를 통해 현대 사회를 조망하려 하였다. 신좌파의 문화연구는 미국에도 전파되었고, 기존의 분과학문 중심의 학풍을 극복할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역사의 종말’로 가속화된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에 대한 대응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미국에서도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그람시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점이나 문화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연구 성과도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라틴아메리카 문화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연구에서 ‘문화’라는 범주의 중요성은 단순히 서구 이론의 영향이나 학술적 유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미 19세기말부터 독자적으로 ‘문화’에 대해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세 엔리케 로도(José Enrique Rodó),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알폰소 레예스(Alfonso Reyes), 호세 바스콘셀로스(José Vasconcelos), 페드로 엔리케스 우레냐(Pedro Henríquez Ureña), 페르난도 오르티스(Fernando Ortiz), 마리아노 피콘 살라스(Mariano Picón Salas), 빅토리아 오캄포(Victoria Ocampo),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José María Arguedas), 벤하민 수베르카소(Benjamín Subercaseaux) 등의 이름은 문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시사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문화가 특별히 중요한 범주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외세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화적 민족주의가 방어기제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문명 국가’임을 내세운 프랑스에 대항해 민족혼을 부르짖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독일 민족주의의 대응 전략이나, 20세기 미국의 패권주의를 못마땅해하는 유럽인들의 저변에 광범위하게 깔려있는 ‘문화 없는 아메리카’라는 관념과 유사한 것이다.

     최근의 라틴아메리카 문화연구 역시 문화적 민족주의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세계화와 함께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적 다원화와 문화 간의 대등한 교류가 성취될 것이라던 성급한 장미빛 전망과는 달리 세계화가 전지구적인 문화적 획일화를 강요하며 지역문화(cultura local)를 압박하고 있는 형국에서 이에 대한 유효한 대응 방안의 하나가 문화연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연구에는 세계화에 대한 찬사도 존재한다. 가령, 9. 11 테러 이후 새뮤얼 헌팅턴의 후광을 입고 국내에 소개된 『문화가 중요하다』에 수록된 마리아노 그론도나(Mariano Grondona)와 카를로스 알베르토 몬타네르(Carlos Alberto Montaner)의 글들이 그렇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정치적․경제적 발전에 장애가 되고있다는 문화결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세계화의 물결에 재빨리 동참하기 위해서는 라틴아메리카 문화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최근 문화연구 주류는 이러한 문화결정론에 대한 방어 전략에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최근에 문화연구가 활성화된 또 다른 이유로는 다른 분과 학문들이 라틴아메리카를 설명하는 유효한 해석지평으로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60, 70년대 라틴아메리카 학계를 풍미했던 학문은 마르크스주의와 종속이론에 입각한 정치경제학, 사회학, 문학 비평 등이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이나 사회학은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설 땅을 잃었다. 문학 비평 역시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세계적인 출판 붐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모색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지만 쿠바혁명의 이상이 군부독재라는 현실에 가로막히면서 기존 패러다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고 그 탈출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문화연구로 눈을 돌렸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영향을 특히 강조하는 베아트리스 사를로(Beatriz Sarlo)나 이 글에서 다룰 앙헬 라마나 안토니오 코르네호 폴라르가 다 그런 경우이다.


2. 앙헬 라마의 통문화(Transculturación)

     우루과이 태생의 앙헬 라마는 ‘통문화’라는 용어를 쿠바의 민속지 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페르난도 오르티스에게서 차용하였다. 오르티스는 이 용어를 1940년 출간된 『담배와 설탕의 쿠바적 대비』(Contrapunteo cubano del tabaco y el azúcar)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통문화란 문화접변(acculturation)에 대한 대항 이론이다. 문화접변은 1930년대 구미 인류학에서 상당히 퍼져 있던 개념으로 그 기저에는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한 민족 혹은 부족의 문화는 사라진다는 서구중심주의적 발상이 깔려 있었다. 이에 반해 통문화는 두 문화 혹은 여러 문화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아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다는 이론이다. 오르티스가 문화접변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쿠바에는 이미 원주민이 멸족해 더 이상 상실될 문화가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trans-'라는 접두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쿠바 국민의 선조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 너머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주로 인해 자기 뿌리에서 멀어지고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인종, 다른 부족과 더불어 다시금 뿌리를 내려야 했던 이들이 일구어낸 문화가 쿠바 문화인 것이다.

     앙헬 라마는 1970년대 중반부터 통문화 이론을 복원하는 작업을 했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서사적 통문화』에서 결실을 맺었다. 라마는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지역주의(regionalismo)와 보편주의의 긴장과 상호영향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오르티스와 라마가 통문화 이론을 주장한 의도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오르티스는 비록 문화 간 상호교류로 인한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논했지만 사실은 아프로꾸바니스모(afrocubanismo), 즉 쿠바 문화가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어했다. 이는 식민 시대의 백인/흑인의 이분법적 구도를 거꾸로 답습하는 것을 피하면서 흑인과 물라토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시도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1898년 쿠바가 독립한 이후 흑인과 물라토를 국민국가에 편입시키려는 담론이었던 것이다. 반면 라마는 지역주의 소설(novela regionalista) 일색이던 1920, 30년대의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보편성을 획득하여 1960년대에는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난 후 지역주의와 보편주의의 길항 작용을 천착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오르티스처럼 일국가적 담론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코르네호 폴라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라마는 쿠바혁명으로 촉발된 범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해석 지평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오르티스보다는 더 큰 범주를 염두에 두고 비평 작업을 진행시켰다고 볼 수 있다.

     라마의 『라틴아메리카의 서사적 통문화』의 주요 분석 대상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후안 룰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자신이 신지역주의 작가라고 분류한 이들로서 특히 안데스 문학과 아르게다스에 대한 분석을 심도 있게 하였다. 라마는 신지역주의 소설이 근대화의 충격을 흡수하여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근대화를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문학 텍스트와 문인들을 분석 대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라마에게 있어 문학 텍스트는 지역문화와 외래문화가 이데올로기적 퍼포먼스를 행하는 정치성을 띤 공간이며, 신지역주의 문인들은 두 문화를 중재, 조절하여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외래문화와 지역문화의 만남과 충돌을 논할 때 라마는 도시/농촌의 이분법적 구도를 답습하는 경향이 있어서 도시를 외래문화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공간으로, 농촌을 전통 문화의 모태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두 문화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런 대립 속에서 지역문화가 어떻게 근대화와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가, 즉 어떻게 통문화로 탈바꿈하는가를 집중 조명하고자 했다. 통문화를 통한 지역문화의 생존을 진단한 라마의 이론은 어찌 보면 쿠바혁명이 가져다준 유토피아가 군부독재라는 현실로 퇴색되어 가던 1970년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한 시도일 수도 있다. 군부정권이 서구의 이익을 대변하며 외래문화의 전면적 유입을 촉발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마의 통문화론은 하위주체 연구의 단초가 되었다. 외래문화의 헤게모니 장악 기도에 대해 지역문화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문화가 지배문화를 적절히 수용, 변형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견해가 너무 나이브한 것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말이다.


3. 네스트로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혼종 문화(Culturas híbridas)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혼종문화들: 모더니티에 들어가고 나오기 위한 전략들』은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혼종문화라고 정의한다. ‘혼종’(hibridez)이라는 용어는 사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잡종’을 뜻한다. 순수혈통주의나 본질주의(essentialism)의 관점에서 볼 때 혼종은 곧 ‘오염’이나 ‘타락’이다. 그러나 가르시아 칸클리니는 이런 경멸적 함의를 배제하고 혼종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는 거대서사의 폐해였던 획일성이나 토착문화와 민족주의에 대한 열광의 부작용인 국수주의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문화의 혼종은 필연적이라는 현실 인식의 산물이다. 앙헬 라마와는 전혀 다른 시대적 맥락에서 문화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라마가 아직 근대라는 역사적 시대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여러 가지 측면이나 대응 방안을 고찰했다면, 가르시아 칸클리니는 근대라는 역사적 시대가 저물어 가고 세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경계’에 서서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가르시아 칸클리니는 이 책에서 다양한 혼종문화의 예를 들고 있다. 특히 전통적으로는 다른 문화 범주라고 간주되던 것들의 혼종이나 전통적으로 문화로 여겨진 범주들과 문화가 아니라고 여겨지던 범주들의 혼종을 지적한다. 가령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서 예술가와 수공예업에 종사하는 장인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교양적인 것’(lo culto)과 ‘민중적인 것’(lo popular)의 혼종의 예로 들고있다. 또, 보르헤스나 옥따비오 파스처럼 아우라에 사로잡혀 있는 문인들이 TV에 출연할 경우 이 현상을 엘리트를 위한 예술의 범주에서 논해야 하는지 대중 문화의 범주에서 논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교양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lo masivo)의 혼종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앙헬 라마에 비교해 가르시아 칸클리니 이론의 장점을 꼽으라면 문화연구의 대상을 이처럼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라마는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국제화에 열광한 세대답게 문학을 라틴아메리카 문화연구의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학과의 접목을 시도했을 뿐 가르시아 칸클리니처럼 매스 미디어와 문화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뇌를 하지 않았었다.

     문화적 범주 간의 위계질서를 부정하고, 정체성을 지키려 애쓰는 ‘순수’ 문화보다 혼종문화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이다. 과연 근대의 물질적 토대조차 성숙되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포스트모더니티를 논할 수 있을까 하는 비판이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다. 가르시아 칸클리니가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 전혀 고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결과 가르시아 칸클리니가 주목한 것은, 라틴아메리카는 전근대 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적 단계가 겹쳐 있다는 점이다. 가령 쿠바의 어느 가정집 TV 위에 토착신앙과 관련된 물건들이 놓여 있고, 이 동일한 공간에서 현대의 대중 문화와 전근대적 컬트문화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동시에 혼재한다는 예를 들며, 이런 상황을 다시대적 이종혼형성(heterogeneidad multitemporal)이라고 정의했다. 이를테면 가르시아 칸클리니에게는 근대가 끝났는가 아닌가 혹은 포스트모더니티를 논할 만큼 성숙한 모더니티를 경험했는가 아닌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가 얼마든지 혼종적으로 공존할 수 있고, 심지어는 포스트모더니티 이후에 모더니티를 경험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나름대로는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역사성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대적 이종혼형성이라는 개념은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존재론적으로 혼종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외래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조장한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문화가 단순한 현상이나 경험적 양식 혹은 인문학적 소양이 아니라 정치성을 띤다는 것을 전제로 한 문화연구가들의 견지에서 볼 때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혼종문화론은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4. 안토니오 코르네호 폴라르의 이존혼형성(Heterogeneidad)

     페루의 문학 비평가이자 문화 비평가인 코르네호 폴라르의 『허공에 글쓰기: 제(諸) 안데스 문학의 사회문화적 이종혼형성에 대한 에세이』는 1994년에 출간되었지만 이종혼형성 이론의 기원은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코르네호 폴라르가 자신의 이론을 처음 정립한 시기는 앙헬 라마가 통문화론을 선보인 시기와 비슷하며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혼종문화론보다는 훨씬 앞선다. 그러나 이종혼형성 이론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을 이 책은 라마와 가르시아 칸클리니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코르네호 폴라르는 라마의 통문화론이 결국은 지역문화와 외래문화 간의 변증법적인 조화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1920, 30년대의 혼혈(mestizaje) 이론과 별다를 게 없다고 본다.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 간의 갈등을 축소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더구나 혼혈 이론이 혼혈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추구했듯이 라마의 이론 역시 통문화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내세움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사회문화적 규범(estatuto socio-cultural)의 혼재 현상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는 일견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이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코르네호 폴라르는 통문화론보다 혼종문화론에 더욱 적대적이다. 혼종문화를 생식 능력이 없는 노새에 비유할 정도이다. 피지배문화가 지배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결국은 창조력이 없는 문화로 전락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코르네호 폴라르가 통일된 정체성을 상정하는 거대서사적 접근이나 포스트모던적 접근에 동시에 비판적이면서도 근대기획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적인 극복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이종혼형성 이론은 그 산물이다. 코르네호 폴라르는 여러 사회문화적 규범이 융화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혼재하는 상태를 이종혼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회문화적 규범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로 정복을 들고 있다. 상이한 두 사회적 규범이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으로 만났으니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아프리카 계의 사회문화적 규범이나 가우초들의 사회문화적 규범들도 라틴아메리카의 이종혼형성 현상을 증폭시켰다고 본다. 또한 코르네호 폴라르는 근대 이후에는 도시화로 도시와 지방의 상이한 문화적 규범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복이나 도시화를 이종혼형성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는 점은 코르네호 폴라르의 문화연구에 있어 역사와 사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종혼형성 이론은 근대 기획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거대서사적 정체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근대 기획의 획일성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류의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종혼형성은 여러 사회문화적 규범 간의 차이나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는 윤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코르네호 폴라르는 아예 이종혼형적 주체, 즉 통일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여러 사회문화적 규범이 복합적이고 분산적이며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근대적 주체관을 부정하는 셈이다.

     코르네호 폴라르에게는 이처럼 미완의 모더니티를 완성하려는 시도와 모더니티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공존하지만 전자에 더 중점을 두고있는 듯한 흔적이 보인다. 이종혼형성 이론을 정립하면서 모순적 총체성(totalidad contradictoria)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총체성은 루카치와 골드만으로 이어진 문학사회학의 주요 개념이며, 모순적이라는 수식어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이종혼형적 특징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런데 총체성 개념은 그가 평생동안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문학사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끊임없이 교정하려는 노력 끝에 이종혼형성 이론이 정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코르네호 폴라르의 비평 역시 앙헬 라마의 통문화론처럼 쿠바혁명과 군부독재라는 시대적 맥락의 산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코르네호 폴라르의 작업은 하위주체 연구의 한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지배문화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에서도 지배문화에 말살되거나 동화되지 않는 하위문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조건이 이종혼형적 문화라는 특수한 문화를 낳았기 때문에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외래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도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연구에도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코르네호 폴라르가 이종혼형적 주체에 대해서 논하면서 이주 주체(sujeto migrante)에 특별히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며, 비록 갑작스런 죽음으로 『허공에 글쓰기: 제(諸) 안데스 문학의 사회문화적 이종혼형성에 대한 에세이』가 코르네호 폴라르의 마지막 저서가 되었지만 이 책의 출간을 전후해서 세계화 시대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를 모색하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5. 결론

     지금까지 앙헬 라마, 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 안토니오 코르네호 폴라르의 문화연구서를 언급하면서 통문화, 혼종문화, 이종혼형성 이론에 대해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세 사람이 각각 어떤 문제의식으로부터 이론화 작업을 시도했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위의 책들에 접근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세계화 시대의 문화현상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 가르시아 칸클리니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라마와 코르네호 폴라르의 문제의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세 사람의 출신 지역이 다른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라마가 쿠바인 페르난도 오르티스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키고 안데스 문학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는 그나마 라틴아메리카에서 문화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라플라타 지역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눈에 비친 라틴아메리카 문화는 지역문화와 외래문화 간의 융화의 산물일 수 있다. 또 가르시아 칸클리니는 미국과 국경을 접한 멕시코인으로서, 멕시코의 문화 정체성이 미국의 문화 정체성에 종속된다기보다는 미국의 문화 정체성과 멕시코의 문화 정체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 이 시대 문화 현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혼종문화론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 코르네호 폴라르의 이종혼형성 이론에도 그가 문화 간 갈등이 첨예한 페루 출신이라는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 세 권의 책은 라틴아메리카 문화연구의 첫 걸음이다. 이렇게 각 지역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을 짚어보는 이론화 작업이 선행된 다음에야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적용할 수 있을 이론 정립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라틴아메리카의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 이론 정립이 가능하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