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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물린 공원 / 코르타사르 2003-10-22 / 5606   

맞물린 공원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ázar)/ 박 병 규 옮김



     그는 며칠 전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급한 용무가 생겨 책을 덮었다. 그리고 열차 편으로 농장에 돌아온 다음에 다시 책을 펼쳤다. 인물과 줄거리에 점점 흥미를 느꼈다. 그날 오후, 대리인에게 편지를 썼고, 관리인과 소작료 문제를 상의했다. 그리고 다시 떡갈나무 공원이 보이는 조용한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불쑥 들어와 독서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왼손으로 안락의자를 덮고 있는 초록색 우단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미지가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내 소설적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한줄한줄 읽어감에 따라 주변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야릇한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은 높은 등받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며 담배는 손닿는 곳에 있고 창 너머 떡갈나무 아래로 늦은 오후의 바람이 춤추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장한장 책장을 넘기면서 주인공들의 빗나간 행실에 빠져들었고, 이미지는 한데 어울려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주인공들이 산 속 오두막집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먼저 여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이제 사내가 들어왔는데, 나뭇가지에 긁혀 얼굴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키스로 지혈을 했다. 그러나 사내는 애무를 뿌리쳤다. 예전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솔길과 낙엽 속에서 열정적인 밀회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미지근해진 칼, 그리고 칼끝 밑에서 자유를 잃은 심장이 박동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시냇물처럼 숨 가쁜 대화가 몇 장이나 이어졌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이미 결정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의 행동을 말리기라도 하듯이 온몸을 더듬는 애무까지도 실은 결딴을 낼 사람의 생김새였다. 알리바이, 우연, 실수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계산에 넣었다. 그 시간 이후, 매 순간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흘러갈 터였다. 잔인하게도 다시 한번 계획을 검토하려는데 손으로 뺨을 애무하는 바람에 중단됐다. 어스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앞일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오두막집 문 앞에서 헤어질 때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는 북쪽 오솔길로 가야만 했다. 반대편 오솔길로 가던 사내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머리칼을 날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도 나무나 울타리 뒤에 몸을 숨기며 달려갔다. 마침내 안개 같은 어스름 아래로 그 집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타났다. 개가 짖으면 안 된다. 짖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관리인은 집에 없을 것이다. 집에 없었다. 사내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은 널뛰고 있어도 여자의 말소리는 귓전에 쟁쟁했다. 처음에는 청색 거실, 다음에는 복도, 그리고 양탄자가 깔린 계단. 계단 위로 문이 두 개 있다. 첫 번째 방에는 아무도 없다. 두 번째 방에도 사람이 안 보인다. 그런데 저 문, 그리고 움켜쥔 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등받이가 높은 초록색 우단 안락의자, 의자에 앉아 소설을 읽고 있는 사람의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