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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은 틀락스칼라인들에게 있다 / 가로 2005-01-15 / 7828   

잘못은 틀락스칼라인들에게 있다

엘레나 가로 (Elena Garro) / 강혜원 옮김




나차는 부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밤이 되어 깜깜해진 바깥을 내다보았다. 라우라가 문밖에서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서 있었다. 라우라는 아직도 불에 그슬리고 흙과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었다.

“아가씨!” 나차는 한숨을 쉬었다.

라우라는 발끝으로 걸어 들어와서 주방 하녀 나차를 심문하듯 유심히 쳐다보았다. 마음을 놓은 라우라는 곤로 옆에 앉아 이 집에 처음 들어온 사람마냥 부엌을 둘러보았다.

“나차, 커피 한 잔만 줘……. 추워.”

“아가씨, 주인님이.... 주인님이 아가씨를 죽일 거예요. 우리는 아가씨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죽은 사람이라고?”

라우라는 깜짝 놀란 눈으로 부엌의 하얀 모자이크 타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자 위에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차는 커피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라우라를 흘낏 쳐다보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라우라는 머리를 무릎에 기대고 있었는데, 아주 슬퍼 보였다.

“나차, 이거 알아? 잘못은 틀락스칼라인들에게(역주. 틀락스칼라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의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할 때 스페인 원정군에게 협력한 인디오 왕국.) 있어.”

나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직 끓지 않는 물만 바라볼 뿐이었다.

밖에서는 정원의 장미꽃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무화과나무도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무화과가지 저편으로 환하게 붉을 밝힌 이웃집 창문이 보였다. 부엌은 슬픔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기다림이라는 시간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 하지 않니, 나차?”

“맞아요, 아가씨…….”

“나도 그 사람들처럼 배신자야…….”

라우라는 우울하게 말했다.

나차는 팔짱을 끼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차, 너도 배신자니?”

라우라는 동의를 구하는 눈길로 나차를 쳐다보았다. 나차가 배신자라고 인정한다면 라우라를 이해할 것이다. 라우라는 이 밤 누군가가 자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랬다.

나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하는 물을 다시 쳐다보고 커피에 물을 부었다. 뜨거운 커피 향 탓일까, 나차는 아가씨의 말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요, 저도 배신자예요, 라우라 아가씨.”

나차는 흐뭇한 마음으로 하얀 찻잔에 커피를 따르고 각설탕 두 개를 넣어 라우라 앞에 있는 식탁에 놓았다. 라우라는 생각에 잠긴 채 몇 모금 마셨다.

“나차, 과나후아토로 가는 길에서 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겠어. 우리 차는 밀쿰브레스에서 가솔린이 떨어졌어. 시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놀라셨지. 날이 저물고 있었거든. 어떤 트럭 운전사가 모렐리아까지 갈 수 있게끔 가솔린을 우리 차에 조금 넣어 주었어. 쿠이체오에서 하얀 다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멈췄어. 시어머니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어. 너도 알다시피, 시어머니는 인적 없는 길과 인디오의 눈을 무서워 하잖아. 관광객을 가득 태운 차가 지나갈 때, 시어머니는 정비공을 찾으러 마을로 갔고, 나는 바닥이 하얗게 갈라진 메마른 호수를 가로지르는 하얀 다리 한 가운데에 혼자 있었어. 새하얀 달빛이었지. 다리, 갈라진 호수 바닥, 자동차는 달빛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어. 이윽고 달빛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수천개의 점으로 변해서 맴돌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림 속의 달빛처럼 딱 고정되었지. 시간이 완전히 전도된 거야. 왜, 우편 옆서를 받으면 뒷면에 적힌 글을 보려고 뒤짚지 않아, 마치 그런 것 같았어. 이렇게해서 나는 쿠이체오 호수에 도착했는데, 나 자신 또한 예전과 전혀 다른 소녀가 되어 있었어. 빛이 그런 변괴를 만들어낸 거야. 태양이 하얗게 변하고 어떤 사람이 햇살 한 가운데 있었으니 말이지. 생각 또한 산산조각이 났고, 그 사람은 현기증에 시달렸어. 그 순간 나는 하얀 내 옷을 쳐다보았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발소리를 들었어. 나는 놀라지 않았어. 나는 고개를 들고 다가오는 그 사람을 보았지. 그 순간 내가 엄청난 배신을 했다는 기억이 났고, 겁이 나서 도망가고 싶었어. 하지만 시간이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어. 다시 유일한 시간, 사라지는 시간으로 변했고, 나는 자동차 의자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 “언젠가 네 행동이 저 돌처럼 단단하게 변해버리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어릴 적 어떤 신의 형상을 배울 때 그렇게 들었지. 어떤 신이었는지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모든 건 잊혀져. 그렇지, 나차? 하지만 잠시 동안만 잊혀지는 거야. 그때도 역시 말은 돝처럼, 흘러가는 투명한 돌처럼 보였어. 말이 끝날 때마다 그 돌이 굳어져서, 시간 속에 영원히 적히는 거야. 네 선조들의 말이 그렇지 않았니?”

나차는 잠시 생각해보고 그 말에 수긍했다.

“그랬어요, 라우라 아가씨.”

“무서운 일이지만, 나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모두 진실이었음을 그 순간에 알게 된 거야. 저기서 그 사람이 오고 있었어. 다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어. 피부는 태양에 이글거리고 어깨는 패배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지. 그 사람의 걸음은 마치 낙엽 같은 소리를 냈어.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어. 저멀리 반짝거리는 검은 물체가 보이는 거야. 새하얀 빛 한가운데서 그의 검은 머리가 물결치고 있었던 것이지. 미처 피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내 눈앞에 있었어. 내 앞에 우뚝 서서 차의 문고리를 잡고 나를 바라보았어. 왼 손엔 칼에 베인 상처가 있었고, 머리는 먼지로 뒤덮였고, 어깨쪽 상처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흘리내리고 있었어.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그가 패배해 도망치고 있다는 걸 알았지. 그 사람은 내가 죽었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싶었지. 그와 동시에 내가 죽으면 자기도 죽어야 한다고 말했어. 그 사람은 중상입고 나를 찾아 왔던 거야.

“잘못은 틀락스칼라인들에게 있어요.”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어.

그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다시 내 눈을 쳐다보았지.

“뭐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은 굵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어. 내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 그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 못할 일도 있는 거야. 나차, 너도 잘 알잖아.

“다른 사람들은요?” 그 사람에게 물었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하고 다니지.”

말할 때마다 그 사람의 혀가 고통스러워하는걸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어. 나의 배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당신도 알듯이 나는 겁쟁이예요. 그래서 배신했어요……”

“알고 있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어. 나차, 나는 그 사람과 어릴 적 부터 아는 사이였어. 그 사람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형제였고, 우리는 사촌이었지. 그 사람은 언제나 나를 사랑했어. 적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거든.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었어. 다리 위에서 나는 부끄러웠어. 피는 계속 그의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어. 나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무 말 없이 닦아주기 시작했어. 나차, 나도 언제나 그를 사랑했어.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와는 정반대니까. 그 사람은 겁이 없고 배신자도 아니니까. 그 사람은 내 손을 잡고서 나를 쳐다보았어.

“피부색이 많이 하애졌네. 그들의 손 같아.” 그가 내게 말했어.

“햇볕을 못 본지 오래됐어.” 그는 눈을 내리깔고 내 손을 놓았어.

그렇게 우리는 침묵 속에서 그의 가슴으로 흐르는 피 소리를 들으며 있었어.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어. 내가 비난 받을 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그 사람의 핏줄기는 나의 말과 몸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가슴에 쓰고 있었어. 나차, 거기서 나는 시간과 사랑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어.

“우리 집은요?” 나는 그에게 물었어.

“함께 가보자.” 그 사람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쥐었어. 마치 방패를 잡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방패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 “도망치는 와중에 잃어버렸어.”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데려갔어. 그 사람의 발소리는 다른 곳의 빛과 똑같이 쿠이체오의 빛 속에서 울렸어, 소리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는 호숫가에서 불타고 있는 도시로 걸어갔어. 나는 눈을 감았어. 나차, 이미 말했잖아, 나는 겁쟁이라고. 어쩌면 연기와 먼지 때문에 눈물이 나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나는 돌 위에 앉아서 얼굴을 가렸어.

“이제 못 걷겠어요.” 그 사람에게 말했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그가 내게 대답했어. 그 사람은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나의 하얀 옷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어.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마.” 내게 나직이 말했어.

그의 검은 머리칼이 내게 그림자를 드리웠어. 그 사람은 화내지 않았어. 단지 슬퍼하고 있었지. 전에는 감히 그에게 키스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남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걸 배웠으니까, 나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입술에 키스했어.

“너는 언제나 내 마음 속 가장 소중한 곳에 있었어.” 그가 내게 말했어. 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는 메마른 돌로 가득한 땅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돌멩이를 집어 들고 두 선을 나란히 그었어. 두 선이 만나 하나가 될 때까지.

“너와 나야.” 그는 고개를 숙인채 내게 말했어. 나차, 나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어.

“조금 있으면 시간이 끝나고 우리가 하나가 될 거야……. 그래서 너를 찾아다녔어.” 나자, 내가 망각했던 거야. 시간이 다하면, 이렇게 떨어져 있는 우리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시간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았어. 전에는 단지 그 사람이 나를 볼 때만 나도 겨우 쳐다보았는데 지금은, 네게 말한 것처럼 남자 눈을 두려움 없이 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그리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도 또한 사실이었고……. 나는 정말 겁쟁이지. 아침의 한가운데에서 찌르는 듯 성난 함성이 기억났고 또 들렸어. 또한 돌멩이 던지는 소리가 났고 돌멩이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어. 그 사람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머리를 팔로 감싸 보호해주었어.

“이것이 인간의 종말이에요.” 그렇게 나는 말했지.

“맞아.” 내 위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어. 나는 그 사람의 눈동자와 몸에서 내 자신을 보았어. 나를 그 사람 곁으로 데려간 것은 사슴일까? 하늘에 표시를 하도록 나를 던져올린 것은 별이었을까? 그의 목소리는 내 가슴에 핏빛 그림을 그렸고, 내 흰 옷에는 울긋불긋한 호랑이처럼 붉은 줄무늬이 생겼어.

“밤에 돌아올게, 기다려…….” 그 사람은 한숨을 쉬었어. 그 사람은 방패를 집어 들고는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았어.

“조금 있으면 우리가 하나가 될 거야.” 그 사람은 한결같은 태도로 말했어.

그 사람이 떠났을 때 전쟁의 함성이 다시 들려 왔고, 나는 비처럼 퍼붓는 돌멩이 속으로 달려 나갔어. 그리고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쿠이체오 다리 위에 서 있는 차에까지 도착했어.

“무슨 일이니 아가, 다쳤니?” 시어머니는 오자마자 날보고 놀라서 소리쳤어. 질겁한 시어머니는 내 흰 옷의 피를 만져보고는 내 입술에 묻은 피와 머리에 붙어있는 흙을 가리켰어. 다른 차에서 쿠이체오의 정비공이 죽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어.

“이런 야만적인 인디오들 같으니! 여자를 혼자두면 안돼요!” 정비공은 차에서 뛰어 내리면서 말했어. 나를 구하러 왔다고 했어.

밤이 되었을 때 우리는 멕시코 시에 도착했어. 얼마나 변했는지! 나차, 나는 믿을 수가 없었어. 낮 열두시까지 여전히 전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니. 폐허의 돌 부스러기조차 남아있지 않았어. 우리는 조용하고 슬픈 소칼로 광장을 지났어. 그 광장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어. 아무것도 없었어! 시어머니는 나를 힐끗 쳐다보셨어.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네가 문을 열어주었지. 기억나니?”

나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 쯤, 라우라가 시어머니와 함께 과나후아토로 여행간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들이 돌아온 날 밤, 침실 담당 하녀 호세피나와 나차는 피 묻은 옷을 입고 공허한 눈빛을 한 라우라를 보았는데, 마님은 그들에게 아무 말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님은 매우 걱정스러워보였다. 그 후 호세피나는 나차에게 식탁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주인 어른 파블로는 라우라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 옷을 안 갈아입는 거야? 안 좋은 일을 기억하고 싶어?” 마님은 자초지종을 아들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조용히 하고, 그 애를 위로해줘라”는 눈치를 주었다. 라우라는 아무 말도 안했다. 라우라는 입술을 쓰다듬고 아가씨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파블로는 다시 로페스 마테오스 대통령 얘기로 돌아갔다.

“대통령 이름이 입에서 떨어질 새가 없지.” 호세피나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그들은 속으로 저렇게 틈만나면 대통령과 공식방문 얘기만 늘어놓으니 라우라 아가씨도 신물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차, 사실은 말야, 그날 밤까지 나는 파블로와 있다는 게 그렇게 따분한 것인 줄 몰랐어!” 라우라는 무릎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호세피나와 나차도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나차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온 이후 가구, 도자기, 거울이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고, 돌아온 그 날보다 더 날 슬프게 만들었어. 앞으로 며칠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내 사촌이 나를 찾으러 올까? 그렇게 나는 혼자 지껄이며 나의 배신을 후회했어. 우리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나는 파블로가 말 하지 않고 메모로 의사를 전달하는걸 알았어. 그래서 나는 파블로의 두꺼운 입술과 죽은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어. 갑자기 그가 조용해졌어. 나차, 너도 알듯이, 그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해. 그는 팔은 축 늘어뜨린 채 잠자코 있었어. 이 새 남편은 기억력도 없고 그날그날의 일밖에는 몰라.”

“뭐가 뭔지도 모르는 정신나간 남편이 하나 생겼구만.” 파블로는 내 옷의 얼룩을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어. 불쌍한 시어머니는 당황했지. 그리고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트위스트 판을 걸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 시어머니는 웃으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지. 자칫하면 싸우는 꼴 보겠다 싶었던 것이지.

우린 입 다물고 있었어. 집은 소음으로 가득했지. 나는 파블로를 보았어. ‘꼭 누구를 닮았는데…….’ 하지만 그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았어. 나는 내 생각이 들통 날 것 같아 두려웠거든. 하지만 정말 닮았어, 나차. 둘 다 물과 시원한 집을 좋아해. 둘다 머리는 검고, 치아는 하얗고, 오후에 하늘을 쳐다보지. 하지만 파블로는 건성으로 말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묻지.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내 사촌 남편은 안 그래, 말도 그렇게 않해.”

“정말 그래요. 진짜 주인님은 귀찮게 굴어요!” 나차도 싫다고 말했다.

라우라는 한숨을 쉬고, 편안한 기분으로 나차를 바라보았다. 속엣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밤에 파블로가 내게 키스할 때마다 생각했지. ‘도대체 그이는 언제 나를 찾으러 올까?’ 그리곤 그 사람의 어깨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를 생각하면 울고 싶어. 내 머리를 감싸주던 그 사람의 팔도 잊을 수가 없어. 그렇지만 동시에 내 사촌이 아침에 내게 키스한걸 파블로가 알아챌까봐 겁이나. 하지만 파블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어. 내가 아침에 질겁했다고 호세피나가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파블로는 전혀 몰랐을 거야.”

나차도 동감이었다. 모든 일은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키는 호세피나의 탓이었다. 나차는 호세피나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입 다물어, 제발. 주인 어른들이 우리 비명을 못 들었으니 그걸루 됐다구!’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호세피나는 아침식사 쟁반을 들고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버렸다.

“아가씨, 어제 밤에 어떤 남자가 아가씨 방 창문을 엿보고 있었어요! 나차와 저는 막 소리를 질렀어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파블로가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야…….” 라우라가 바보같이 소리쳤다.

“그자가 누구야?” 파블로는 죽일 듯이 노려보며 라우라를 다그쳤다. 나중에 호세피나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랬다.

깜짝 놀란 라우라는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그러나 얼굴이 시뻘게 변한 파블로가 다시 물었을 때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디오에요. 쿠이체오에서 멕시코 시까지 나를 따라온 인디오…….”

그렇게 해서 호세피나는 인디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차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즉각 경찰에 알려야 해.” 파블로는 소리쳤다.

호세피나는 주인에게 수상한 남자가 엿보고 있던 창문을 가리켰고, 파블로는 그 창문을 주의 깊게 살폈다. 창턱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부상을 당했군…….” 파블로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는 호세피나 쪽으로 몇걸음 걸어가더니 라우라 앞에서 멈춰 섰다.

“인디오였어요, 주인님.” 호세피나는 라우라의 말에 확신을 얻은 듯 말했다.

파블로는 의자 위에 놓인 흰 옷을 나꿔챘다.

“이 얼룩이 어떻게 생긴 건지 말해봐.”

라우라는 옷가슴에 묻은 얼룩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블로는 주먹으로 벽장을 쳤다. 그리고는 라우라에게 다가가서 뺨을 후려 쳤다. 호세피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파블로는 하는 짓도 거칠고 말과 행동이 달라. 그가 저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라우라는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맞아요.” 나차는 맞장구를 쳤다.

부엌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라우라는 커피 잔 밑에 가라앉은 검은 찌꺼기를 꺼내려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보고 나차는 뜨거운 커피를 다시 따라주었다.

“커피를 마셔요, 아가씨.” 나차는 아가씨의 슬픔을 동정하며 말했다. 아무튼 주인어른은 무엇에 대해 그렇게도 불평을 했었을까? 멀리서 보기에도 라우라 아가씨는 파블로의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길에서 파블로를 만나 금방 사랑하게 되었어.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아는 사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후로도 간간히 그 아는 사람을 닮아서, 그래서 곧 그 사람으로 변할 것 같았어.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엉뚱한 모습을 보이지. 멕시코 시티의 다른 남자들과 하는 짓이 똑같아.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걸 곧 알게 되었어. 파블로는 기억을 못해. 단지 파블로는 멕시코 시티의 모든 남자와 똑같은 태도만 되풀이하는 거야.

내가 속았다는 걸 너는 생각이나 해봤겠니? 파블로는 화가 날 때는 날 밖에 못나가게 해. 너도 잘 알지? 영화관이건 식당이건 걸핏하면 싸움을 하려고 들지 않니. 나차, 너도 잘 알지? 하지만 내 사촌 남편은 절대로, 정말 절대로 여자에게 화를 안내.”

나차는 라우라가 하는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 아침 호세피나가 놀라 소리치며 부엌에 들어와서 “마님을 깨워, 주인님이 아가씨를 때려!”라고 말했을 때 나차는 마님 방으로 달려갔다. 마님이 나타나자 파블로는 화를 누그러뜨렸다. 마님은 인디오 사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쿠이체오 호수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핏자국만 보았을 뿐 인디오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가야, 아마 네가 호수에서 너무 많이 햇볕을 쬐여서 그랬을 거다. 그래서 코피가 나왔을 거야. 아들아, 잘 들어보렴. 우리는 창문이 닫힌 차 안에 있었어. 이 애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남편과 시어머니가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라우라는 침대에 엎드려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차, 그날 아침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 만약 그 사람이 어제 밤 파블로가 내게 키스하는 걸 봤다면? 나는 울고 싶었어. 그 때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데 아기가 없다면 그들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얘기가 떠올랐어. 내 다른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야. 내가 물을 떠다 주었을 때, 나와 나의 사촌 남편이 잠자는 문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어. 나의 다른 아버지가 했던 모든 말들이 이제 사실이 되고 있었어. 베개 위에서 들은 파블로와 시어머니의 말은 다 바보 같은 것들이었어. ‘그 사람을 찾으러 갈 거야.’ 이렇게 나는 속으로 다짐했지. ‘하지만 어디로?’ 그 후 네가 내 방에 와서 식사 준비를 물었을 때 갑자기 생각이 났어.

‘타쿠바 카페!’ 그러나 나는 그 카페를 전혀 몰라, 나차. 단지 그 말을 들었을 뿐이야.

나차는 이 순간 부엌에서 마치 지금 눈앞에서 보는 듯 피 묻은 흰 옷을 입고 있던 라우라의 모습을 기억했다.

“하느님 맙소사, 아가야, 이 옷 입지 마라!” 시어머니는 말했다. 그러나 라우라는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얼룩을 가리기 위해 그 위에 흰 스웨터를 입고는 목까지 단추를 잠그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없이 거리로 나갔다. 그 후 상황은 더 심했다, 아니 더 심한 것은 이게 아니였다. 심각한 것은 마님이 드디어 깨어나서 부엌으로 오는 것이었다.

“타쿠바 카페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곳은 참 슬펐어. 나는 점원에게 다가갔어. ‘뭘 드릴까요?’ 나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엇이든지 시켜야 했어. ‘코코주스요.’ 내 사촌과 나는 어릴 적부터 코코를 마셨지……. 카페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있었어. ‘어느 도시에든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있고 그것이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단지 투명한 시간만이 남을 때 그는 올 거야. 그리고 두 개의 선은 하나가 될 거고 나는 그 사람의 마음 가장 소중한 자리에 있게 될 거야.’ 코코 주스를 마시면서 나는 혼자 말했어.”

“몇 시예요?” 점원에게 물었어.

“열두시예요, 아가씨.”

‘한 시에 파블로가 온다...’ 나는 나에게 말했어. ‘택시 기사에게 페리페리코 외곽도로로 달리자고하면 아직 조금은 시간이 있어.’ 그러나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거리로 나갔어. 태양은 은빛이었고 생각은 내게서 빛나는 가루로 변했고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없었어. 길에 내 사촌이 서 있었어. 내 앞에. 슬픈 눈을 하고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어.

“뭘 하고 있지?” 그 사람이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표범처럼 조용히 있었어. 나는 그 사람의 검은 머리칼과 어깨의 붉은 상처를 보았어.

“여기 혼자 있는 데 겁나지 않았어?”

다시 돌멩이와 함성이 주위에 울렸고 나는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어.

“보지 마.” 그가 내게 말했어.

그는 한 무릎을 꿇고 손으로 불 붙기 시작한 내 옷의 불을 껐어. 그 사람의 눈은 너무 슬퍼보였어.

“여기서 날 데려가줘요!” 나는 그 사람에게 온 힘을 다해 소리쳤어. 왜냐하면 내가 우리 아버지 집 앞에 있다는 걸 기억해 냈는데 집은 불타 있었고 내 뒤로 부모님과 형제들이 죽어 있었거든. 나는 그 모든 걸 그 사람의 눈에서 보았어. 그 사람이 상처 난 무릎을 땅에 대고 내 옷의 불을 끌 때 나는 그 사람의 위에 쓰러졌고, 그 사람은 팔로 나를 안았어. 그 사람의 뜨거운 손이 내 눈을 가렸어.

“이것이 인안의 종말이에요.”나는 그에게 말했어. 그의 손이 나의 눈을 가려주었어.

“보지 마!”

그 사람은 나를 품에 안았어. 나는 산 위의 천둥소리처럼 그 사람의 고동 소리를 들었어. 시간이 다해서 내가 그 사람의 고동 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내 눈물이 불타는 도시로 뜨거워진 그 사람의 손을 식혀줬어. 비명 소리와 돌멩이는 우리 가까이에 왔지만 나는 그 사람의 품속에서 안전했어.

“나와 함께 자자…….” 그 사람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어.

“어제 밤 나를 봤어요?” 그 사람에게 물었어.

“봤지…….”

우리는 아침의 빛과 뜨거운 불길 속에서 함께 잠들었어. 그리고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사람은 일어나서 방패를 들었어.

“동이 틀 때까지 숨어 있어. 네게 돌아올 게.”

그 사람은 맨 다리로 가볍게 뛰어 갔어……. 그리고 나는 다시 도망쳤어, 나차. 나는 혼자 있으면 무서우니까.

“아가씨, 어디 안 좋아요?”

파블로 같은 목소리가 길 한폭판에서 들려왔어.

“무례한 것 같으니! 날 내버려둬!”

나는 택시를 타고 페리페리코 외곽도로를 달려 집에 왔어…….”

나차는 라우라가 돌아오던 때를 기억했다. 나차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라우라에게 소식을 알려 주었다. 잠시 후 호세피나가 계단을 곤두박질치며 내려왔다.

“아가씨, 주인님과 마님이 지금 경찰서에 계세요!”

라우라는 놀란 채 호세피나를 쳐다보았다.

“어디에 계셨어요, 아가씨?”

“타쿠바 카페에.”

“하지만 그건 이틀 전이잖아요.”

호세피나는 《최근 소식》지를 가져와서 큰 소리로 읽었다. “알다마의 여사는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 수상한 인디오가 쿠이체오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왔다고 하는데, 그는 변태로 보인다. 경찰은 미초아칸과 과나후아토 지방을 조사하고 있다.”

라우라는 호세피나에게서 신문을 낚아채고서 화를 내며 내던졌다.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나차와 호세피나는 라우라를 혼자두면 안될 것 같아서 뒤를 따라갔다. 라우라는 침대에 쓰러져서 눈을 뜬 채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했고 그 후에 부엌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라우라 아가씨가 사랑에 빠져 방황하는 것 같아.”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직 주인 아가씨 방에 있었다.

“라우라!” 파블로는 소리쳤다. 그리고 침대로 가서 부인을 껴안았다.

“여보!” 파블로는 울먹였다.

라우라도 잠시 동안 눈물을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주인님!” 호세피나가 소리쳤다. “아가씨 옷이 그을려 있어요.”

나차는 호세피나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파블로는 부인의 옷과 다리를 살펴보았다.

“그렇군…….” 구두 밑창도 불에 탔어.

“여보, 무슨 일이야, 어디에 있었어?”

“타쿠바 카페요.” 라우라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마님은 손을 저으며 며느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저께 거기 있었다는 건 알아. 코코주스를 마셨지. 그 후엔?”

“그 후엔 택시를 타고 페리페리코 외곽도로를 달려서 집에 왔어요.”

나차는 눈을 내리깔았고 호세피나는 뭔가 말할 듯 입을 벌렸으며 마님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면에 파블로는 아내 어깨를 붙들고는 세차게 흔들어댔다.

“바보 같은 짓 그만둬! 이틀 동안 어디 있었어? 왜 옷이 불에 탄 거야?”

“옷이 불에 탔다구요? 그 사람이 불을 껐으면…….” 파블로는 라우라를 놓았다.

“그 사람이라고? 그 더러운 인디오?” 파블로는 분노로 다시 라우라를 잡아 흔들었다.

“타쿠바 카페에서 나오다 그 사람과 마주쳤어요…….” 라우라는 겁먹어 사색이 된채 울먹였다.

“네가 그렇게 천박할 줄은 전혀 몰랐어!” 파블로는 라우라를 침대에 내던졌다.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보렴.” 시어머니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그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 그렇지 않니, 나차?” 라우라는 나차의 동의를 구하며 물었다.

나차는 여주인의 일탈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날 낮 이 여주인의 상황을 기억하고는 가슴 아파하면서 말했다.

“아마 쿠이체오의 인디오는 마법사일거예요.”

그러나 마르가리타 마님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차를 쳐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마법사라고? 그자는 살인자야!”

그 후 오랫동안 라우라는 외출이 금지됐다. 주인은 집안의 창문과 출입문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하녀들은 라우라의 방을 들락날락거리며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나차는 라우라의 일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거나 라우라의 비정상적인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호세피나의 입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주인님, 새벽에 인디오가 다시 창에 나타났어요.” 호세피나는 아침식사 쟁반을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주인은 창으로 뛰어가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라우라는 울기 시작했다.

“가엾어라……. 가엾어라…….” 울면서 말했다.

주인이 의사를 데리고 온건 그날 오후였다. 그 후 의사는 매일 오후에 들렀다.

“내 어린 시절,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 대해서 물었어. 하지만, 나차, 나는 도대체 뭐가 내 어린 시절이고 무슨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대해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그에게 멕시코 정복에 대해 얘기했어. 넌 날 이해하지, 그렇지?”

라우라는 노란 냄비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예, 아가씨…….” 그리고나서 신경이 예민해진 나차는 창유리 너머 정원을 유심히 살폈다. 밤이라 겨우 정원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었다. 나차는 저녁식탁에 마주 앉은 식욕 없던 주인의 얼굴과 마님의 서글픈 눈길을 기억했다.

“어머니, 라우라가 의사에게 베르날 디아스의 책(역주. 코르테스의 부하로 아스테카 정복에 참여한 후, 회고록 형식으로 아스테카 정복 과정을 서술한 책.)을 부탁했대요. 그게 유일하게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거래요.”

마님은 포크를 떨어뜨렸다.

“불쌍한 내 아들, 네 아내는 미쳤어!”

“라우라는 단지 테노치티틀란(역주.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 이전 아스테카인들의 도시로 멕시코 시티의 옛 이름)의 함락만을 얘기한대요.” 파블로는 우울한 기분으로 덧붙였다.

이틀 후 의사와 마르가리타 여사, 그리고 파블로는 갇혀 있는 상태가 라우라의 우울증을 가중시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라우라는 세상과 접촉해야만 하고 책임감있게 세상과 맞서야만 했다. 그날 이후 주인은 아내가 차풀테펙의 숲으로 산책 나가게끔 차를 보냈다. 라우라는 시어머니와 승용차 기사와 함께 나가게 되었는데 승용차 기사는 라우라를 가까이서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칼리나무의 공기만으로는 라우라를 회복시키지 못했으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라우라는 베르날 디아스의 멕시코 정복사를 읽느라고 방에 틀어박혔다.

어느 날 아침 마님은 차풀테펙의 숲에서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혼자 돌아왔다.

“그 미친 게 도망갔어!” 집에 들어서면서 온 집안이 울리게 소리쳤다.

“나차, 생각해봐. 나는 매일 같은 벤치에 앉아 있었고 내 자신에게 말했어. ‘그는 나를 용서 안 해. 남자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의 배신은 용서할 수 있지만 영원한 배신은 용서 못해.’ 이 생각이 나를 너무 슬프게 했어. 날씨는 더웠고 시어머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샀어. 나는 먹기 싫었고 그래서 시어머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차 안으로 들어갔어. 나는 시어머니가 나 때문에 따분해 하는걸 알고 있었어. 나도 시어머니를 따분하게 생각했고. 난 누가 날 감시하는 게 싫어. 그래서 나는 시어머니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날 지켜보는 게 싫어서 다른 데로 갔어. 나는 노간주나무에 늘어져 있는 잿빛 열매를 보았어. 왜 아침은 그 나무들처럼 슬픈지 모르겠어. ‘그들과 나는 똑같은 재앙을 보았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어. 돌이 깔린 빈 보도로 시간이 공허하게 흘렀어. 내가 있었던 시간들처럼. 나는 돌이 깔린 빈 보도에 혼자 있었어. 나의 남편은 나의 영원한 배신을 창문에서 바라보았었지. 그리고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건들로 만들어진 이 역사의 돌이 깔린 보도 위에 내버려둔 거야. 나는 옥수이파리 냄새와 멀리서 들리는 그 사람의 차분한 발자국 소리를 기억했어. ‘2월의 바람에 낙엽이 돌 위를 구르는 것처럼 그 사람은 그렇게 낙엽처럼 걸었었지. 전에는 그가 내 등 뒤를 바라보고 있는지 보려고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지…….’ 이런 슬픈 생각에 잠긴 채 나는 걸었는데, 그때 갑자기 태양이 달리는 소리가 났고, 낙엽들이 구르기 시작했었어. 그 사람의 숨결이 내 등에 느껴졌고 다음엔 내 앞에 와 있었어. 나는 내 발 앞에 있는 그 사람의 맨발을 보았어. 그는 무릎에 상처가 있었어. 나는 눈을 들어 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나를 발견했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어. 나는 경건하게 그 사람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사람은 내게 물었어.

나는 가만히 있는, 전보다 더 슬퍼 보이는 그 사람을 보았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 최후의 날이 올 거야…….”

그 사람의 목소리는 시간의 심연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어.

어깨에서는 피가 계속 솟아나고 있었어. 나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혀서 눈을 내리깔고는 가방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 그 사람의 가슴을 닦았어. 그리고 다시 가방 속에 넣었어. 그 사람은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타쿠바에서 나가자……. 배신자가 많아…….”

그 사람은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소리치고 애원하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어. 운하의 물 위로는 수많은 시체들이 떠다니고 있었어. 그 떠내려가는 시체들을 보며 많은 여자들이 풀 위에 앉아 있었어. 모든 곳에 페스트가 만연하고 있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울고 있었어.

나는 보고 싶지 않은데도 모든 걸 볼 수밖에 없었어. 부서진 카누에는 아무도 없었고 단지 슬픔만이 타고 있었어. 내 남편은 부러진 나무 밑에 나를 앉혔어. 그 사람은 한 무릎을 땅에 대고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계하며 살폈어. 그 사람은 두려움이 없었어. 잠시 후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았어.

“네가 배신자라는 걸 알아. 그리고 나를 동정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 선은 악과 함께 자라는 거야.”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어.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 왔는데 대낮의 빛을 깰 만큼 강렬했어. 아마 그게 그들의 마지막 울음인 것 같았어.

“어린아이들이야…….” 그 사람이 내게 말했어.

“이것이 인간의 종말이에요…….” 나는 이 말을 되풀이했어. 왜냐하면 다른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손을 내 귀에 대었어. 그리고는 나를 가슴에 안았어.

‘배신자인 너를 알았어. 그리고 그렇게 너를 사랑했어.’

‘당신은 복 없이 태어났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사람을 껴안았어.

나의 사촌 남편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어. 우리는 피루나무의 부러진 가지 위에 누웠어. 거기까지 전사들의 함성소리와 돌멩이와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느껴졌어.

“시간이 다하고 있어.” 남편은 한숨을 쉬었어.

시간과 함께 죽기를 원하지 않는 여자들이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도망갔어. 남자들의 행렬은 차례차례 넘어졌어. 마치 손에 손을 엮은 사슬처럼. 그리고 똑같은 일격이 그들 모두를 내리친 것처럼.

몇몇은 크게 비명을 질렀고 그것은 죽음 이후까지도 한참동안 남아 울려 퍼졌어.

나의 사촌이 일어나 나뭇가지를 모아 나에게 동굴을 만들어 주었을 때 우리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여기서 나를 기다려.”

그 사람은 나를 보고는 종족의 함락을 저지하러 희망을 가지고 싸우러갔어.

나는 쪼그리고 않았어. 나는 마음이 약해질까 봐 도망가는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울 것 같아서 물 위로 떠가는 시체들을 보지 않으려 했어. 나는 잘려진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열매들을 세기 시작했어. 그것들은 말라 있었고 손끝으로 건드렸을 때 빨간 껍질이 떨어졌어. 왜 그것이 불길한 예감으로 느껴졌을까, 차라리 나는 어두워가는 하늘을 보았어. 처음에는 거무스름한 색이었는데 후에는 운하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색깔이 되었어. 나는 다른 오후의 색깔을 기억하며 있었어. 그러나 오후는 보랏빛이 되며 부풀어 올랐어. 마치 일어날 것처럼. 그리고 나는 시간이 다한 것을 알았지. 만약 내 사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전투에서 죽었는지 몰라. 나는 그 사람의 운에 상관하지 않고 겁에 질려 그곳을 빠져 나왔어. ‘그 사람이 돌아와서 나를 찾는다면…….’ 나는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 왜냐하면 해 저물어가는 멕시코 시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시어머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다 드셨을 거야. 그리고 파블로는 분명 화가 나 있을 테지…….’ 택시가 페리페리코 외곽도로를 달려 나를 데려다주었어. 나차, 이거 아니? 외곽도로들은 시체가 가득한 운하였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슬퍼하며 왔어. 나차, 내가 오후에 내 남편과 같이 있었다고 파블로 한테 지금 말하지 마.”
나차는 연보랏빛 치마에 팔을 내려놓았다.

“파블로 주인님은 열흘 전에 아카풀코로 떠나셨어요. 조사가 진행되던 몇 주 사이에 아주 마르셨어요.” 나차는 우쭐해져서 설명을 해주었다.

라우라는 놀라지도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층에는 마님이 계세요.” 나차는 부엌 천정에 눈길을 주며 덧붙였다.

라우라는 무릎을 껴안고는 유리창 너머로 밤의 그림자로 지워져가는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이웃집 창문에서는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나차는 손등에 소금을 놓고는 맛있게 먹었다.

“코요테가 어찌나 많은지 몰라요! 얼마나 소동을 피우며 다니는지!” 나차는 소금을 가득 물고서 말했다.

라우라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몹쓸 동물들. 네가 오늘 오후에 그것들을 봤었더라면.” 라우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들이 주인님의 길을 혼동시키거나 방해하지 말기를.” 나차는 겁이 나서 말했다.

“그 사람은 코요테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왜 그이가 오늘 밤 그것들을 무서워하겠어?” 라우라는 피곤한 듯 물었다.

나차는 갑자기 그들 사이에 생겨난 친근감을 더 긴밀히 하기 위해 자기 여주인에게 가까이 갔다.

“코요테는 틀락스칼라인들보다 더 약해요.” 나차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여자는 조용히 있었다. 나차는 소금 한 줌을 조금씩 부수고 있었고, 라우라는 밤공기를 가득 채우는 코요테의 울음소리를 걱정스러운듯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오는 것을 본 것은 나차였다. 나차는 그에게 창문을 열어주었다.

“아가씨!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어요…….” 그녀는 단지 라우라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후 라우라가 그 사람과 함께 영원히 떠난 뒤에 나차는 창문의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코요테 무리 때문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코요테 무리들은 방금 다 소진해 버린 그들의 시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차는 늙디늙은 눈으로 모든 것이 다 제대로 있는지 살펴보았다. 커피 잔을 씻고 붉은 입술연지가 묻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커피포트를 선반 위에 집어넣고는 불을 껐다.

“제가 볼 땐 라우라 아가씨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주인님과 맞지도 않고요.” 나차는 아침 식사를 마님에게 날라다주며 말했다.

“나는 이제 이 알다마 집안에 있을 필요가 없어. 나는 다른 운명을 찾을 거야.” 나차는 별안간 하녀 호세피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월급도 받지 않고 떠나버렸다.◇



작가소개

엘레나 가로(Elena Garro, 1917-1998): 멕시코 푸에블라 출생.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1937년 옥타비오 파스와 결혼, 이후 이혼함. 1963년 출간한 『미래의 기억』(Los recuerdos del porvenir)은 크리스테라 전쟁를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써 환상문학적인 기법으로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가로는 이 작품으로 1963년 멕시코의 권위있는 비야우르티아 상을 수상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잘못은 틀락스칼라인들에게 있다」(La culpa es de los tlaxcaltecas)는 단편집 「다채로운 한 주」(La semana de colores, 1964)에 실린 작품으로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뒤섞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