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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버레스트 : 여행일지 / 파디야 2006-06-25 / 8489   

에버레스트 : 여행일지

이그나시오 파디야 (Ignacio Padilla) / 박병규 옮김



모리스 윌슨과 애기 에버레스트(Ever Wrest) 모리스 윌슨은 뮌헨 근교의 결핵요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등반가의 자질로 따지자면 어느 열성 산악인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신비에 둘러싸인 그 봉우리를 정복하려면 아무래도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고, 행운도 뒤따라야줘야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듯이, 윌슨의 계획은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었다. 먼저 기도와 엄격한 채식 요법으로 결핵균을 쫓아내고, 비행교육을 받은 다음, 에베레스트 산으로 날아가서 최대한 높은 곳에 비행기를 착륙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여정에 관해서도, 사전에 레이크 디스트릭트[역주. 영국 북서부 캄브리아 주에 위치한 관광지] 암벽에서 조금만 훈련을 하면 지난날 3차 이프르 전투[역주. 1차대전 당시 최대의 격전지]에서 무공훈장 받았을 때만큼 건강한 신체상태를 회복할 테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결심을 하기 며칠 전, 윌슨은 신문에서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역주. 1924년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세컨드 스텝이라고 부르는 수직 암벽지대에서 실종된 영국 산악인들. 1999년 미국 산악인 에릭 시몬슨이 이끄는 원정대가 8,400미터 지점에서 조지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하였으며, 이로써 에베레스트 초등자는 힐러리가 아니라 말로리라는 해묵은 가설이 화제가 되었다.]이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불과 300미터 남겨놓고, 이른바 ‘서드 스텝’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두 산악인은 대영제국의 영웅이자 순교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존경의 염을 담아냈으나 뉴질랜드 어느 가게에서 여자 옷을 훔친 혐의로 강제퇴역 당한 윌슨이 보기에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윌슨의 생각으로는, 옥스퍼드 출신의 이 젊은이들이 등산로를 잘못 선택해서 아까운 생명을 헛되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세계 최고봉을 등정하겠다는 그들의 욕심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나, 두 대원 중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연장자가 쓸데없는 일에 필요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다니, 바보가 틀림없었다. 에베레스트에는 숨겨놓은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추위와 고산병을 제외하면 무찔러야할 적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만년설은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을 터인데… 아무튼, 신비한 에베레스트 정상은 그 어떤 미치광이에게도 피난처가 될 수 있었으나, 적어도 윌슨은 그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으로 역사에 남으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윌슨은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을 것이며,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인해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자기 계획이 실현가능하다고 철석같이 확신한 탓인지 윌슨은 얼마 후 의사들도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윌슨은 기도, 난잡한 성생활, 장시간 취침, 그리고 어머니의 처방에 따라 설탕, 홍당무, 소량의 백리향을 혼합하여 만든 역겨운 야채즙 을 시도 때도 없이 무절제하게 섭취함으로써 보란 듯이 질병을 이겨냈고, 그 이후로는 바비에라[역주. 독일 남부 주] 요양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최신의 치료방법도 과감하게 중단해버렸다. 병이 완치되어 퇴원할 무렵에는 런던의 어느 출판사에서 〈나는 어떻게 코흐의 간균을 속였나〉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다. 윌슨은 이 책에서 기적적인 치료는 지혜로운 어머니의 민간요법 덕분일 뿐만 아니라 정신력으로 뇌하수체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성적충동을 극대화한 덕분이라고 밝혔다. 어떤 의사나 과학자도 이처럼 기이한 치료법을 감히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자는 상업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저자 윌슨은 중고 비행기를 장기분할상환 조건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비행기는 원래 ‘집시 모스’ 호였는데, 윌슨은 ‘에버레스트’ 호라는 암시적인 이름을 붙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윌슨을 가르치던 런던항공클럽의 교관 두 명은 중상을 입었고, 헐 항공학교의 교관은 신경증 증세로 입원했던 게 확실하다. 어쨌거나 4주 후에는 강철 같은 의지와 호인기질 덕분에 2급 항공기 조종사 면허증을 발급받았고, 이제 윌슨이 비행기를 띄운다고 하더라도 관계당국은 별다른 주의를 하지 않았다.

윌슨은 레이크 디스트릭트 암벽에서 단기간의 체력훈련을 끝낸 뒤, 4월 초순 브래드포드를 향해 이륙했다. 티베트로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드릴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륙 직후 고도를 유지하지 못한 에버레스트 호는 요크셔 지방의 어느 농장 지붕 위에 비상착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사고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계획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광고효과를 거둔 탓에, 언론을 통해서 비행 목적이 네팔 영공 침범이며, 영국군으로 복무할 때는 성적 일탈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교통부장관은 그 즉시 윌슨이 영국해협을 넘지 못하도록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윌슨은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3주에 걸쳐 에버레스트 호를 수리하였고, 안개가 자욱한 5월 어느 날 아침 스태그래인 비행장에서 이륙하였다.

이 여행에 관한 영국 문건에는 수많은 사실이 누락되어 있는데, 특히 우리가 주목할 점은 어느 문건에서도 영국에서 식민지 인도까지 약 8,000km를 단독 비행한 윌슨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덧붙여, 영국 당국은 윌슨의 비행을 단념시키려고 갖은 구실을 둘러대며 중간 급유를 위한 카이로와 바레인 공항 착륙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윌슨은 적어도 리벤트로프나 아멜리아 이어하트[역주.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여류비행사]에 버금가는 명예를 누려야 마땅할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에버레스트 호가 실제로 인도에 착륙한 것만은 확실하다. 인도에서는 육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격분한 교통부 관리에게 어쩔 수없이 소중한 비행기를 넘겨주게 된 윌슨은 어머니에게 가슴 아픈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은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윌슨은 영국의 법률과 비행기를 억류한 관리들을 다시 한번 증오한다면서, 모든 사람이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만들겠다는 자신의 고귀한 목적을 음해하려고 달려드는 권력의 책동 때문에 법률이 사문화되고 있는데, 이게 영국 법률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말했다.

윌슨이 어떤 술수를 동원하였기에 구속을 면하고, 또 에버레스트 호 억류 건으로 변상금까지 받게 되었는지는 전기 작가들도 아직까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다. 만약 누구라도 윌슨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델리의 교도소에 뼈를 묻었을 것이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선처한다고 하더라도 그 즉시 영국 행 선박에 태워 강제송환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윌슨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이나 인간이 만든 법률을 지금까지 잘 지켜진 이유는 자신이 이러한 법을 위반하는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변상금 500파운드를 받자마자 다시 당국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도보로 네팔에 입국하였고, 노련한 셰르파 3명을 고용하여, 25일이라는 신기록으로 롱북 사원[역주. 해발 5030m에 위치한 티베트 사원]에 도착했다.


롱북사원


일년 뒤 소지품과 함께 발견된 일기장 첫 페이지는 롱북 사원에 체류할 때부터 시작된다. 또다시 백리향과 홍당무로 만든 특이한 식품과 기도만을 고집한 윌슨은 난생처음 본 히말라야 빙하의 장대한 광경을 일기장에 적어놓았다. 또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하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등반 목적을 독자들에게―그런 독자들이 있을 법하지 않지만― 밝히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윌슨이 여행일지에서 확언한 바에 따르면, 불확실성과 무명(無名)이야말로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훗날 이곳에 당도할 사람들의 후발성과 거짓 명성에 복수하는 최고의 무기가 될 터였다. 윌슨이 과연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상황에 있었는지는 오늘날 확인이 전혀 불가능한 사안이나, 윌슨의 마지막 며칠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와 전기 작가들의 추정이나 전설에 의거하여 재구성한 견해가 완전히 상반되는 까닭은 이러한 독특한 협박에 기인하다고 의심해도 결코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윌슨의 등정에 관한 영국 연감의 기술을 참고하면, 윌슨은 4월 중순에 처음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며칠 뒤, 추위와 경험부족으로 롱북 사원으로 철수하였고, 5월 중순 셰르파를 데리고 다시 정상 공격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셰르파는 제3캠프까지만 윌슨을 동행했을 뿐이라며, 셰르파를 동반한 정상 공격설을 부정했다. 사람들 얘기로는, 윌슨이 금욕의 신조를 버리고, 일년 전 영국 원정대가 캠프에 남겨놓은 ‘포트넘 앤 메이슨’ 통조림을 5개나 먹은 것도 바로 이 제3캠프였다. 외롭고 또 포식도 한 윌슨은 북쪽 능선으로 등반하여 마침내 거대한 빙벽을 만났고,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음날 적당한 뇌하수체 수련을 한 다음 다시 정상 공격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일기에 밝혀놓은 직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년 뒤, 에릭 쉽튼이 이끄는 원정대가 윌슨의 시신을 발견했다. 쉽튼은 부서진 텐트 사이에서 꽁꽁 얼어붙은 윌슨의 시신을 수습하여 롱폭 동쪽에 안장하고, 빙하와 함께 윌슨의 전설적인 어리석음도 영원히 묻히기를 기원했다.

윌슨의 최후 며칠간 행적에 대해서 더 이상 밝혀진 사실은 없다. 그 후 오랫동안 영국 산악인들은 에릭 쉽튼이 여장 차림의 윌슨 시신을 발견했다거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난잡한 성적 환상을 기록해놓은 윌슨의 제2 일기장을 런던 저택에 보관하고 있다는 설을 농담하듯이 되풀이 주장했다. 제2의 일기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윌슨의 여장 이야기는 영국 산악인 연감에 수록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적절한 사항이 틀림없다. 불행한 등반가 윌슨의 시신은, 인내와 끈기로 뭉친 삶을 기리기라도 하듯이, 롱북 빙하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1975년 마침내 중국 원정대가 빙하에 묻힌 윌슨의 시신을 찾아냈다. 당시 어느 소식지는 북경 주재 특파원이 송고한 흥미 있는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모리스 윌슨의 사인은 추위가 아니라 질식사였다. 열망하던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방법을 상세하게 기술한 일기장을 입안에 넣고 삼키다가 질식했다는 것이다. 윌슨의 시신을 발견한 중국 원정대는 옷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지금도 공산당 산악인 박물관에 가면 관능적인 하이힐을 볼 수 있다. 전설적인 산악인 추잉화의 증언으로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등극하기 불과 며칠 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꽂아놓은 영국 국기로부터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눈밭에서 이 하이힐을 찾아냈다고 한다.■


* 알림: 이 번역은 《한국문학》 (2006년 봄호, 통권 261)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