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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 카르펜티에르 2006-10-27 / 13909   

산티아고 순례길

알레호 카르펜티에르(Alejo Carpentier)/ 박 병 규 옮김




I


       병사 후안은 북 두 개를 ―자기 북은 왼쪽 엉덩이에, 카드판에서 딴 북은 어깨에― 걸머지고 스헬데 강변을 걷고 있었다. 문득, 방금 강변에 닻을 내린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닻줄을 기둥에 매어놓은 배였다. 그날 오후 내리던 가랑비가 모자챙으로 대충 가린 북 판에서 얼굴로 튀었기 때문에 모든 게 흐릿하게 보였다. 행상의 맥주와 소주에 취한 탓도 있었다. 행상의 수레는 이제 마구간으로 사용하는 예전 루터교회 근처의 골목길에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뱃전에는 왠지 모를 서글픈 기운이 서려 있었고, 운하의 안개도 그 배가 내뿜는 불길한 숨결처럼 보였다. 돛을 보니, 오래되어서 누르스름해진 범포(帆布)로 여기저기 수선해놓았다. 밧줄은 털이 일어났고, 돛대에는 이끼가 끼었으며, 보수를 하지 않은 현(舷)에는 마른 해초가 넝마처럼 매달려 있었다. 고동 한 마리가 잔잔하게 출렁이는 차가운 물살에 쫓겨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며 썩어서 거무튀튀하게 변한 부착생물 위에 별과 회색 장미와 허연 동전을 그리고 있었다.

       선원들은 기진맥진한 것 같았다. 볼이 움푹 꺼지고, 눈은 퀭하며, 이는 빠져서 꼭 괴혈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부두에 오르려고 상륙정 밧줄을 푸는 선원들은 환하게 불을 밝힌 선창가 술집을 보고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선박도 선원도 똑같은 잘못을 범해 회한에 휩싸인 것 같았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하느님을 모욕하기라도 한 것일까? 배에 남아 밧줄을 감고 돛을 접는 선원들도 육지에 발을 올려놓지 못하는 처지라 마지못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갑판뚜껑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갑판 아래에서 왜귤(矮橘)나무가 나타났다. 이 안트베르펜의 해거름에 난데없는 태양이 솟아난듯했다. 술통에 심은 나무마다 과일들이 빛을 발하고, 갑판은 이내 향기로운 길거리로 변했다. 화려한 황금색 과일로 옷을 입은 나무들이 나타나자 속절없이 기울어가던 오후도 걸음을 멈추었고 과일향, 후추향, 계피향에 취한 후안은 어깨에 걸머진 북을 땅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저 왜귤나무는 틀림없이 알바 공작이 애호하는 물건이었다. 공작부인은 사치도 심하고 선물도 좋아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공작 집안의 사람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향신료 제도나 인디아스나 호르무즈 왕국에서 실어온다는 얘기도 들렸다. 키가 아주 작고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저 왜귤나무는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의 과수원에서 재배한 것이 틀림없었다. 관목으로 저토록 놀라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재주는 무어인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운송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거나 적함(敵艦)과 조우한 것 같지도 않았다. 플랑드르 출신의 공작부인은 레반트 지방의 고운 산호가루로 붉게 화장한다고 하는데, 저 왜귤나무 또한 공작부인이 기거하는 궁전, 거울의 방 장식용으로 실어온 것이다. 사실 항해도 빈번하고 전에 못 보던 신기한 것도 많이 들어오던 그 시절, 선물을 바라는 여자들은 수세기 동안 선호하던 화장품으로 만족하지 않고, 덴마크제 발명품이나 러시아제 향유나 진기한 향수를 원했다. 새는 상소리를 흉내 내는 아메리카산 앵무새를 원했으며, 개도 귀여운 고스케는 싫증이 났는지 털이 많은 애완견을 원했다. 애완견 털을 깎아서 베르베르 말처럼 갈기털을 만들고 거기에 색색의 리본을 매달아 그리핀 비슷한 외양으로 꾸밀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병사들 가운데는 사모라 지방 출신 행상의 소주에 얼큰해지면 앞뒤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공작이 안트베르펜에서 겨울철 병영이 봄철 병영이 되도록 오래 머무는 이유는 류트를 타며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고대인들이 언급한 사이렌의 목소리와 같아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사이렌이라고?” 코앞에서 청소부 여자가 소리쳤다. 이 여자는 대단한 술꾼으로, 나폴리에서부터 군대를 뒤쫓아 여기까지 왔다. “사이렌이라고? 차라리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하지.” 후안은 나머지 얘기를 듣지 못했다. 행상의 수레에서 먹고 마시던 병사들이 돈도 안 내고 우르르 흩어지는 바람에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공작 하인이 그 얘기를 듣고 상전에게 일러바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도착한 소위의 지휘 아래 육지로 옮겨놓은 저 왜귤나무 앞에서 후안은 확신에 찬 그 여자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때 관할청 소속의 포장마차 몇 대가 왜귤나무를 실으러왔다.

       허기를 느낀 후안은 문득 내장탕이나 우족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카드판에서 딴 북을 다시 어깨에 짊어졌다. 바로 그 때 닻줄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큰 쥐를 보았다. 피부가 벗겨진 꼬리는 퉁퉁하게 부어올랐고, 종기가 덕지덕지 나 있었다. 후안은 돌을 집어 쥐를 겨냥했다. 부두로 올라온 쥐는, 낯선 도시에 하선하여 길을 묻는 이방인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등 위로 지나간 돌멩이가 운하에서 물장구를 쳤다. 화들짝 놀란 쥐는 화형당한 루터파 선교사들이 살던 집으로 내달렸다. 이제는 가축사료창고로 이용하는 집이었다. 이쯤에서 후안은 사모라 출신 행상의 수레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저쪽에서 중대의 병사들은 청소부 여자를 쫓아버리려고 민요를 합창하고 있었다. 가사는 가짜 처녀와 화냥기 있는 여자와 뚜쟁이 이야기였다. 그러나 왜귤나무를 실은 마차가 떠나자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오로지 청소부 여자의 투덜거리는 소리와 루터교회에서 바알세불의 웃음처럼 들려오는 나귀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II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섰을 때 처음에는 매독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흔한 병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열이 나고(3일마다 반복되지는 않았다), 중대 병사 다섯 명이 피를 토하자 후안은 두려웠다. 하루 종일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매독 기운이 있을 때도 그곳이 부어오르기 때문에 혹시 묵주알 같은 게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 습도 때문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병명을 언급하자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후안은 나폴리 왕국에서 생활한 경험에 근거하여 페스트 아니면 그보다 더 심각한 병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얼마 후, 후안은 왜귤나무를 싣고 온 선원들 모두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원들은 라스팔마스에 괜히 들러 바람을 쐤다고 욕을 해댔다. 라스팔마스는 알제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사람들이 옮아온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이, 날벼락을 맞은 듯, 길거리에서 푹푹 쓰러졌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중대가 주둔한 지역에서는 쥐떼가 득실거렸다. 후안은 꼬리피부가 벗겨진 그 역겨운 쥐가 원흉인데 돌팔매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바람에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 놈이 바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창고 식량을 빼먹고 저쪽 강변의 치즈까지 모두 먹어치운 쥐떼의 기수(旗手)이자 이단의 선교사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의 숙소배정인이자 루터파 같은 낌새가 보이는 어부는 매일 아침 반쯤 뜯어먹은 청어와 꼬리만 남은 가오리와 뼈만 앙상한 장어를 발견했는데, 어느 날인가 지저분한 쥐 한 마리가 장어를 넣어둔 수족관에서 배를 까뒤집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자 앞이 캄캄해졌다. 종창에서 고름이 흐르는 저 쥐떼가 향신료 제도의 어떤 섬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걸신들린 듯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먹지 못한 것은 대합과 게뿐이었다. 갑옷의 끈이나 말안장의 가죽을 갉아먹었으며, 중대의 사제가 미사 때 쓰려고 보관하던 밀떡까지 못쓰게 만들었다.

       지붕 밑 다락방을 숙소로 사용하던 후안은 홍수로 범람한 초원에서 내려온 찬바람에 몸을 떨다가 야전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제 가슴은 불덩이고, 사타구니 통증이 너무 극심해 훌쩍훌쩍 울었다. 주님의 영광에 바치는 성가(聖歌)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고수(鼓手)로 군에 입대했으니 벌을 받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수 일이란 성가를 부르는 예술도 아니요, 고상한 4학도 아니었다. 고향 젊은이들이 육신의 쾌락을 위해 연주하던 삼봄바, 판도르가, 카스트라푸에르코 음악이 전부였다. 그러나 북 하나와 소가죽 신발 하나로 나팔수, 회양목 피리 연주자와 함께 행진곡을 연주하며 나폴리 왕국에서부터 플랑드르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주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안은 사제나 합창단 단장이 될만한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칼라 지방의 시루엘로 선생 문하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영광을 포기하고, 손에 8레알짜리 은화 3닢을 쥐어주며 군대에 들어오면 여자와 술과 카드를 실컷 즐기게 해주겠다는 징병관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세상 경험을 한 지금, 허욕을 추구함으로써 성녀 같은 어머니의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만들었다고 뉘우쳤다. 세 번의 전투에서 적의 포격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라고 북을 쳤건만, 박자도 제대로 못 맞추는 저 어리벙벙한 플랑드르인의 북소리를 따라 야경꾼의 횃불이 푸른 유리창에 서글프게 너울거리는 다락방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는 그런 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후안이 불덩이 같은 가슴과 부어오른 가래톳을 생각하고 훌쩍거린 진짜 이유는 하느님께서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진짜 병을 주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극심한 오한이 찾아들었다. 후안은 장화도 벗지 않고 야전침대에 누워 담요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솜이불까지 덮었다. 그러나 담요 한 장, 이불 한 채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한이 든 몸뚱어리가 그 옛날 솔로몬 왕이 처녀의 몸에서 찾던 온기를 느끼려면 중대원의 담요란 담요는 모두 뒤집어쓰고 안트베르펜의 솜이불이란 솜이불은 모두 덮어야할 것 같았다.

       신음소리를 듣고 다락방으로 올라온 어부는 극심한 오한에 떠는 후안을 보고 놀란 나머지 쥐가 우글거리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집안에 환자가 생겼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파는 가톨릭교도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덧붙였다. 후안은 안개처럼 흐릿한 의식 속에서 의사의 얼굴을 보았다. 의사는 후안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에 손을 넣어 사타구니를 만져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상한 북소리가 들리고 ―아주 날카로운데도 약음기를 달아놓은 듯한 소리였다― 놀랍게도 알바 공작이 찾아왔다.

알바공작 초상화       공작은 수행원도 없이 혼자 왔다. 목을 꼭 죄는 주름깃이 달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백발이 섞인 수염이 주름깃 앞으로 튀어나와 마치 방금 단두대에서 잘려나간 머리를 하얀 대리석 분수대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후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병사답게 차렷 자세를 취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공작은 후안이 덮고 있던 솜이불을 훌쩍 뛰어넘어 침대 반대편 골풀 의자에 앉았다. 의자 위에는 사기병이 여럿 놓여있었는데 의자에서 떨어지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물론 성당의 훈향처럼 진(gin) 냄새가 방안에 퍼지기는 했다.

       바깥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투박하고 음정이 맞지 않는 트럼펫 소리 같은 것이 오슬오슬한 추위를 뚫고 아련하게 들려왔다. 이가 딱딱거릴 정도로 추웠다. 루터파를 화형에 처할 때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알바 공작은 조끼 밑에서 귤 3개를 꺼냈다. 그리고 곡예사처럼 양손으로 저글링을 했는데, 귤은 로마식 가발 위까지 올라갔으며, 속도 또한 놀랄 정도로 빨랐다. 후안은 난생 처음 보는 기예를 능숙하게 펼치는 솜씨를 칭찬해주고 싶어서, 공작을 ‘스페인의 사자’요, ‘이탈리아의 헤라클레스’요, ‘프랑스를 혼쭐낸 채찍’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격렬한 빗줄기가 지붕기왓장을 두들겼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길가 쪽 창문이 열리며 등잔불이 꺼졌다. 후안은 알바 공작이 바람을 타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몸이 쭉 늘어져 상인방(上引枋)을 지날 때는 붕대처럼 구불거렸다. 뒤따라가는 귤에서 모자처럼 보이는 깔때기가 생겨났고, 주름진 껍질에서 개구리 다리가 나왔다. 옷 바깥으로 젖가슴이 삐져나온 부인은 류트를 타고 안마당에서 다락방을 지나 거리로 날아갔는데, 후프스커트가 펄럭이면서 맨살의 엉덩이가 훤하게 드러났다.

       온 집을 뒤흔들던 일진광풍이 섬뜩한 광경을 실어가 버렸다. 그리고 공포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간 후안은 신선한 공기를 찾아 창문으로 다가갔다. 하늘은 맑게 개이고 고요했다. 지난 여름 이래 처음으로 창공에서 은하수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옮긴이 주: 은하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 지명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콤포스텔라(compostela)는 별밭(campo estrella) 즉 은하수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하수가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산티아고 순례길!” 후안은 바닥에 박힌 칼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중얼거렸다. 칼자루는 십자가 형상을 띄고 있었다.



III


전통적인 순례자 복장       순례자 후안은 야윈 손에 지팡이를 쥐고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간다. 아름다운 가리비 껍질을 매단 성스러운 어깨망토와 시냇물만 담는 호리병박이 빛난다. 챙이 늘어진 순례모자 사이로 턱수염이 돋아나고 있다. 실밥이 풀어진 낡은 수도복을 입고, 안타까울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신고 있다. 그러나 파리 땅을 밟았을 때는 술집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으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다. 단 한번, 먼발치에서라도 클뤼니 수도원을 바라보고 싶어서 잠시 순례길에서 벗어날 뿐이다.

       후안은 어둠이 내리면 선한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잔다. 물론 가까운 곳에 수도원이 있을 때는 걸음을 재촉하여 삼종기도 시각에 맞춰 도착하고, 수도원 정문에 얼굴을 내비친 평수도사에게 하룻밤 묵어가겠다고 청한다. 순례자 후안은 가리비에 입을 맞춘 후, 숙소의 아치형 천장 아래 몸을 의탁한다. 플랑드르에서 센 강까지 오는 동안 등줄기를 후려치던 때 이른 빗줄기와 지병에 시달리던 육신은 딱딱한 돌 침상에서 휴식을 취한다. 다음날에는 새벽같이 길을 떠난다. 어서 롱스보 계곡까지는 가야 된다는 조바심 때문에 걸음을 서두른다. 고향 땅이나 다름없는 그곳에 도착하면 삐걱거리는 몸도 한결 나아질 것처럼 보인다.

       투르에서 독일 순례자 두 명을 만나 손짓으로 의사소통한다. 프와티에의 생틸레르 교회에서는 20명의 순례자를 더 만난다. 이제 한 무리가 된 순례자들은 밀 추수가 끝난 논을 뒤로 하고 원숙한 삶을 찾기 위해 랑드 지방을 향해 걸어간다. 추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아직도 여름이다. 태양은 소나무에 머물러 갈수록 잎이 무성해진다. 포도송이는 발길을 붙들며, 향기로운 풀냄새와 서늘한 그림자 때문에 정오의 휴식시간은 갈수록 길어지고, 순례자들은 열심히 노래를 부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산티아고에게 서약했으나 지키지 못한 여러 가지 일을 노래하고, 독일 사람들은 독일식 라틴어 몇 마디를 중얼거리는데, “산티아고 성자님, 선한 산티아고 성자님”이라는 끝 구절만 명확하게 들린다. 플랑드르 사람들이 입을 맞춰 성가를 부르자, 후안은 즉석에서 자작한 카운터멜로디로 화음을 넣는다. “그리스도 병사여, 성스러운 기도로, 모두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막아내라!”

       이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80명도 넘는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어느덧 바욘에 당도한다. 바욘에는 훌륭한 숙박소가 있어서 벼룩도 구제하고, 신발 끈도 교체하고, 서로 이를 잡아주기도 하고, 걸어오는 동안 먼지 때문에 눈곱이 끼고 안질이 생긴 사람들은 치료를 받는다. 숙박소 안마당에는 가여운 사람들이 들끓는다. 옴을 긁는 사람, 잘려나간 팔다리를 보여주는 사람, 수조의 물로 종양을 씻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생루이가 만져도 낫지 않을 큰 화농성종양을 달고 있고, 어떤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아 성기를 꺼내놓고 있는데, 얼마나 부었는지 거인 아다마스토르의 국부처럼 보인다.

       순례자 후안처럼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몇 안 된다. 뜨거운 햇볕 속에서 포도밭 사이로 걸어오면서 수도복이 흥건하도록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몸이 가뿐해졌고, 게다가 소나무 냄새와 시원한 바람을 들이켜 ―가끔 바다 냄새도 실려 왔다― 폐도 건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순례자들의 목을 축여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목욕을 하니 한결 개운하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머리와 팔을 물에 적시면 한기가 들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포도주를 사려고 아두르 강변으로 나간다.

       호리병박에 맑은 물 대신에 진한 포도주를 담아 다시 숙박소로 돌아온 후안은 회랑 기둥에 기대고 앉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신다. 하늘에는 항상 산티아고 순례길, 은하수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술을 마셔 영혼이 가벼워진 후안에게는 이제 은하수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죄에 대한 벌로 페스트라는 병마가 닥칠 것이라는 무서운 통지를 받은 날 밤에도 그랬다. 그때 후안은 사도 야고보가 예루살렘 감방에서 차고 있던 족쇄에 입을 맞추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목욕을 하고 이도 털어내고 술까지 마시면서 쉬고 있는 지금, 그때의 지독한 신열은 페스트 때문이었으며, 악몽은 신열 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쪽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노인이 옆에 누워서 앓는 소리를 낸다. 그때 후안은 한번 맹세한 일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복에 달린 어깨망토로 머리를 감싸며 자기는 건강한 몸으로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다. 다른 사람들은 종기와 딱지를 지닌 채로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성령으로 치유되리라는 확신도 없이 ‘영광의 문’을 지나가리라.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일까? 풍만한 안트베르펜 여자들이 떠오른다. 그 여자들은 산양처럼 털이 많고 야윈 스페인 사람들을 좋아했다. 계산도 하기 전에 넓은 무릎에 앉아서 아몬드 국숫발처럼 보이는 하얀 팔로 갑옷을 벗겨냈다. 이제부터 순례자 후안은 호리병박에 포도주만 담아가지고 다닐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 후안은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 안트베르펜)를 떠나 1) 파리 2) 투르(Tours) 3) 프와티에(Poitiers) 4) 포도밭이 즐비한 보르도(Bordeaux)와 랑드(Landes) 지방 5) 바욘(Bayonne)과 바욘 시내를 가로지르는 아두르(l'Adour) 강을 거쳐 6) 스페인의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한다. ‘프랑스 길’이란 여러 순례길 가운데 위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스페인 북북 지방을 지나는 순례길을 가리킨다.


IV


       순례자 후안은 ‘프랑스 길’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시장과 마주친다.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입구에 길을 막고 장이 들어선 것이다. 성당으로 직행하고 싶은 마음은 부침개를 지지는 냄새, 석쇠에서 고기 굽는 냄새, 파슬리를 넣은 내장탕 냄새, 양념 냄새 때문에 누그러진다. 거대한 ‘아르코 데 산타 마리아’ 문 옆에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는 이빨 빠진 노파가 한 그릇 먹고 가라며 인심을 쓴다. 음식을 먹고 나니, 당나귀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술이 눈에 띈다. 술집보다 가격이 더 싸다. 그리고 인파에 떠밀려서 거인에서 곡예사까지, 낱장으로 파는 할렐루야 그림, 알루세마스에서 악마에 씌운 여자가 돼지새끼를 낳은 섬뜩한 사건을 천연색으로 그린 그림을 구경한다. 어떤 사람은 아프지 않게 어금니를 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말하고, 환자가 피를 보지 못하도록 붉을 천을 두른다. 조수는 사람들이 비명소리를 못 듣게 옆에서 큰북을 친다. 볼로냐 비누를 파는 사람도 있고, 동상에 바르는 고약이나 몸에 좋은 약초뿌리나 상처에 바르는 약초를 파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딜 가나 음식 튀기는 소리가 타닥거린다. 어설픈 피리소리도 들린다. 엉덩이로 다니는 불구자가 조끼에 모자까지 씌운 개를 데리고 다니며 동냥을 달라고 한다.

       이렇게 떠밀려가며 구경하는 일에 지친 순례자 후안은 벤치에 앉아 있는 맹인들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들은 아메리카 하르피아의 장엄한 이야기를 노래한다. 넓은 산맥과 복잡한 사막에서 지저분한 둥지를 틀고 살며, 악어와 사자도 무서워하는 괴물이다.


유럽인이 엄청나는
돈을들여 하르피아
구입하여 유럽으로
돌아올제 말타에서
하선하여 그리스로,
콘스탄티노플 거쳐
타르키아 주유할때
하르피아 주는음식
거부하고 몇주일후
울부짖고 죽었다네.

합창:
섬뜩하게 생긴괴물
하르피아 최후라네.
괴물이란 괴물들은
태어날때 죽었으면.


       뒤쪽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동냥을 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면서 맹인들이 천출의 설움을 털어놓는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그들 뒤에 있던 또 다른 맹인들이 길을 막는다. 무어인들이 양으로 가장하고 쿠엔카로 쳐들어온 사건을 공연하는 꼭두각시 극 무대 근처에 있던 맹인들이다.

       아메리카 하르피아 노래가 끝나자 후안은 하우하 섬 이야기에 매료된다. 피사로가 페루 왕국을 점령한 이래, 소문이 난 섬이다. 여기서 맹인들 노래는 찢어지는 소리가 덜 난다. 한 사람이 그냥 지나치는 여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동안,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 키 큰 우두머리 맹인을 툭 치자 기다란 손톱으로 비우엘라를 치면서 마지막 구절을 부른다.


집집마다 금은으로
애써만든 정원있고
부귀선물 넘치나니
이얼마나 놀라운가.
네귀퉁이 높고높은
삼나무가 우뚝솟아,
첫번째는 메추리를
두번째는 칠면조를
세번째는 집토끼를
네번째는 닭을치네.
네삼나무 발치에는
꽃만발한 연못있고
8레알과 4레알짜리
금화가득 차있다네.


       이제 맹인은 선원 모집인에게 꾸러미를 받으려고 잠시 노래를 멈추더니 비우엘라를 깃발처럼 높이 쳐들고 시장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마무리한다.


기사양반 힘내세요
귀족양반 힘내세요
마음착한 가난뱅이
희소식을 들어보소
놀라웁고 신기한것
보고싶은 사람이여
세비야서 배열척이
한꺼번에 떠난다오


       청중들이 다시 몰려든다. 노래하는 맹인들은 다시 한번 욕을 퍼붓는다. 후안은 골목길 끝으로 밀려나는데, 허풍쟁이 인디아노가 쿠스코에서 가져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짚을 채운 악어 두 마리를 내놓는다. 어깨에는 원숭이가 앉아 있고, 왼손에는 앵무새가 앉아 있다. 커다란 분홍색 고동을 불자, 빨간 상자에서 성찬극의 사탄 같은 흑인노예가 나오더니 조악한 진주 목걸이와 두통을 낫게 하는 돌과 비쿠냐 털로 만든 목도리와 싸구려 귀걸이를 비롯해서 포토시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를 내놓는다. 흑인노예는 웃을 때, 끝을 이상하게 갈아놓은 치아와 뺨에 그어진 칼자국이 드러나는데, 탬버린을 잡고 허리를 돌리며 희한한 춤을 춘다. 어찌나 노골적인 동작인지 내장탕을 파는 노파까지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구경하러 온다. 그러나 그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모두들 처마 밑으로 달려가 비를 피한다. 꼭두각시를 망토로 감싼 꼭두각시극 연희자, 지팡이를 든 장님들. 그러나 돼지새끼를 낳았다는 할렐루야 그림 속의 여자는 비에 젖는다.

       후안은 여관 현관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카드판을 벌이고, 지독히도 술을 마신다. 흑인노예가 수건으로 원숭이를 닦아주는 동안 앵무새는 술통에 앉아 졸고 있다. 인디아노는 포도주를 시키고 순례자 후안에게 허풍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인디아노의 허풍에 경각심을 늦추지 않던 후안은 허풍이 사실이 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악할만한 괴물 아메리카 하르피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크게 울부짖으며 죽었다. 하우하 땅은 ‘론고레스 데 센틀람 이 데 고르가스’라는 운 좋은 대장이 진짜로 발견했는데, 연못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인디아노는 페루의 금이나 포토시의 은으로 허풍을 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곤살로 피사로가 애마의 말발굽에 금편자를 박았다고 허풍을 치지도 않았다. 갤리선이 보물을 가득 싣고 세비야에 도착했을 때, 왕실선단의 회계사들이 인디아노를 알아본 것으로 충분했다. 술기운에 거나해진 인디아노는 뒤이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경이로운 일을 이야기한다. 기적을 일으키는 샘물이 있는데, 아무리 등이 많이 굽고 손발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청춘을 되찾아 머리칼이 까맣게 변하고 주름살이 없어지고 뼈마디가 건강해지고, 아마존 전사의 무기를 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해진단다. 플로리다의 호박(琥珀) 이야기도 하고, 푸에르토비에호에서 또 다른 피사로가 본 거인상도 이야기하고, 인디아스에서 발견된 해골의 치아는 굵기가 손가락 세 개만하며, 귀는 하나뿐인데 후두부 정중앙에 달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덧붙여, 하우하와 유사한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모든 게 금이며, 심지어 이발사의 대야, 국그릇, 냄비, 마차 바퀴, 등잔까지도 금이었다.

       “거기 사람들은 연금술사가 아닌데도 그렇다는 말이죠!” 순례자 후안은 감탄한다. 그러나 인디아노는 술을 더 주문하고, 인디아스의 금이야말로 대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설명한다. 이제 수많은 배가 금괴, 황금 잔, 금가루, 금광석, 금 동상, 보석을 실어오기 때문에 모레이노, 라이문도, 아비세나를 공부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은, 묘약, 태양과 달의 대합일, 이극광(異極鑛), 놋쇠와 같은 연금술 연구를 포기했다. 현재 연금술은 용광로 없이는 양질의 금을 만들 수 없으며, 만든다고 하더라도 보통 크기의 방에 사람 손이 닿을 정도의 높이까지 쌓아올릴 만큼 많은 금을 만들 수 없다.

       밤이 되자 인디아노는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거나하게 취해서 숙소로 들어가고, 흑인은 원숭이와 앵무새를 데리고 마구간으로 올라간다. 순례자 후안도 연기 속에서 지팡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가끔은 휘두르며- 마침내 교외의 골목길로 접어든다. 그곳에서 어떤 여자는 어깨망토에서 떨어지려고 덜렁거리는 성스러운 가리비껍질에 키스를 하는 조건으로 순례자 후안을 자기 침대에서 재워준다. 이 밤 도시에 드리운 수많은 구름이 은하수를 뒤덮어버린다.



V


       이제 후안은, 누구 들으라는 듯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저기 사도 야고보와 감방에서 채운 족쇄와 참수한 도끼가 있었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숙식과 보리빵을 곁들인 양배추 요리를 먹을 수 있고, 또 특전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후안은 여전히 수도복을 입고 어깨망토를 걸치고 호리병박을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실제로 호리병박에는 술만 들어 있다. ‘프랑스 순례길’은 아주 멀리 있었다. 그 대신 시우다드레알을 지날 때는 3일 동안 스페인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주를 실컷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이 뭔지 모르게 조금 변한 것 같다. 플랑드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들 세비야에서 들리는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살아간다. 곁에 없는 자식 소식도 듣고, 대장간을 카르타헤나로 옮긴 삼촌 소식도 듣고, 세관 신고를 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은 은을 압수당했다는 소식도 듣는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도 있다. 석공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난한 양반은 말과 하인들을 데리고 떠났다. 이제 광장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티에라피르메 근처의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할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여관과 숙박소는 여행객으로 만원이다.

속죄복 - X형 십자가를 카리켜 산안드레스 십자가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가리비를 방위반과 교환한 순례자 후안은 세비야 무역관에 도착한다. 한때 순례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 같고, 이제는 해체된 극단의 배우처럼 보인다. 돈이 없기 때문에 의상 궤짝에서 무단으로 소극의 바보 의상, 비스카야인의 팬티, 빌라도의 갑옷, 이탈리아 코미디에서 사랑에 빠진 목동 아르카디오의 모자를 꺼내 착용한 것 같다. 차츰 여기저기서 바지와 망토를 마련하고, 어깨망토와 신발을 바꾸고, 헌옷 장수와 흥정하면서 후안의 복장은 화려해졌고, 과거에 순례자였다는 흔적도, 이탈리아 보병대의 병사였다는 흔적도 전혀 남지 않았다. 선원이 되고 싶은 뜻은 없었다. 까닭인즉, 요즘 세상에 코르테스식의 무력 정복은 그다지 득이 될 게 없다고 인디아노가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디아스에서 필요한 것은 예리한 감각, 재빠른 상황판단, 남보다 앞서 날고 기는 재주, 왕의 칙령이나 학자의 비난이나 주교의 질책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배짱이었다. 그곳에서는 종교재판도 유화적이었다. 신앙에 관해서 거의 무지한 수많은 원주민과 흑인을 상대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격하게 처벌한다면 속죄복을 입고 다닐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고해에서 성관계를 요구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제들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열대지방에서는 우발적인 충동에 대해서 정상을 참작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종교재판소는 애초부터, 완고하고 부정적이고 사소하고 뉘우침이 없고 거짓으로 맹세하고 횡설수설하는 이단자 색출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럴 장작불이 있으면 초콜릿 컵이나 데우기로 했다. 또한 아메리카에는 루터교회나 유대교회당이 없기 때문에 종교재판소는 늘어지게 시에스타를 즐겼다. 흑인노예들은 때때로 ‘악마의 발톱’ 냄새가 나는 목각상 앞에서 북을 두들길 수 있었다. 설령 목각상에 빵을 먹이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사제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을 것이다. 성가신 일은 종이, 문서, 책에 붙어서 들어오는 이단이었다. 이처럼 원주민과 흑인노예들은 성수(聖水)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도 돌아서면 우상을 숭배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광산이나 농장의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4복음서의 가르침은 모닥불이나 피우는 마른 포도덩굴처럼 여겼다.

       이렇게 풍부한 경험 덕분에 호감을 산 인디아노는 후안을 세비야 밧줄공에게 소개했다. 짚으로 만든 매트리스와 야전침상이 가득 찬 작업장이 숙소였다. 숙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후안과 마찬가지로 누에바에스파냐 선단의 승선 허가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대의 범선은 5월에 신바람난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산루카르를 떠날 예정이다.

       후안은 세비야 무역관 승선명부에 ‘안트베르펜 출신 후안’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유는 약속을 이행한 후에 플랑드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명단 앞뒤로는 타라고나 주교의 노예 호르헤와 자기는 이단으로 화형당한 사람의 손자도 아니고 재입교자의 자식도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떠벌이고 다니는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그 밖에 여왕의 피혁제조인, 하코메 데 카스테욘이라는 제노바 상인, 여러 명의 성가대지휘자, 폭죽제조자 두 명, 산타마리아 델 다리엔의 주임사제와 시종 프란시스키요, 접골사, 성직자들, 학자들, 개종한 기독교인 세 명, 피부색을 ‘구운 배(梨)’로 명기한 루시아라는 여자도 명단에 있었다. 구운 배니, 안 구운 배니 하고 피부색의 색조를 구별하여 신상 특징으로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안은 미로 같은 안달루시아를 돌아다니는 동안 깜짝 놀랄 정도로 다양한 피부색을 보았기 때문이다. 출항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담뱃잎 색깔의 흑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청처럼 시커먼 흑인도 있었고, 가지색깔의 흑인도 있었다. 파라쿰베를 부르는 모레노 여자, 거무튀튀한 기네아 여자, 소팔라의 물라토 여자들뿐만 아니라, 이 출항 전야에는 스페인 왕실과 협의를 위해 출장 온 고위사제나 대장의 수행원으로 조국으로 돌아가는 원주민도 많이 눈에 띄었다. 과테말라 합창단 지휘자도 승선할 것인데, 올리브 색깔의 하인 3명을 데려왔다. 하인들은 수를 놓은 띠로 이마를 동여매고, 무지개 색깔의 두꺼운 모직 담요를 판초처럼 머리에 둘러쓰고 있었다. 이 원주민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슨 이교를 믿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기독교인다운 생각보다는 말없는 항의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스파뇰라 섬의 원주민들도 있었고, 하얀 바지를 입은 유카탄 반도 사람들도 있었고, 또 둥근 머리, 튀어나온 입술, 숫 많은 머리칼을 사발 모양으로 깎은 티에라피르메 사람들도 있었고, 가끔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저택에서 일하던 멕시코인 8명까지 미사에 나타났다. 이 멕시코인들은 살라만카에서 거행된 도냐 마리나와 펠리페 왕자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현란한 솜씨로 치리미아를 연주했다. 저 시끄럽고 희한한 사람들 가운데는 번쩍거리는 옷과 요란한 장신구와 깃털로 장식한 알제리의 환관과 얼굴에 낙인이 찍힌 무어인 여자 노예들도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어마어마한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염장 식품과 선박수리용 역청도 눈에 띄었고, 백포도주를 파는 바에서는 정어리가 나왔으며, 시도 때도 없이 주사위판이 벌어지고, 악마에 들씌운 듯한 사라방드 춤판도 벌어졌다. 사라방드 춤은 승선 계약을 하고 체류하던 집에서도 추었다. 그때 선원들은 습관적으로 거무스름한 풀을 씹었다. 노란 침이 나왔고 턱수염에서는 감초 같기도 하고 식초 같기도 하고 향신료 같기도 한 복잡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이제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바다 한가운데 있다. 멕시코에 들를 수는 없었다. 인디아스 자문회의는 프랑스 해적이 약탈하거나 노동력이 부족하거나 원주민들이 광산에서 수없이 죽어나가서 피폐해진 지역에 사람들을 이주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후안은 이런 소식을 듣자 욕설을 뱉으며 발길질을 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내린 징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때 부르고스의 시장에서 만난 인디아노가 선실에 나타나서 일단 대서양을 건너면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인디아스 자문회의 관리들의 말을 무시해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전에도 그랬는데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을 뿐이란다.

       그 말에 마음이 놓인 후안은 최하층 갑판에서 돼지들 경주가 있을 것이라고 북을 치며 갑판을 돌아다닌다. 경주 후에 요리사들은 돼지를 잡아 소금에 절일 것이다. 사람들은 지겹도록 잔잔한 바다에서 소일거리를 찾고 싶어서, 또 물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잊고 싶어서 돼지나 송아지를 잡기 전에 경주를 벌인다. 뒤이어 물총에 바닷물을 넣어 싸움도 하고, 이리저리 날뛰는 개꼬리에 몽둥이를 묶어서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 머리통이 깨지고, 안대로 눈을 가리고 송판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어 맨 닭 모가지를 단칼에 자르기도 한다. 이런 짓도 지겨워지고, 키놀라나 렌토이 카드 놀음판에서 돈 임자가 골백번도 더 바뀔 때쯤이면 열병환자가 생기고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생긴다. 쥐가 갉아먹은 비스킷을 입안에 넣는 사람도 있고, 송장이 되어 뱃전에서 내던져지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커먼 흑인 여자는 쌍둥이를 낳는다. 여기저기서 구토를 하고, 몸을 긁고, 똥물까지 토해낸다. 그래서 이제는 벼룩이나 때나 악취를 더 못 참겠다 싶을 때, 어느 날 아침 망루대 파수꾼이 아바나의 모로 성이 보인다고 소리친다.

       도착시각이다. 후안은 며칠 전에 날치를 보고 아메리카 하르피아와 하우하 땅을 만날 좋은 징조라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행운을 잡기 위한 힘겨운 항해에서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다. 겹겹이 쌓인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으로 보아 시가지가 틀림없는 곳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종탑을 보자 마음이 놓인 후안은 북채를 들었다. 그리고 옛날 안트베르펜의 겨울 병영을 점령하고 우리들의 성스러운 종교의 적인 이단자들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중대가 행진할 때처럼 할 때처럼 행진곡 박자로 북을 울린다.

카리브 해



VI


       그러나 털도 없는 검은 돼지들이 항상 진흙범벅인 8개 거리에서 주둥이로 오물더미를 미친 듯이 파헤치는 그곳에서는 모든 게 험담이고, 악담이고, 말장난이고, 오가는 편지이고, 섬뜩한 증오이고, 끝없는 질투이다. 누에바에스파냐 선단이 귀환할 때마다 선주들에게 문서를 맡기고, 편지를 맡기고, 헛소문을 맡기고, 모략을 맡긴다. 그리하여 저쪽에서 지인을 깎아내리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전달한다. 성격을 고약하게 만드는 더위와 모든 것을 썩게 만드는 습기와 모기떼와 사람 발톱 밑에 알을 낳는 모래벼룩과 하찮은 이문 앞에서도 ―저쪽에서는 큰 이문 앞에서만 그러했는데― 솟아나는 원망과 질투는 영혼을 갉아먹는다. 글을 아는 사람은 고대인처럼 육체의 즐거움을 위한 목가의 창작과 같은 유용한 글을 쓰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쓸개즙에 적신 펜으로 국왕에게 불평이나 털어놓고 인디아스 자문회의에 쓸데없는 험담이나 전한다. 식민지 총독은 8장짜리 편지로 왕실에서 파견된 관리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시도하고, 주교는 시의회 의원이 불륜을 저질렀다고 고발하고, 감독관은 주교가 톨레도의 추기경이 승인하지도 않았는데 종교재판관 노릇을 한다고 비판한다. 공증인은 회계사가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시장의 친구인회계사는 공증인이 악덕 사기꾼이라고 맞받아친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 약자 중의 약자나 이방인 중의 이방인에 이르러서 끝난다. 이방인은 흑인 주술사에게서 애호하는 약초를 구입했다고 고발을 당하고, 결국에는 카르헤나 데 인디아스로 보내 매질을 한다. 광고인은 계간을 했다는 소문 때문에, 농장주는 왕실 토지의 경계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성가대 지휘자는 호색한이라는 이유로, 포병은 술주정꾼이라는 이유로, 교회의 속관(屬官)은 비역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벌받는다. 마을 이발사가 ―쳐다보기만 해도 해를 끼친다는 사팔뜨기다― 불명예 사슬의 맨 끝자리를 차지한다. 전임 총독의 부인 도냐 비올란테가 노예들과 부정직한 거래를 하는 백여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안은 아바나라는 이 지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버터냄새를 풍기는 나보리 원주민과 담비 냄새를 풍기는 흑인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이 지상의 왕국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삶을 영위한다. 아, 인디아스여!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멕시코나 이스파뇰라 섬에서 선원들이 도착할 때면 신바람이 난다. 그러면 며칠 동안은 한 때 병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육점에서 갈비를 훔쳐 베라크루스에서 가져온 빨간 아치오테를 뿌려서 구워먹는다. 아니면 여러 사람과 함께 생선가게 문을 부수고 들어가 광주리에 도미와 담수 거북을 훔쳐온다. 그 몇 달 동안 맛있는 음식이 없어서 후안은 토마토, 고구마, 선인장 열매의 맛을 알게 되었다. 코로 담배연기를 가득 뿜어대고, 궁핍에 시달릴 때는 당밀에 만디오카 가루를 섞어서 먹고, 나중에는 그릇에 붙은 것까지 혀로 핥아먹는다. 선단의 승무원들이 상륙할 때는, 선박수리소 옆에 허름한 침대를 들여놓고 술장사를 하는 시커먼 흑인여자들과 정신없이 춤을 춘다. 춤 상대로는 지독히도 못생긴 얼굴이지만 여자가 너무 귀하다. 후안은 성체행렬이 눈에 들어와도 선두에 서서 북을 치고 싶은 의욕도 없고, 연중행사 때마다 마라카스를 연주하는 삼보 여자들과 합주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빵가게 옆, 총독 친척의 포도주 창고에서 세월을 보낸다. 오후가 되면 종종 적포도주가 들어오는데, 맛이 형편없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시우다드레알의 포도주는 물론이고 리바다비아나 카사야의 포도주 얘기는 꺼낼 수도 없다. 혀를 적시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포도주는 신맛이 나는데다, 이 섬으로 들여온 모든 것이 그렇듯이, 비싸기까지 하다. 후안의 옷은 썩어가고, 무기는 녹이 슬고, 서류는 곰팡이가 슨다. 그리고 까마귀가 길에 떨어지면 머리가 벗겨진 검은 독수리가 5월 십자가 축일 때 십자가에 걸쳐놓은 긴 천 같은 내장을 쪼아 먹는다. 아바나 만에서 바닷물에 빠진 사람은 요나의 고래만큼 거대한 물고기, 입이 목에서 배까지 찢어진 물고기, 여기 사람들이 상어라고 부르는 물고기에게 잡아먹힌다. 칼자루만한 크기의 거미도 있고, 길이가 여덟 뼘이나 되는 뱀도 있고, 전갈도 있고, 수많은 전염병도 있다. 마침내,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신 포도주에 취하면 이 추잡한 땅으로 가라고 권한 인디아노를 개자식이라고 욕을 한다. 황금도 얼마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이미 오래전에 소수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후안은 초라한 자기 신세한탄만하며 살다보니 무더위에 몸이 망가지고, 계늑부가 부어오르고, 피부는 붉은 모래가루처럼 변했다. 또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이 나 이웃하고 툭하면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싸구려 술에 거나해진 후안은 주사위판 속임수 때문에 제노바 사람 하코메 데 카스테욘과 싸움을 하고, 하코메는 휘두른 칼을 맞고 피범벅이 되어 내장탕 그릇 위로 쓰러진다. 치마를 입으며 방에서 뛰쳐나오는 흑인 여자들의 비명소리에 놀란 후안은 하코메가 죽었다고 여기고, 나무 말뚝에 매어있던 말을 타고 조선소 길을 따라 급히 시내를 빠져나간다. 밤새 달려, 날이 새자 야자나무로 뒤덮인 푸르스름한 언덕을 향해 도주한다. 저 너머로 가면 산이 길을 막기 때문에 총독부의 처벌을 피할 게 틀림없다.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몇날며칠이고 말을 달린다. 갈수록 길이 험해져 여윈 말의 편자가 빠진다. 이제 사탕수수 밭도 멀어지고, 오른편에서는 잡초로 만든 담요를 덮고 잠든 큰 개처럼 보이는 둥근 언덕으로 이루어진 산맥이 펼쳐진다. 폭포수에 씨앗과 썩은 과일이 떠내려 오고 물웅덩이에서는 말랑가가 자라며 검은 눈의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시내를 따라서 도망자 후안은 보라색 꽃이 만발하고 더러는 나무 가지에서 들끓는 벌레 때문에 몸살을 앓는 나무들이 자라는 곳으로 올라간다. 양파 껍질 같은 옷을 입은 관목도 있고, 큰 쥐가 보금자리를 튼 나무도 있다. 후안은 판야나무에 말을 매어두고 커다란 바위산을 기어올라 산맥의 능선에 이른다. 반대편 사면으로 내려가니 덤불이 사라지고 발밑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파도도 포말도 죽어버린 바닷물은 해안 동굴을 소리 없이 공격하는지 자갈 구르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온다.

       오후에 후안은 조개로 뒤덮인 해안에 있다. 무지개 색깔의 조개껍질은 고슴도치 껍질, 황금색 사과, 커다란 구아모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난다. 후안은 미풍에 실려 오는 짭짤한 바다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출발하던 날 산루카르 항구에서 밀려오던 바다 냄새와 안트베르펜 다락방 아래에 있던 생선 가게 냄새가 생각난다. 눈에 눈물이 괸다. 야자나무 뒤에서 개가 짖는다. 도망자 후안이 뒤를 돌아보니, 낯선 털보가 화승총으로 겨누고 있다.

       “나는 칼빈파야!” 털보가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난 살인을 했어!” 도망자 후안은 이렇게 대답하고 방금 전에 흉악한 범죄를 고백한 털보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털보는 총을 내리고 잠시 후안을 쳐다보더니 골로몬을 부른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흑인이 후안 바로 위의 나무에서 내려와 모자를 푹 눌러 씌운다. 어찌나 힘이 센지 모자 속에서 꺾어진 나뭇가지가 느껴진다. 펠트모자가 눈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후안은 그들을 따라 더듬더듬 걸어간다.



VII


       무자비한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는 플로리다에서 600명이나 되는 칼빈파 목을 잘랐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털보는 분노에 차 커다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때 골로몬은 저쪽에서 마체테를 숫돌에 갈고 있다. 르네 드 란도리에르의 동료인 털보는 간신히 학살의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 때 함께 도망친 30명은 이스파뇰라 섬에 가려고 뿔뿔이 흩어졌다. 기독인을 해치기 위해 신성모독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털보는 목을 자르는 장면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목을 자를 때 이가 빠진 칼날은 반밖에 안 들어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톱질하듯이 썰어야 했다. 도끼로 척추를 빠갤 때는 정육점에서 뼈 자르는 소리가 났다.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머리를 거머쥐고 미간을 찌푸린다. 아무리 스페인적인 아닌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이기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처벌은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곳에서 그 희생자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 한번 칼로 내려친 다음에는 끌고 가면 왼쪽 어깨에서 목이 달랑거렸다. “그러면 이미 목이 없어져 술자루처럼 변한 몸뚱이가 슬그머니 그 목을 붙이려고 했지.” 분노한 털보의 이야기다. 털보는 자기 말에 대들면 골로몬을 시켜 그 자리에서 마체테로 목을 잘라버릴 기세다.

       그러나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시치미를 떼고 그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플랑드르에 있을 때 여자들을 산채로 묻거나 수백명의 루터교도 화형식을 목격했다. 심지어는 화형대 장작더미 쌓는 일과 프로테스탄트 여자를 구덩이에 떠미는 일까지 도와주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은 털보와 다르다. 그 때문에 후안은 그날 오후가 일생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동안 이 신세계에서 살았지만 생활은 한심하고 비참했다. 이 세계에서는 쟁기가 참신한 발명품이고, 무엇이 밀 이삭인줄도 모르고, 말이 신기한 동물이고, 피혁 공장은 난생 처음 보며, 올리브 열매와 포도를 보석으로 여긴다. 또한 종교재판소는 성자를 진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흑인들과 이들이 섬기는 우상을 용인하고, 아직도 아레이토를 부르는 메스티소를 보호하며, 사제들의 거짓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제들은 원주민 여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오두막으로 데려가고, 아홉 달 후에는 악마의 입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듣는다. 저기 구세계에서 신학과 계시와 육화의 문제로 서로 싸운다고 할지라도 그게 훨씬 더 좋게 보인다. 알바 공작이 털보를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면 좋겠다. 구세계에서 이단세력은 “가톨릭의 우두머리” 혹은 “대낮의 악마”라고 부르는 펠리페 국왕에 대항하여 여러 지방에서 봉기를 획책하고 있으므로 화형이 최선의 정책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도망친 노예들과 함께 산다. 후안 또한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도망자 신세다.

       저 칼빈파는 주교가 돈을 벌려고 금박을 입힌 성체현시대를 순금이라고 속이고 대교구에 팔았으며, 설상가상으로 판매대금을 황금으로 받았다고 폭로했기 때문에 아바나에서 도망쳐야 했고, 그 후로는 유대인개종자와―아직 세례가 무언지도 모르는 신참 기독교이다― 함께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칼빈파와 유대인개종자와 함께 사는 후안은 총독의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고, 또 인간의 온기는 물론 여자의 온기까지 느낄 수 있다. 골로몬이 노예들을 이끌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도망친 덕분이었다. 그때 수많은 노예들은 개에게 붙잡히고, 뒤이어 노예사냥꾼에게 끝장이 났는데도 여자들은 계속 도망쳐 산에 도착했다. 이렇게 하여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흑인 여자 두 명에게 시중을 받고, 몸이 원할 때는 쾌락도 누린다. 몸집이 아주 크고, 젖가슴도 큼직해서 젖꼭지에 골이 8개나 파인 여자는 이름이 도냐 만딘가이다. 작은 여자는 엉덩이가 합창대 의자처럼 툭 튀어나왔는데, 머리털이 숱이 거의 없다. 기독교 여자라면 양모가발을 썼을 것이다. 이름은 도냐 욜로파다. 도냐 만딘가와 도냐 올로파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나무꼬챙이로 물고기 아가미를 꿸 때에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이렇게 멧돼지나 사슴 고기를 육포로 만들고, 옥수수를 처마 밑에 말리면서 어제나 내일이나 다를 바가 없어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세월을 살아간다. 나무는 일년 내내 잎이 무성하며,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잰다. 해가 떨어지면 적막감이 도망친 노예공동체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도망친 노예공동체       각자는 무언가를 회상하고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 같다. 흑인 여자들만이, 마을 냄새를 풍기는 구름처럼 고요한 바다 위를 떠도는 장작 연기 속에서 노래한다. 안트베르펜의 후안은 죄사함과 육신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확신이 설 때 모자를 벗고 파도를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주기도문을 읊고, 사도신경을 외운다. 칼빈파는 저쪽에서 제네바 성경을 중얼거린다. 유대인개종자는 도냐 욜로파와 도냐 만딘가의 벌거벗은 육신에 등을 돌리고 울음을 참는 듯한 어조로 시편을 읊조린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달이 높이 솟고, 도망친 노예 공동체의 개들은 해변에 앉아서 합창으로 짖는다. 바다는 해안 동굴에서 자갈을 굴리고 있다. 기도가 끝난 후, 유대인개종자는 카드판에서 칼빈파가 속임수를 썼다고 폭로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주먹질을 하고 붙잡고 넘어져 뒹굴면서 서로 칼을 달라고 하지만 아무도 칼을 주는 사람은 없다. 얼마 후, 웃으면서 화해한 세 사람은 귀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낸다. 돈이 없기 때문에 조개껍질로 판돈을 건다.



VIII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세어보지 않아 정확히 몇 달인지는 모른다― 후안은 무기력증을 앓는다. 도냐 욜로파와 도내 만딘가는 부채질을 해주면서 인근 만글라르 숲에서 날아온 작은 파리도 쫓아낸다. 원주민들이 해안 동굴에서 횃불로 잡은 싱싱한 생선을 가져온다. 안트베르펜의 고수(鼓手) 후안은 몇 시간 동안 뼈로 만든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면서 기수와 나팔수와 회양목 피리 연주자와 함께 도시에 입성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가 발을 내딛으면 덧문에 하트 무늬를 새겨 넣은 초록색 창문이 열렸고, 꽃무늬 창턱에서 내다보는 여자들은 슈미즈 레이스 아래로 가슴살을 드러내려는 듯이 보였다. 이탈리아 여자도, 카스티야 여자도, 플랑드르 여자도 모두 그랬다. 여기서 암컷으로 여기는 흑인여자들의 양가죽 같은 피부는 아니었다. 이 여자들 몸에서는 그읆 냄새가 나고, 너무 단단해서 꼬집을 수도 없었다.

       알칼라의 옛 학생으로 통하는 후안은 시커먼 여자들하고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배운 것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막대기로 조악한 북을 치면서 기괴하고 반복적인 노래를 부른 것이 전부였다. 두 여자가 탬버린을 흔들며 레스폰소리움 방식으로 노래를 시작하고 골로몬이 목청을 다듬고 합창으로 가세하면 ‘학생 후안’은 싫은 기색을 내보이며 개를 데리고 산으로 갔다. 왜 학생이냐면 후안은 자기가 학생이었다고 칼빈파 털보와 유대인 개종자에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 학교에서는 4학 이외에도 테클라, 하프, 비우엘라의 악보 읽는 법, 조바꿈과 박자 바꾸는 법을 비롯해서 그레고리안 성가와 오르간 연주까지 배웠다고 말했다. 저 해안에는 테클라도 비우엘라도 없었기 때문에 후안은 말과 허밍으로 파반느를 어떻게 변주하는지, 또 지금 궁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프랑스식이나 이탈리아식의 장식음과 꾸밈음으로 《콘데 클라로》나 《미라메 코모 요로》의 선율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드는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지식 자랑과 더불어 도망자의 출생신분 또한 높아졌다. 비록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품위를 지키며 사는 귀족 가문의 후손이 되었다. 생가를 허물지 않았기 때문에 현관에서 보면 저쪽에 ―저 나무가 있는 곳쯤이라고 해서 모두들 그곳에서 쳐다봤다― 산일데폰소의 제국대학 건물 정면이 보였다. 고수는 학생시절의 여러 가지 일과 사건을 자세하게 들려주었고, 날이 갈수록 허풍이 심해졌다. 어느 날 병사가 되었을 때는 집안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그의 선조는 샤를마뉴 대제가 위업을 이룰 때 활약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거창한 족보를 들먹이자 바지락, 형편없이 요리한 거북, 칼빈파 털보가 훈제로 만든 고기만 먹고 사는 생활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입맛은 포도주가 먹고 싶어 안달이었다. 마음은 이미 포도주 창고에 가 있었으며, 거대한 식탁에 차려진 메추리, 닭, 칠면조, 송아지 앞다리, 구멍이 크게 뚫린 치즈, 튀김 요리, 닭 가슴살 요리, 알카리아 산 꿀이 떠올랐다.

       그러나 저 도망친 노예공동체에서 힘없이 축 늘어진 사람은 후안만이 아니었다. 노예사냥꾼 손아귀에서 벗어난 흑인들과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애를 낳는 여자와 암캐들 사이에서 편하게 살고 있었다. 반면에, 유대인 개종자는 톨레도의 유대인 구역을 상상했다.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각자는 음악소리 드높은 결혼식에서 흥을 돋우거나 랍비가 읽어주는 율법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집마다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 개종자는 눈을 감고 좁은 골목길을 떠올린다. 등잔을 파는 가게와 푸줏간이 보이고, 그 옆으로 설탕에 절인 자몽과 아몬드를 넣은 로스카 빵과 파이를 파는 제과점이 있었다. 개종한 기독교도인 부모님은 여전히 자식들에게 토라를 가르치고 손일을 가르치라는 유대의 율법을 준수했다. 이리하여 학문과 일을 고루 잘하지 못한 사람은 사촌 모세처럼 합창대 일꾼이 되거나, 이삭 알판다리처럼 트럼프를 그리거나, 사촌 마나엔처럼 유명한 세공사가 되거나, 친척인 랍비 유다처럼 의사가 되었다. 상갓집에서 곡을 해주는 유대인 여자들은 돈을 받고 기독교인 장례식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사무실과 가게에서는 항상 주판알 떨어지는 아름답고 잔잔한 음악이 울렸다.

       유대인 개종자는 유대인 거리를 그리워하고, 칼빈파 털보는 파리를 그리워한다. 사람들은 털보가 강변 출신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사실은 루앙에서 태어났다. 샤틀레에 8일 동안 머문 게 전부였다. 장작을 실어 나르는 바지선 견습선원이었다. 그러나 8일이면 아름다운 다리 위에서 희극을 공연하는 희극단을 보고, 몽포송의 교수대 밑에서 사람들의 허영을 생각해보고, 막달레나와 물라의 술집에서 포도주를 맛보는 데 충분했다. 털보는 파리 같은 곳은 없다고 확언한다. 그리고 해충이 가득한 이 폐허의 땅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기꾼에게 속아 헤아릴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잘 익은 밀 이삭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금을 찾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털보는 금발여자 얘기도 하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사이다 얘기도 하고, 포도덩굴 모닥불 위에서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는 거위 얘기도 한다. 끝으로 골로몬을 게으르다고 나무라고, 벌겋게 달군 낙인으로 육신을 욕보인 혈통에 대해서 모호하게 얘기한다.

       모두들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다. 흑인 골로몬은 고국을 생각한다. 급류로 혼탁해진 아주 넓은 강이 있고, 이 강변에 흙벽돌집이 있었다. 그리고 깃털 왕관을 쓴 아버지는 백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녔다는데, 축제 기간에 세비야의 알라메다 거리를 메디나 시도니아 가문 사람들이 다니는 모습과 비슷하다. 모두들 씁쓸하게 회상하면서 마른 야자열매를 굴리는 게 사이를 다니며 반쯤 포도맛이 나는 해변의 나무에서 보라색 열매를 딴다. 이 열매로 옥수수 술과 만디오카에 질려버린 입맛을 돋우려는 것이다. 비록 입맛 때문이기는 하지만 모두들 현실성이 없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벌레가 날아들면 현실로 돌아온다. 시커먼 모기떼가 귓전에서 앵앵거리며 몰려들자 후안은 성질을 내고,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뺨에 붙은 모기를 때려잡으니 새빨간 피가 터진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오한이 든다.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하고 가슴은 불덩이처럼 뜨겁다. 도냐 욜로파와 도냐 만딘가는 약초를 구하러 산으로 간다. 어떤 여자들은 산신령에게 빌기도 하는데, 이 산신령은 법도 기본도 없는 이 땅의 또 다른 악마적 존재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탕약을 먹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몸이 가뿐해지를 바라며 잠이 들었는데, 무서운 꿈을 꾼다. 해먹 앞에 돌연 하늘 위로 탑이 치솟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당이다. 꿈속에서 본 탑은 너무 높아서 종탑은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아득히 높은 곳에서 독수리는 바람을 타고 활공 비행한다. 흉조(凶兆)처럼 창공을 떠다니는 검은 십자가 같다. ‘영광의 문’ 위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펼쳐져 있다. 대낮인데도 은하수가 얼마나 새하얀지 천사들의 식탁에 깔아놓은 식탁보 같다. 후안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다가가는 자신을 본다. 혼자다. 순례자들이 모이는 도시에 이상하게도 혼자다. 가리비가 달린 수도복을 입고, 회색 돌 층계참에 지팡이를 짚고 있다. 그러나 문은 닫혀 있다. 들어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문을 두들겨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순례자 후안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흐느끼고, 지팡이를 움켜쥐고, 귀신에 들린 사람처럼 바닥에 나뒹굴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산티아고!” 순례자 후안은 흐느낀다. “산티아고!” 짭짤한 물에 갇혔는데 해변이 보인다. 그리고 정박한 화물용 범선에 태워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는 썩은 통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울어서 골로몬은 하는 수없이 후안을 칡넝쿨로 묶어서 시신을 안치하듯이 해먹 안에 내버려둔다. 눈을 뜨자 오후이다. 도망친 노예공동체가 요란하다. 버뮤다 해역에서 돛대가 쓰러진 배 한 척이 해안 앞에서 암초에 걸린 것이다. 도움을 청하는 선원들의 목소리가 미풍에 실려 온다. 골로몬과 칼빈파 털보는 카누를 바다로 밀고, 유대인 개종자는 노를 젓는다.


카나리아 제도

▲ 카나리아 제도. 테이데 화산은 테네리페(Tenerife)에 있는 화산이다.


IX


       그날 아침 동틀 녘 거대한 테이데 화산은 푸른 안개산처럼 하늘에 드리웠다. 칼빈파 털보는 국왕의 허가증을 지니고 부르고뉴를 지나 인디아스로 가는(도착하면 허가증을 보여주기로 약속했다) 기독교인 행세를 한다. 이제 곧 여정도 끝나리라고 생각한다. 그란카나리아 섬은 영국, 플랑드르와 교역하고, 칼빈파나 루터파의 대위가 장사물건을 내려도 예정설을 믿는지, 사순절에 금식을 하는지, 거금을 주고 면죄부를 사려는지 캐묻지 않는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몸을 숨기기도 쉽고, 또 섬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가는 방법도 안다. 칼빈파 털보는 후안에게 말 대신 눈짓을 보낸다. 곧 녹두와 찢은 살코기, 치즈와 염장식품에서 너무도 그리워하던 맛을 다시 발견하고 희색이 돈다. 저 도망친 노예공동체에 있을 때 얼마나 그리던 맛이던가. 도냐 욜로파와 도냐 만딘가는 비탄보다는 실망 때문에 눈시울을 적신다. 이 여자들은 노예공동체에서는 다른 흑인여자들과 달리 스페인 귀부인 대접을 받았다. 하급 귀족은 되고도 남을 만큼 명문가 자손의 정부였기 때문이다.

       후안은 산루카르에서 닻을 내릴 범선에 승선한 것만으로도 건강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산루카르에서 순례자의 지팡이와 신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데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역경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몇 주를 바다에서 보내고, 선하고 진실한 땅을 밟을 날이 멀지 않은 이제 오후에 바욘 숙박소에서 목욕을 한 후에 지낸 일을 기억하니 즐거운 기분이다. 갑자기 저기 인디아스에 체류했기 때문에 인디아노가 되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따라서 배에서 내린다면 인디아노 후안이 될 것이다.

       그때 선교(船橋)에서 뱃사람들의 소동이 들린다. 곧 상륙하니까 환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후안은 뱃사람들을 보러 달려간다. 칼빈파 털보도 뒤를 따른다. 그러나 사태는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개종한 유대인을 에워싼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어붙인다. 누군가 발을 걸어 바닥에 쓰러뜨린다. 그리고 목덜미를 붙잡아 무릎을 꿇게 만든다. “주기도문!” 개종한 유대인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주기도문을 외운 다음에 아베마리아를 외워봐.” 알고 보니 선원들은 며칠 전부터 개종한 유대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방장 말에 따르면 개종한 유대인이 주방보조라고 속이고 밀가루를 훔쳐 효모를 넣지 않은 빵을 구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토요일 아침 일찍 개종한 유대인을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혔다. “주기도문을 외워!” 이제 모두들 발길질을 하며 아우성이다. 개종한 유대인은 어쩔 줄을 몰라 울면서 하소연하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매듭진 밧줄로 때릴 때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하는데, 주기도문도 아니요, 아베마리아도 아니다. 도망친 노예공동체에서 하루에 세 번씩 읊던 시편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미처 끝나기도 전에 모두들 덤벼들어 발길질을 하고, 누군가는 족쇄를 찾으러 달려간다. 벌써 족쇄를 채우고 몽둥이찜질을 한다. 개종한 유대인은 생 이빨을 뱉어낸다.

       이어 선원들은 칼빈파 털보에게 몰려가서 뱃전에 몰아붙이고 루터파 해적이라고 욕한다. 칼빈파 털보는 인디아스 자문회의에 항의하겠다고 당당하게 맞선다. 선주는 한발 물러서 이제 진정하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의심을 풀지 못한 선주는 라스팔마스 법정에 부르고뉴인을 사칭하는 사람을 넘겨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인디아스 행 허가증 건이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사람들은 얼굴이 창백해진 털보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한편, 선원들은 개종한 유대인을 끌고 가면서 욕설을 퍼붓고 얼굴에 오물을 끼얹는다. 개종한 유대인은 너무 상처가 심해 발걸음마다 핏방울을 흘린다. 선원들은 개종한 유대인을 계단 아래로 집어던지고 무어라고 하소연하는 데도 해치를 닫아버린다. 전에는 무어인과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평화의 섬이었으며, 루터파 상인과 뱃사람을 모른 체 하던 그란카나리아가 ‘가톨릭 패자’ 펠리페 2세가 중시여기는 망루였으며, 라팔마 섬에 크루스베르데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가혹한 종교재판관을 파견하여 혐의가 있는 승무원은 전원 체포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종교재판소 감방은 네덜란드 선주와 영국 국교의 대위들로 만원이다. 모두들 체포되어 재판소로 넘겨진 것이다. 돛대 밑에서 붙잡힌 골로몬은 열병에 걸린 사람마냥 벌벌 떤다. 그리고 주인의 아시엔다-주인의 낙인이 피부에 선명하다-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기도할 때 왜 ‘구세주’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 말로 불렀으며, 그리스도의 목에다 유리구슬을 걸어주었는지 물을까봐 두려워한다. 후안은 순한 강아지를 다루듯이 골로몬의 등을 토닥거리며 진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 엿들을까봐 두려워 말을 하지 않지만, 종교재판소는 장작을 낭비하면서까지 흑인을 화형에 처하지는 않는다. 화형 당하는 사람은 아랍어에 능통한 박사들, 귀를 쫑긋 세운 신학자들, 개신교도나 이단의 책을 유포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네덜란드 선박이 항구에 닻을 내리면 철저하게 조사하여 『우신 예찬』, 『광기 예찬』, 혹은 이와 유사한 제목이 붙은 책을 색출해낸다.

       이미 삼위일체대축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이 날은 종교재판에 아주 적합한 날이기 때문에 인디아노 후안이 만난 개종한 유대인은 이미 검은 속죄복을 착용하고 있다. 칼빈파 털보는 빨간 실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산안드레스 십자가를 앞뒤로 새긴 노란 속죄복을 입고 있다. 두 사람은 깃발 밑에서 축복을 받은 후, 각자 당나귀를 타고, 40일간의 용서 기간을 벌기 위해 멀리서 왔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간다. 그리고 다른 이단자들과 함께, 불 속에 집어넣을 도망자들의 초상화를 높이 들고, 이글거리는 숯불로 향하리라.



X


       축제날, 막다른 골목 끝에서 인디아노 후안은 쿠스코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짚으로 채운 악어 두 마리를 큰 소리로 광고한다. 틀림없이 톨레도의 고리대금업자에게 산 것이다. 어깨에는 원숭이가 앉아 있고, 손등에는 앵무새가 앉아 있다. 커다란 분홍색 고동을 불자 붉은 상자에서 골로몬이 등장한다. 성찬극의 루시퍼처럼 나타나서 조악한 진주 목걸이와 두통을 낫게 하는 돌과 비쿠냐 털로 만든 목도리와 싸구려 귀걸이와 포토시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를 내놓는다. 흑인 노예는 웃을 때 뾰쪽하게 간 치아가 드러나고, 뺨에는 자기네 풍습대로 그어놓은 세 가닥 칼자국이 보인다. 그리고 탬버린을 들고 허리를 돌리며 춤을 춘다. 어찌나 움직임이 희한한지 내장탕을 파는 노파까지도 ‘아르코 데 산타마리아’ 문 옆에 자리 잡은 가게에서 구경하러 온다. 부르고스에서는 이미 사라반드, 기네오, 샤콘느가 유행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골로몬을 추켜세우며 신세계에서 배워온 새로운 것이 있으면 또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모두들 처마 밑으로 달려가 비를 피한다. 인디아노 후안은 후안이라는 이름의 순례자와 함께 여관 현관에 있다. 순례자 후안은 가리비 껍질을 꿰맨 수도복을 입고 시장을 돌아다녔다. 무서운 역병이 돌던 때 산티아고로 가겠다고 한 서약을 지키려고 플랑드르에서 왔다. 산루카르에서 하선한 인디아노 후안은 약속을 지키려고 순례자들의 호리병박과 지팡이를 들고 시우다드레알에서 제복을 벗어버렸다. 그 날은 후안이 장돌뱅이에게 구입한 싸구려 물건을 되팔아주려고 골로몬이 원숭이와 앵무새로 무장하고 나섰으며, 인디아스에 온 진귀한 물건이라고 광고만 하면 이틀 동안 벌어서 일주일동안 술과 여자를 맘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날이다.

       골로몬은 건장한 체격에 딱 맞는 백인여자의 살맛을 보고 싶어 안달이다. 반면에 인디아노는 합창대 의자처럼 툭 튀어나온 말 궁둥이를 가진 까무잡잡한 여자가 눈앞을 지나가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제 골로몬은 수건으로 원숭이를 닦아주고 있는데, 앵무새는 술통에 앉아 졸고 있다. 인디아노는 포도주를 시키고 후안이라는 순례자에게 허풍을 늘어놓는다. 기적을 일으키는 샘물이 있는데, 아무리 등이 많이 굽고 손발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청춘을 되찾아 머리칼이 까맣게 변하고 주름살이 없어지고 뼈마디가 건강해지고, 아마존 전사의 무기를 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해진다. 플로리다의 호박(琥珀) 이야기도 하고 푸에르토비에호에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본 거인상도 이야기하고, 해골의 치아는 굵기가 손가락 세 개만하며, 귀는 하나뿐이며 후두부 정중앙에 달렸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포도주에 얼근히 취한 순례자 후안은 그런 경이로운 이야기는 인디아스에서 온 사람들마다 하도 많이 되씹어서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인디아노 후안에게 말한다. ‘영원한 청춘의 샘’을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으며, 맹인들이 이곳에서 낱장으로 팔던 아메리카 하르피아의 로망스가 진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 사람들 관심은 오메구아 왕국에 있다는 마노아로 옮아갔다. 그곳에는 누에바에스파냐와 페루에서 싣고 온 금보다 훨씬 더 많은 금이 있다는 것이다. 이 왕국의 영역은 주술사들의 보고타에서 대자연이 남긴 보고라는 포토시를 지나 마라뇬 강어귀까지 걸쳐 있는데, 모두가 알고 있는 경이로운 세상보다 훨씬 더한 경이가 넘쳐난다. 하우하의 땅, 진주의 섬, 그리고 콜럼버스가 젖꼭지 모양의 산이 있는 곳에서 엿보았다는 저 지상낙원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들 콜럼버스가 옛날 페르난도 왕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알고 있었다. 어떤 왕국의 비밀을 안고 죽은 독일인 이야기도 떠돌아다녔다. 이 왕국에서는 이발사의 대야, 국그릇, 냄비, 마차 바퀴, 등잔까지도 귀금속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북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인디아노 후안은 순례자 후안의 이야기를 끊고, 피사로 식으로 무장을 하고 정복하는 것은 이제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일러준다. 이제 인디아스에서 필요한 것은 예리한 감각, 재빠른 상황판단, 남보다 앞서 날고 기는 재주, 왕의 칙령이나 학자의 비난이나 주교의 질책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배짱이었다. 그곳에서는 종교재판도 유화적이었다. 장작불로 이단자의 육신을 태우느니 차라리 초콜릿 컵을 데운다.

       이곳에서 울리는 북으로는 부을 얻지 못했다. 북을 치려면 저쪽에서 쳐야했다. 그곳 사람들은 이전보다 덜 싸우고도 장엄한 아시엔다를 얻게 되었으며, 의사들은 원주민 고유의 식물로 해충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고 또 부서진 뼈까지 붙인다.



XI


       다음날, 순례자 후안은 하룻밤을 같이 지낸 처녀에게 수도복에 달린 가리비껍질을 선물로 주고 세비야로 길을 잡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망각한다. 인디아노 후안은 기침을 하면서 뒤를 따라간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춥기 때문이다. 여관 침대에서 덜덜 떨 때는 도냐 욜로파와 도냐 만딩가의 팽팽한 피부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그립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 해가 나오기를 빌지만 회색 돌과 유황석이 깔린 고원에 떨어지는 것은 비뿐이다. 비에 젖은 메리노 양떼는 진흙에 발이 빠져 파란 물웅덩이에서 서로 밀치며 바동거린다. 골로몬은 밀짚모자로 한없이 춥게 느껴지는 바람을 막으면서 망토로 원숭이와 앵무새를 감싸 안고 맨발로 뒤따라온다.

       바야돌리드에 들어서자 불길에 타는 역겨운 냄새가 그들을 맞이한다. 황제의 전 고문관 부인을 화형에 처하고 있다. 집에서 루터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쪽으로 살 타는 냄새, 속죄복 타는 냄새, 이단자들 굽는 냄새가 몰려든다.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수감자의 고함소리와, 산채로 매장된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학살의 비명소리와 어머니 자궁 속에서 쇠꼬챙이에 찔려 죽어가는 태아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내려온다. 어떤 사람들은 피와 눈물 속에서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섯째 봉인이 뜯어졌다고 소리 지른다. 해가 머리털로 짠 천같이 검어지고 달은 피처럼 되리니, 땅의 왕과 귀족과 부자와 대장과 힘 있는 자들, 그리고 모든 종과 자유인은 토굴과 바위틈에 숨으리라.

항해자의 성모 - 세비야의 인디아스무역관에 걸려 있던 그림      그러나 시우다드레알을 지나자 사람들이 뭔지 모르게 조금 변한 것 같다. 플랑드르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들 세비야에서 들리는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살아간다. 곁에 없는 자식 소식도 듣고, 대장간을 카르타헤나로 옮긴 삼촌 소식도 듣고, 리마에 훌륭한 여관을 소유한 사람 이야기도 듣는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도 있다. 석공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난한 양반은 말과 하인들을 데리고 떠났다. 인디아노 후안과 순례자 후안은 보라색 가지, 황갈색 멜론, 줄무늬도 선명한 수박밭 사이로 오렌지 과수원이 솟아난 것을 보자 발걸음이 가볍다. 백포도주를 파는 술집, 가무잡잡하거나 ‘구운 배(梨)’ 색깔이나 가무잡잡 피부색의 흑인여자들, 합창대 의자와 같이 엉덩이가 튀어나온 여자들이다. 염장식품 냄새, 선박수리용 역청 냄새, 목재에서 풍기는 송진 냄새 사이로, 승선하는 항구는 요란하다. 두 후안이 무역관에 도착할 때 두 사람 모두 ―목걸이를 한 흑인과 함께― 피카로 같은 용모여서 ‘항해자의 성모’도 제단에 무릎을 꿇는 그들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저들을 그냥 두소서.” 세베데오와 살로메의 아들 산티아고는 수백 개의 신도시가 저와 유사한 불한당의 덕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들을 그냥 두소서. 나와 약속을 지키려 저쪽으로 가나이다.”

       산티아고는, 항상 준비태세를 갖추고 다니는 바알세불처럼, 장님으로 위장하고 넝마를 입고 뿔 위에 커다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부르고스에 비가 그친 것을 보고 시장의 좁은 골목길 벤치 위로 올라가 긴 손톱으로 비우엘라를 뜯는다.


기사양반 힘내세요
귀족양반 힘내세요
마음착한 가난뱅이
희소식을 들어보소
놀라웁고 신기한것
보고싶은 사람이여
세비야서 배열척이
한꺼번에 떠난다오


       저 위는 하얀 은하수, 별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