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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와 나 / 보르헤스 2003-10-22 / 7090   

보르헤스와 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박 병 규 옮김



     세상사를 경험하는 사람은 바로 다른 나(el otro), 보르헤스이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걸으면서 철문과 현관 아치를 눈여겨보려고 별 생각 없이 발길을 멈추기도 한다. 우편물을 통해 보르헤스의 소식을 듣고, 교수 명단이나 인명 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본다. 또한 모래시계, 지도, 18세기의 활판 인쇄, 어원학, 커피 맛, 그리고 스티븐슨의 산문을 좋아한다. 다른 나도 역시 이런 것을 애호하지만, 허세를 부려 한 배우의 특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들 관계가 적대적이라고 한다면 과장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살아야,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 보르헤스는 문학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서 그 문학은 나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르헤스가 가치 있는 글을 몇 편 썼다는 사실은 별 어려움 없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이 나를 구원할 수는 없다. 좋은 글은 다른 나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언어나 전통에 속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내 자신은 틀림없이 소멸될 운명이며, 단지 나의 삶의 어떤 순간만이 다른 나에게서 살아 남을 것이다. 나는 과장하고 거짓을 꾸미는 보르헤스의 못된 습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조금씩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만물이 제 모습으로 존속하기를 바란다고 얘기했다. 돌은 영원히 돌이고자 하며, 호랑이는 영원히 호랑이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아니라(나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보르헤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책에서보다는 다른 일에서, 예컨대 힘들게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서 내 자신을 더 잘 인식한다. 몇 년 전, 나는 보르헤스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도시 변두리에서 떠도는 전설적인 얘기를 다루기도 했고 시간과 무한을 가지고 놀이하기도 했으나 이제 그러한 놀이는 보르헤스의 것이 되어버려 나는 다른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덧없이 사라지고,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있다. 그 모두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나의 것이다.

     나는 둘 중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